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 CEO 이자, CIO(Chief Information Officer)였다. 그의 정보 수집 및 관리에 관한 신념은 오늘날 인터넷의 특징인 새로움ㆍ개방성ㆍ유효성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는 정보에 민감했으며, 정보를 국가 경영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고 심지어 그 자신이 정보를 유통시키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더블 타이틀, CEO & CIO]
사실, 정보를 모으고 이를 통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CEO를 가까이 둔다는 것은 구성원 전체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혜택을 누리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학습 시스템이 만들어 지며, 거기에는 분명 자유로운 정보의 교환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 마인드는 민주 경영과 연결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은 훌륭히 CIO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세종은 죽을 때까지 배우고자 한 CEO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삶과 경영의 모든 면에서 계속해서 자라는 식물과 같았다.
CEO의 이런 권장할만한 ‘습관’은 전국가적으로 확산돼, 그는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기 위해 정보 공유자의 일원으로써 백성들을 파악함으로써 성공적인 국가 경영의 길을 놓았다. 백성들에게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 그리하여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한「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주 CEO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CIO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와 같은 문자 창제를 통해 만 백성에게 커뮤니케이션의 편리성을 불어 넣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해외 출장 갔다 올 때 원서 좀 사와]
세종의 경영은 언제나 구체적인 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사실과 데이타(fact data)위에 성공적으로 자신의 상상력과 창조성을 얹었다. 그가 다방면에 걸친 자료를 중국과 이슬람으로부터 얻고자 했던 것은 그가 얼마나 정보 수집에 목말라 했으며, 정보 관리의 일인자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는 항시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가는 출장자 편에도 신간 도서를 구해 오라고 지시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다면 아마존에 가서 클릭 몇 번으로 구입했겠지만, 당시에는 출장자 - 거기엔 사신(使臣)도 있었다. - 편에 새로 나온 책을 구해 오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세종은 해외 출장자들로 하여금 아예 ‘유리창(琉璃廠)’이라는 백화점식 서점 근처에 숙소를 정하게 하고 새로 나온 책이나 판각들을 두 부씩 사오게 했다. 혹시 떨어져 나간데가 있을까봐 내린 지시였다. 그리고 이미 절판된 책이 있다면 그 중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중국의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구하기도 했다.
이곳 ‘유리창’에서 출장자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기막힌 과학 및 IT기술의 자료ㆍ기술서들을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유리창은 그 뒤로도 우리 과학사에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지전설(地轉說)과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을 주장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 화이(華夷)를 부정하여 우리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을 대자연의 일부로 이해한 18세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도 바로 이곳에서 중국 문화와 서양 과학에 크게 눈을 뜨게 된다. 그것은 비단 홍대용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18세기 실학자들이 다 같이 공감하는 바였다.
홍대용은 영조 41년 연행사 일행으로 북경에 6개월간 머물게 되는데, 그 때 들른 곳이 바로 이 유리창이었다. 유리창은 자금성을 지을 때 유리기와를 굽던 곳이라 그렇게 불리게 된 곳다. 책방과 골동품 가게가 즐비해 우리나라의 인사동과 같은 곳이었다. 유리창에는 문을 연지 700년이 넘는 서점 영보재가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의 서점, 문방구점 일대는 연행사 일행이 반드시 들려야 하는 단골 방문 장소이기도 했다. 이곳은 단순히 물품을 구입하는 곳만이 아니라, 당대 세계적 IT 및 과학 기술 전문가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이곳은 세계적인 인재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심포지움, 세미나를 여는 곳이기도 했고 컨벤션센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홍대용은 이곳에서 만난 인물들과의 대화집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간정동필담>이다.
세종은 바로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서적을 수입해 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세종 때부터 유리창을 들르며 선진적인 문물을 입수하던 선배들의 이러한 전통은 계속 이어져 훗날 영ㆍ정조시기 실학사상이 용틀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유리창과 관련되어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 팔리는 조선의 서적으로는 『동의보감』이 유일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허준의 책은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국제적 베스트 셀러였던 것이다.
[도서관을 건립하다]
이렇게 수집된 책들 중에 필요한 것은 인쇄소(당시의 ‘주자소 鑄字所’)에서 복사판 - 가끔, ‘해적판’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을 찍어서 배포하기도 했고 각도 감사들에게 찍어 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종 대에는 각 분야에 걸쳐 총 80여 종의 수많은 책들이 편찬ㆍ간행되었다. (이 때는 저작권이 없었던 시기라는 점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사실, 이 문제는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게 우리 모두‘한글’을 쓰면서도 세종에게는 한푼도 로열티를 내고 있지 않다!)
이렇게 하여 집현전 도서관에는 많은 책들이 모여 기존의 시설로는 도저히 이를 수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하여 세종은 집현전 건물을 새로 짓고, 그 북쪽에 ‘장서각(藏書閣)’이라는 도서관을 새로 건립하였다. 이 때는 그가 조선의 CEO - 여기서는 CIO의 자격으로 - 로 취임한지 11년째 되는 해였다.
특히 세종의 CIO로서 정보 관리 능력은 빈틈 없을 정도여서 그는 서적들을 한결같이 ‘경사자집(經史子集) 4부(四部) 분류체계’라는 방법에 의해 분류해, 소장케 했다. 또 한편으로 세종은 국내ㆍ외에서 서적을 사들이거나 기증 받기도 했다. 일본으로부터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우리의 『대장경』을 보내주고, 『백편상서』『국어』를 구입했으며, 『경사유제』「일본지도」등을 기증 받았다. 세종의 서적 수집은 처음에는 모든 도서를 대상으로 수집하였으나, 나중엔 점차 필요한 도서를 구할 것을 지시하였고, 인력을 파견하여 도서를 사오도록 하는 등 적극적인 수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세종은 집현전 초기에는 서적을 한정하지 않고 일괄 구입하도록 지시했다. 또 책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포백이나 관작으로 이를 보상해 주기까지 했다. 이는 국립도서관 건립 및 장서 확보에 그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세종은 중국에서 기증받은 것 이외에 책판(冊版)이 있으면 종이와 먹을 준비해 가서 인쇄해 올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는 등 다각적인 수집 방법을 강구했다. 국외 서적 수입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성절사(聖節使)의 종사관에게 국내에 입수되지 않은 책을 자세히 조사해 오도록 했다는 것과, 책을 선정할 때에는 상고(詳考) - 즉, 레퍼런스(reference) - 가 해박한 후대의 편찬서를 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연구자가 아니면, 책을 고르는 방법도 잘 모르는 법이다. 세종은 바로 주석을 통해 관련 서적, 자료 및 지식을 추가적으로 더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서적들은 날마다 늘어나고 달마다 불어나서” 장서각은 사상 최대의 자료를 보유하는 국립도서관으로 발전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