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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고선지, 고구려 기상으로 뻗어가라

by 전경일 2017. 7. 6.

고선지, 고구려 기상으로 뻗어가라

 

고구려 멸망 후 33년 지난 700년 경 한 젊은이가 당군(唐軍)의 포로이자 노예 신분인 유민(流民)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신분상 제약으로 그는 평생 글공부를 하지 못한 탓에 글을 읽거나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장으로서 타고난 골격과 지략, 리더십을 갖춰 20대에 이미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당군의 서역 정벌 지휘봉을 꼬나들게 된다. 그의 이름은 고선지. 아버지 고선계를 이어 무장으로서 유일하게 중국 사회에 진출한 것이다.

 

망국인의 운명은 가혹했다. 당의 분산 정책으로 고구려인들은 중국 내륙과 변방으로 각각 분산이송되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사내의 씨는 다 죽여 없애라!”라는 광포한 명령을 내릴 정도로 철저하게 피지배 민족을 핍박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 역사는 철저하게 파괴된다. 이런 때에 고선지는 역사적으로 등장해 그때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넓게 서역에까지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740년경 고선지는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 달해부(達奚部) 정벌에 나선다. 이 공으로 그는 서역과의 접경지역인 당의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의 명실상부한 이인자로 부상하며 교역의 젖줄인 실크로드를 지배한다. 당시 당 조정은 번장(番將)을 기용해 변방을 수비케 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소수민족 출신인 고선지를 부도호에 임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고선지의 역량이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고선지의 활동 무대가 되는 안서사진(安西四鎭)은 당과 토번간 치열하게 각축전이 벌어지던 최전방이었다. 이곳을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교역의 이익을 누가 거머쥘지 결정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안서도호부의 안정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747년 당 현종은 고선지에게 토번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토번이 당을 제치고 서역 제국의 맹주 자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토번이 당과 동맹을 맺고 있는 파키스탄의 간다라나 아프가니스탄의 계빈국(카불)을 손에 넣고 그 여세를 몰아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와 손을 잡는다면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될 게 분명했다. 당으로써는 엄청난 위협이자 교역 이익이 한순간에 날아갈 수 있는 위험이었다.

 

당시 토번의 급격한 신장은 중국 서부의 20여개국이 당에서 돌아서게 할 정도였다. 중국과 토번이 비단길과 파미르고원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는 길을 장악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운 것은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토번은 추수가 끝날 무렵이면 중국 동부지역에 지속적으로 침입해 곡식을 약탈해 가곤 했다. 역사상 토번의 일약 웅비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 무렵 고선지에 의해 토번이 정복된 까닭에 그 후 티벳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선지 정복 활동의 후과가 1264년 간 이어지며, 오늘날 티벳의 독립 운동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7477월 고선지 부대는 북부 파키스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소발률국(키르기트)을 치기 위해 해발 4575m의 탄구령(다르코트)를 넘고 있었다. 이 원정은 힌두쿠시 지역 안의 티벳 민족이 더 이상 약진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이었다. 당은 이 소발률국을 침으로써 토번의 대 서역 무역 독점권을 깨고자 했다. 토번 정벌시 고선지는 역사상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미르고원(연운보)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대 장정을 전개한다. 이는 알프스산맥을 넘은 나폴레옹보다도 더 대담하고 야심찬 전략이었다.

 

이런 험로를 통해 적을 기습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을 건 모험이었다. 적도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심장부에 기습군을 즉각적으로 투입해 첫 전투에서부터 적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켜 버렸다. 고선지는 기상천외한 전법으로 공격군을 세 갈래 길로 진격시켜 불과 두 시간 만에 연운보를 함락시켰다. 이로써 파미르 고원을 통해 사라센 제국과 연합해 당의 서방 진출을 막으려던 토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전투 직후 고선지는 탄구령에서 등교를 끊어 버리게 함으로써 토번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이 등교는 소발률국이 대발률국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토번으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교통로였다. 이처럼 고선지 군은 당 제국의 서부 지역인 파미르 고원과 탄구령을 성공리에 원정함으로써 중국의 중앙아시아 경략에 이정표를 세웠다. 크고 야심찬 도전과 즉각적인 군사 운용, 아군에게도 자칫 불리할 수 있는 등교 절단과 같은 배수의 진과 같은 전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담대한 전략임에 분명하다.

 

승리를 이뤄냈지만, 피지배 민족 출신 고선지에게는 온갖 불합리와 불리함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하서절도사 부몽영찰로부터 음해를 받은 것은 그 한 예일 뿐이다. 고선지의 공을 시기한 부몽영찰은 어떻게 하면 그를 죽일까만을 고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이라며 욕을 퍼붓기도 했다. 안팎의 도전은 거셌지만, 고선지가 이룬 서역 정벌로 당은 실크로드를 장악하며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한다. 그러나 풍요는 다른 한편 현종과 양귀비를 비롯한 당 조정 내부의 사치를 불러오며 당은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지금까지 연전연승한 고선지에게는 역사상 최대 전투이자, 인류 문명사적인 대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 군과 당군은 탈라스 평원에서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맞붙게 된다. 이 전투에서 고선지군은 항복했던 케르룩군의 배신으로 후미가 협공 당하며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써 전투는 이슬람의 승리로 귀결된다.

 

이 탈라스 전투는 아시아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데, 이 패전으로 중국은 오늘날에까지 중앙아시아를 이슬람의 세력권으로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2001년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탈레반에 의해 바미안 불상이 폭파되는 장면이 TV를 통해 전 세계에 전달되었는데, 이 또한 알고 보면 역사적으로 고선지군의 패배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중국은 놀라운 발명품을 서방 세계에 전달해 주는데 그건 바로 제지술이었다. 이 혁신적인 기록 장치는 이후 유럽 사회에 퍼지며 르네상스를 여는 전기가 된다. 세계 4대 발명품 중 하나가 고선지군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 진 것이다.

 

탈레스 전투 후 4년 지난 755(천보 14) 중국은 내란의 조짐이 일어나며 마침내 안록산의 난이 터진다. 이때 고선지는 난 진압의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고선지군은 반군에 맞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되는데, 평소 고구려인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던 당 조정이 고선지가 황명을 거스르고 후퇴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주청한 것이다. 내란 중 장수를 죽이자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황제의 명에 따라 그가 참형을 당한 것은 755(천보 14) 12월 병오였다. 이 믿기지 않을 처형은 아무래도 안록산이 이민족 출신이었기에 고선지도 이민족 출신으로서 잠재적 반란 대상으로 지목되어 제거 대상이 되었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 많은 군졸들이 고선지를 따르고 있었기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 조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거라는 점 등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고구려 출신이었지만, 당 조정에 가장 충직스러웠던 장수를 죽인 현종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안록산의 반군이 수도 장안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부랴부랴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현종은 도주 도중 관군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결국 사랑하는 양귀비를 죽이게 되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개원의 치라 불릴 정도로 르네상스를 구가하던 당의 몰락은 충신을 죽인 현종의 편벽된 의사결정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글로벌 위기가 다시 몰아치는 어려운 경영 환경에서 고선지처럼 크고 야심찬 목표로 감히 누구도 상상치 못한 도전을 한다면 위기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천하를 도모할 인재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걸 보고 못보고는 순전히 사람의 몫임을 고선지의 운명과 당나라 현종의 몰락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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