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을 가장 이상적인 CEO로 보는 이유는 그가 현시대의 리더십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선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항시 변함 없었다. 예를 들어, 세종은 문종 때부터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대략 200여 번이나 인용되면서 역대 CEO들 중 제일 많이 언급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그는 죽어서도 조선 제일의 벤치마크 CEO 였던 셈이다.
우리에게 가장 현실성 있는 리더십은 바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찾아진다. 세종이 바로 그러했다. 그는 CEO의 전범(典範)이었고, 국가 경영의 영원한 레퍼런스(reference)였다.
이러한 세종 자신의 리더십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 자신의 학문적 깊이와 균형 잡힌 인격에서 나온다. 그 시대는 자신만 준비되어 있다면, 충분히 세종과 같은 CEO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환경의 조건이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인식하고, 최상의 CEO로 ‘자기 만들기’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즉, 세종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세종시대 가장 큰 수혜자는 세종 자신]
세종 경영은 경영자가 시대의 어려움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결국엔 늘 자기가 문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CEO가 누구냐에 따라 그 시대의 경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런 차원에서 끊임없이 자기 훈련을 쌓았다. CEO가 되기 전에도 기존의 역사서와 유교 경전은 물론이요, 새로이 입수되는 성리학의 총서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지적 동향 전모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세종은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통일 신라 이후로 이 나라의 역대 CEO들이 추진해 온 중앙집권적인 문치주의를 자기 대에 완성해 냈다.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한국은 중국화의 길을 걸어왔다. 중국에게 패한 것이 단순히 무력이 약해서만이 아니고, 문화의 격차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라는 유당사(遺唐使)나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중국문화를 배우는데 열중했고, 장보고 등은 그 해상교통로를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중국인 귀화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당나라도 중국 중심 세계관을 주변국에 심기 위한 정책으로 신라ㆍ발해ㆍ일본 등 주변국에 문화전파를 허용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당문화 수입은 모방과 학습 수준에 그친 것이 많았다. 예컨대, 관직 이름만 보더라도 당의 관직명이나 관계명을 그대로 썼다. 이러던 것이 수세기가 지난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독자적인 문화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세종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과업을 완수한 CEO 였다.
재임기간 동안 CEO로서의 업적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뤄낸 업적 하나하나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다. 사실 그가 결실을 이뤄낸 분야는 거의 모든 영역을 망라한다.
-어문관련
「훈민정음」 창제
-행정관련
전국지방 제도의 확립
도성 축조
-농업 관련
천문 관측 기구 제작
영농서 발간
-의학 관련
각종 의학서 편찬
-자주 국방 관련
북방영토 확충(4군 6진)
신병기 개발
군용선박 개발
병서 간행
-문학 관련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용비어천가
-음악관련
보태평 등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라]
세종 경영의 핵심은 강제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신하들의 자발적인 충성심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실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CEO 였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에 의지하도록 만들 줄 아는 리더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약속된 CEO’로서 신하들의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CEO 세종이 자발적 추종자를 얻게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함께 인간적 매력, 그리고 사람을 쓸 줄 아는 용인술 및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보상 체계의 가동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국가 경영을 위해 ‘준비된 CEO’였다. 그리하여 그는 취임 초부터 CEO로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나가며 국가 경영의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또한 자신의 경영의 전범을 무수히 많은 중국 고대의 사서(史書)속에서 찾아냈다. 다른 한편 조선의 이전 창업자들도 그에게 나름대로 또 다른 유형의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했다. 세종이 섭렵한 고전은 국가 경영에 관한 풍부한 역할 모델들을 제시했다.
세종은 배우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고전을 통해 자신에 맞는 카리스마를 개발해 냈고, 이를 현장 경험을 통해 자기 고유의 경영 모델로 발전시켰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는 역사를 ‘배우는 대상,’ 즉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자신 또한 후세의 경영자들에 의해 모범적인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세종의 이같은 자세는 매우 지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정상의 자리에 오를수록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종합해 볼 때, 그는 지성과 감성 모두에서 하나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사람이었다. 실제 문무(文武)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는 인재를 우리 역사가 받아들이기란 좀처럼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 국가 경영의 한 획 긋는 위대한 CEO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경영을 창조의 과정으로 격상시킨 예는 일찍이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경영은 전략 운용상의 문제였고, 단순히 계량적인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정도가 경영의 일반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세종은 전무후무하게 정신ㆍ문화적 인프라 창조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런 카리스마와 더불어 그 특유의 스킨십은 세종 자신을 추앙의 대상이 아닌 친근감의 대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책임 있고 절제된 친근감은 상하간 솔직하고, 분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의 리더십의 특징인 설득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언제나 설득은 리더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교류방식이다. 세종의 카리스마는 상대를 감화하고 설득해 마침내 녹여 내는 -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주조(鑄造)해 내는 - 바로 그런 종류의 리더십이었다.
모든 신하들이 그의 인격의 영향권 내에 자발적으로 귀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권위 안에 그들이 머물렀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애정 속에 소속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적인 리더십 발휘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어떤 종류의 인물이었나 하는 질문은 이러한 영향력이 어떻게 그와의 만남을 갖게 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광범위하게 백성들 속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카리스마를 얘기함에 있어 아무리 군주시대의 CEO라고 하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발적으로 ‘해동의 요순’이라는 이미지를 새겨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역사에고 그런 사람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기 때문에 세종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