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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1821년과 2020년에 번진 글로벌 펜데믹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by 전경일 2020. 4. 10.

1821(순조 21) 813일 평안 감사 김이교가 급히 장계를 띄워 조정에 보고해 왔다.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怪疾)이 유행하여 토사(吐瀉: 토함과 설사)와 관격(關格: 급체로 가슴이 막히고 계속 토하며 대소변이 통하지 않는 위급증상)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일 동안에 자그마치 1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

 

항간(巷間)의 물정(物情)이 기도를 하였으면 하는데 기도도 일리가 없지 않으니, 민심을 위로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비록 지금 크고 작은 제사를 모두 중지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제사와는 다르기 때문에 먼저 본부 서윤 김병문(金炳文)으로 하여금 성내(城內)의 주산(主山)에 정성껏 기도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확산될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또 친히 경내의 영험이 있는 곳에 기도를 올리려고 합니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으로서 아파도 치료를 하지 못하는 사람과, 이미 사망했는데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은 별도로 구호하고 사정을 참작하여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사망자의 숫자와 돌림병의 상황은 앞으로 잇달아 아뢸 생각입니다."

 

콜레라의 급습이었다.

 

김이교의 보고처럼, 이 급성 콜레라[호열자]설사와 구토를 하고, 전염되며, 그 속도가 표화(熛火: 날으는 불)처럼 빠르며, 한번 걸리면 10명중 8, 9명이 죽는그야말로 어떻게 손 쓸 수조차 없는 역병이었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어 그저 괴질이라고 하거나, ‘이름없는 병(無名之病)’, 또는 륜질(輪疾: 유행병)이라고만 불렀다. 조선에서는 처음 겪는 전염병이고, 또한 병의 실체를 모르니 명명조차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조 연간 전 세계를 강타한 급성콜라라 펜데믹(Pandemic)’이었다.

 

 

이 전염병은 최초에 인도로부터 발병하여 중국 동북의 산해관을 통과하여 조선의 평안도, 서울, 경기, 영남지방으로 급속히 번져 나갔다. 그런데 이 급성콜레라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다는 증거는 괴질 발생 4일 후인 817일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다 온 홍언모가 보고에 잘 나타난다.

 

 

“(오다 보니) 연로(沿路)에 괴질(怪疾)이 크게 유행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남의 연해안 지역 수천리 사이에 사망한 백성들이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순조 연간 콜레라는 중국에서 유입된 것이다.

 

 

그런데 이 글로벌 펜데믹은 1821년 조선에서 발생하기 전후에 이미 몇 년 간에 걸쳐 전 세계에 발생해 각 지역을 강타했다. 1817년 인도 벵갈지방, 1818년에 실론(스리랑카), 1819년에는 말라카와 서인도, 1820년에는 남아프리카, 필리핀, 중국, 1821년에는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조선, 일본, 1822년에는 시리아, 1823년에는 티프리스, 바쿠와 아스트라칸(Astrachan)에서 발생하며 수많은 인명의 손상을 가져왔다. 우리나라로의 유입 경로는 멀리 인도로부터 말레이반도와 중국을 거쳐 전파되어 온 것이다.

 

 

정부 기록을 보면, 1821년과 1822년에 사망자 수가 누적 십만에 이른다(累十萬)’다고 보고되어 있다. 하지만 조정의 공식 집계에서 포함되지 않은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왜나면 역병은 발발 및 보고를 각 군과 현에서 집계해 도관찰사에게 보고하고 이를 다시 도관찰사가 중앙에 보고하는 식인데, 관리들은 방역의 책임 모면을 위해 사망자 수를 대폭 줄이고 왜곡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염병에 걸릴 것을 우려해 사망자 속에 뛰어들어 숫자를 파악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인구수가 700만이었으니 누적 십만에 이른다다는 것은 인구의 1.428%가 사망한 것으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1821년에 벌어진 이 글로벌 펜데믹이 초강세를 띤 시기는 7월말 경부터 10월까지였다. 3~4개월이 유독 심했고, 날씨가 선선해지는 계절과 맞물려 주춤해 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겨울에 시작해 날씨가 따뜻한 봄이 되었어도 강력한 위력을 보이고 있는 지금도 코로라와는 다른 유행 계절상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전염병의 특성에 기인되지 않나 생각된다.

 

 

그런데 이 급성콜레라는 그 해(1821)로 그친 게 아니었다. 이듬해인 1822년이 되자 428일 서울에서 발병 보고가 있고 나서, 73일에는 호남, 711일에는 황해도, 82일에는 함경도, 83일에는 동해안 지방에서 연달아 발병했다. 전해와 다른 점은 3개월가량 일찍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2차 발병은 왜 이듬해 4월부터 시작되었을까? 보건전문가들은 이 해의 콜라라 유행은 전 년도(1821) 유행의 보균자에 의해 재발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특이점은 발병 지역이 서울을 제외하고 직전 해의 발병 지역과 다른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전 해의 발병지역 사람들이 죽어나, 살아난 사람들은 항체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지역이 아닌 타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항체 생성이 발병의 지역 변동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결국 항체가 없는 사람에게서 발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은 지금의 코로나 방역 관련 데이터를 혹여 있을지 모를 2차 발병 예방을 위한 중요한 빅데이터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올해 치료되고 완치된 사람들에 대한 신체정보, 지역, 가족 관계 및 접촉하는 사람 등에 관한 정보가 혹시 발생할지 모를 내년도 재발에 대한 즉시적이고 효과적인 방역에 중요한 자료가 될 거라는 얘기다.

