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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부모코칭 |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by 전경일 2009. 2. 2.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을 때, 나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언제나 새롭다. 막내인 나는 형제들 중 누구보다도 사랑받은 자식이었다. 어떤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또렷해지곤 한다. 무서운 꿈을 꾸고 났을 때, 나는 아버지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당신은 잠결에서도 나를 어르며 받아 주셨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응석을 부리며 밥을 먹던 일, 아버지의 팔베개를 벤 채 아스라이 잠속으로 빠져들던 일, 아버지의 등에 업혀 군청 뒤 군인 극장에 갔다 오던 일... 그 모든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그렇게 큰 사랑을 베풀고 내 곁을 떠나가신다.

 

아버지의 생체 시계가 멈춘 날, 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극진한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사상(緣起思想)처럼 아버지가 있음에 내가 생겨났지만, 그 분이 떠난 다음에도 나는 여전히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늘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을 안다.

운명이란 개별적인가? 나를 만든 둥지는 세월이 훑고 지나간 뒤, 낡고 헐거워져 바람에 날아갔지만, 나는 그 둥지에서 부화해 날개 돋은 채 세상을 향해 날아갔다. 나를 낳아 기른 둥지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쁜 세상 속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 형제들은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다. 내 차례이던 날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된 저녁시간, 나는 용기 내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를 낳아 주시고, 특별히 귀여워 해 주시고, 잘 키워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내 목소리는 떨렸고, 그때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의 손을 내려 보았다. 아버지 손등에 난 동상 흔적이 보였다. 나는 그 상흔에 익숙하다. 그 상처는 오래 전, 시골에서 농사지을 때 한겨울에 나무 하러 가셨다가 걸린 동상의 상처였다. 약이 시원치 않던 시절, 광목에 밥풀을 먹여가며 동여 메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모습은 내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시골서 농사를 지을 때 맨발로 논밭에 들어서시던 모습은 지금도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갈라진 발 뒤쿰치는 병상에 오래 계시는 동안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예전처럼 대지에서 생산을 주관하던 농부의 그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70년대에 서울에 올라 오셔서 대학 부지에 채소를 재배하긴 했지만, 결국엔 농토다운 땅을 어루만지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나는 눈물을 눌러 참으며 아버지의 여윈 손을 잡았다.

“알았으면 됐다. 너로 인해 행복했다. 열심히 살거라.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다. 욕심 부리지 말거라.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네가 있어 내가 남한테 부끄럽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 내가 아들 잘 키웠단 얘길 들었다. 이 정도 됐으면 됐지...”

 

기껏해야 대기업 부장인 내게 아버지는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보시기에 험한 세상에 그나마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는 자식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잊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메모했다. 단 둘이 나누는 당신과의 마지막 대화가 될 수도 있다. 당신은 생의 마지막에 나와 단둘이서 병실에 남아 부자지간의 정과 사랑과 애틋함을 나누고 계신 중이었다.

 

가장 진실한 말일수록 어떤 땐 입을 막아 버린다. 때로 우리는 체면 때문에 입 밖에 떼기 어려운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가장 힘든 그 순간, 그동안 꺼내기 힘든 말들을 쏟아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닌데...

 

그 날은 2006년 11월 9일이었다. 곧 몇 분 지나면, 아버지의 82세 생신이었다. 나는 밤 12시가 넘었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 생신축하 드립니다”고 인사드렸다. 아버지는 생이 다해가는 시점에서  당신의 생일에 별 다른 감회를 보이지 않으셨다. 육신을 덮친 고통이 전신을 압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발병이래, 심장병의 특징상 편히 누워 수면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새벽까지 앉은 채로 침대의 난간을 쥐고 숨 가쁘게 앉은 잠을 주무시기도 했다. 그 같은 기억이 날 때면, 나는 그만 가슴이 미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과거를 회상 할 때, 나는 아버지와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 알게 되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문학청년으로 살겠다며 소설책을 집어든 나를 꾸짖으실 때, 나는 아버지가 왜 역정만 내시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질풍노도의 젊음과 맞설 때, 그 분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걱정하고 낙담해 하시는지를, 나는 훗날 자식을 키우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랑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사랑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끝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월요일 아침 출근했을 때였다. 택시를 탔으나 공교롭게도 병원 위치를 잘 모르는 기사가 20여분을 엉뚱한 사잇길을 내달리며 시간을 허비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단말마의 숨을 크게 두 번 쉬시고 운명하셨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것은 내가 병실에 급하게 뛰어 들었을 때였다. 잠을 주무시듯 누워계신 아버지의 육신은 아직 체온이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운명을 보지 못한 채, 당신과 작별해야만 했다. 그 전 날이 내가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날이었던 것이다.

 

사랑은 클수록 알지 못한다던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도 갚아 드리지 못하고 보내드려야 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 회한에 빠지고, 경건해지지만, 다시 세상 밖으로 돌아 나오면 삶의 진실성을 찾거나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일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죽음 같은 삶을 살면서도 불나방 같이 산다. 때론 그런 것이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죽음은 없다. 우리가 삶을 통해 인생의 면면을 알게 된다면 삶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나는 못 다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생의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한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죽음을 사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상기할 때 떠오르는 깊고 고요한 샘물 같은 슬픔이나, 삶이 보여주는 명징성을 마음에 지닌 채 남은 사람으로서 나머지 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아버지와의 작별은 먼 훗날 다시 말날 거라는 당신의 묘비 시구로 새겨 드렸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나의 노모와 당신의 자식들이 마음으로 새겼다. 우리는 세월 앞에서 작별했으나 언제고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


천국에로의 초대


      - 아버지께 바치는 시, 三男  경일

 


나 천국으로 갈 때
다 놓고 가리라

손에 쥔 거
마음속에 담은 거
다 내려놓고 가리라

아름다운 세상,
빈손조차 훌훌 턴 채
천국으로 가리라

나 천국으로 갈 때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리라

천국에서 나 초대할 때
아름다운 기억일랑
다 챙겨서 떠나가리라

슬프고 아픈 감정 따윈 다 던져 버리고
소중하고 따뜻했던 기억들만 고이 들고서
홀연히 오르리라

가슴 설레며 세상 끝에서
세상 한가운데를 향해
마지막으로 인사하면서 떠나가리라

조금은 서글퍼도
조금은 아쉬워도
얼굴 가득 미소 머금고
손 흔들며 가리라

잘 있으라고
사는 게 즐거웠다고
아름다웠노라고
사랑의 추억 챙겨서 떠난다고
그렇게 인사하리라

나 세상 떠나는 날
그대에게 작별의 입맞춤 하리라
아이들과 여자들과 힘든 노인들
볼과 입술과 두툼한 손 등 위에
입 맞추리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사용했던 소지품 따윌 남기며
내 작은 생애를 안타까워하면서
나 작별 하리라

굿바이-
그대 잘 있으라
살아서 못 다한 것
살아서 못 마친 것
살아서 못 이룬 것
끝내 아쉬워 않고
마음 훌훌 털고
이제는 천국에서 살고파
떠나간다고 나 말하리라

내가 사는 곳, 이곳 천국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날 거라고 손 흔들며
굿-바이 

나 돌아 올 때면 눈물 왈칵,
쏟을지 모르겠다며
그대들 잘 있으라고
작별인사 하리라

내 생의 마지막 날,
세상의 첫날을 위해
사랑의 인사 남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