 

 

이처럼 순조 연간의 콜레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 전염병이 돌자 백성들은 농촌을 떠나 유리걸식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다시 기근이 몰아 닥쳤다. 어린 아기를 버리고 도망친 여인, 남편이 죽어가는 데도 자신의 죽 그릇을 움켜잡고 죽을 퍼먹는 아내, 죽을 끓여 구휼하는 와중에 서로 다투고 밟혀 죽은 사례 등은 물론 심지어 한 여종은 굶주림 끝에 자신의 자식 둘을 죽여 먹은 일까지 벌어졌다. 얼마나 혹심한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있다.

 

 

이런 중에 곡가가 상승하자, 간상모리배들은 국가적 재난을 이용하여 치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양식을 구하는 것은 재정적 능력과 계급에 따라 너무 달랐기에 진대(賑貸: 나라의 곡식을 풀어 꾸어 주는 일)에도 계급별 특혜가 발생해 오히려 가진 자들이 더 이득을 얻는 그들만의 특수(特需)시기가 되어 버렸다.

 

 

삼정의 문란(수세, 군포, 양곡대여에서 극단의 수탈 행위를 가져오게 한 구조),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결국 민중들은 농토를 완전히 떠나 버리고 만. 이는 도니노 현상을 일으켜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희망 잃은 백성들은 살기 위해 세상을 뒤엎고자 잦은 민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결국엔 한말의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행의 순환고리가 작용한 것이다.

 

 

우리는 순조 연간 글로벌 펜데믹에 대한 대응을 통해 배울 점이 있다.

 

지금 소득과 상관없이 전 국민에게 100만원씩 주자는 논리는 실제 구휼(救恤)의 의미를 퇴색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대판 삼정의 문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지지 않은 서민은 사회 기저 층이다. 이들이 무너진다면 국가를 구성하는 절대 인구의 침몰을 뜻한다. 국가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가진 자들은 가지지 않은 자들의 희생 위에서 혜택을 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면 그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 점을 역사적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보다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휼을 일률적으로 하자는 얘기는 진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케 한다. 공평은 1/n으로 나누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여건에 맞게 국고를 분배해 생존을 도모케 하는 것이다.

 

순조 연간의 콜레라는 계급을 나눠 전염되지는 않았지만, 그 재정적, 사회적 대응에서는 철저히 계급을 구분하고 차별해 사대부, 상민, 노비 등이 각기 겪은 콜레라 시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없는 자들은 죽고 빼앗겼으며, 가진 자들은 살고 더 부유해졌다.

 

 

전염병에 대응한 봉건왕조의 이 같은 대응 방식은 백성들에게 무력함을 넘어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백성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행동했다.

 

첫째는, 초자연적인 힘의 의존해 온갖 종교적 관념체계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국가적 재난 극복이 사회적 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한 게 아니라 세상을 등지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두 번째는, 농촌이 붕괴되면서 주요 생산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는 곧 국가 경제의 대대적인 침체와 파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회적 변동은 무엇을 가져왔을까? 결국 조선왕조의 몰락과 식민지화를 가져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21년 조선에 유입돼 조선을 붕괴로 몰고 간 콜레라에 대해 지금 살펴보는 것은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첫째, 올해의 확진 및 방역 데이터를 코로나의 완전 근절을 위한 데이터로 활용해 연구해야 한다. 질병 본부의 위상 격상이 필요하다.

 

둘째, 구휼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한국 사회의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탐욕스런 자본주의식 의식과 행태에 경종을 울리는 실질적이고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조치들을 정부는 앞장서서 취해야 한다.

 

셋째, 산업 각 부분의 인적 자산이 유리되지 않도록 정부는 행정적이며 직접적인 조치를 위하여야 한다. 특히 대기업이 유보한 현금은 인적 자산 수호에 쓰이도록 강제하여야 한다.

 

넷째, 애프터 코로나(AfterCorona)와 관련되어 변화하는 국제 경제 질서(기회 요인 발굴)에 대한 정부 차원의 테스크 포스팀을 신속히 꾸려 활동해야 한다. 이를 통해 코로나 이후의 글로벌 기회 선점을 지금 당장 이뤄내도록 하여야 한다.

 

다섯째, 세계적 수준의 시민의식을 보여주는 국민을 더 품고 안는 애민의 리더십을 각처의 리더들은 계속 보여주고 더욱 고양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하며, 이에 앞장서야 한다.

 

역사는 단지 사료에 들어 있는 과거의 사실(史實)이 아니다. 우리가 꺼내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엄청난 보고이다. 순조 연간의 콜레라에 대한 탐색은 바로 이 같은 크나큰 교훈을 오늘 우리 후손들에게 시사하고 있다. 슬기와 결단의 리더십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참고자료

신동원, <조선말의 콜레라 유행, 1821~1910>, 한국과학사학회지11권 제1, 1989.

박영규, <조선조현종경신연간의 기근에 대해서 -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향토서울, 19, 1963.

순조실록 24, 순조 21817일 갑오 2번째 기사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