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신생 조선의 CEO로 취임하면서 도덕성과 능률성 그리고 투명성을 통해 국가 경영상의 제도적 틀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구체적이고 명백한 것을 선호해 이를 자신의 경영 색깔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CEO가 되면서부터 세종은 정치ㆍ사회ㆍ문화ㆍ경제 및 산업전반에 걸쳐 확고한 ‘기반 다지기’에 들어갔다. 그는 이러한 제도의 마련이나 국가 경영상의 선례가 후세에 깊이 영향을 미칠 것을 깊이 고려했다. 세종은 무엇보다도 역사라는 거울에 비친 역대 CEO들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단지 스타 플레이어의 의식을 가지고 당대의 ‘낯 내기용’ 사업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자신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국가 인프라가 될 수 있는 주요 사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의 기초를 놓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해답을 얻어라]
세종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문제에 대해 대충 자기만족을 하고 넘어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산적해 있는 문제, 예컨대「훈민정음」창제의 문제, 생산성 증대의 문제, 과학 과 IT기술 도입과 개발의 문제, 4군 6진 등 국토 확장의 문제 등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문제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해답을 얻고자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그리하여 세종은 싱크 탱크인 집현전을 통해 국가건설 사업, 백성복지 증진사업, 국가 재정 진작 사업 등 굵직 굵직한 인프라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안목과 경영 능력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것으로 마무리돼, 그의 치적은 조선의 경영권 강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연속 프로젝트의 배경]
한편, 한번 시작된 국가 경영은 여러 면에서 연속적인 프로젝트들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데 지대하게 기여했다. 더구나 백성의 의식 속에 뿌리 내린 유교적 가부장제는 중앙집권의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이행되었고, 천명에 따라 하늘의 대리인으로써 국가 경영을 하는 오너 경영인으로써 세종과 백성들간의 관계를 내면화하는데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것이 세종으로 하여금 신생 조선을 수세기에 걸쳐 존립하도록 만든. - 그를 실질적 의미에서 조선 창업의 CEO가 되도록 만든. - 배경이 되었다.
[‘뿌리 깊은 나무’를 심고, ‘샘이 깊은 물’을 파라]
세종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매우 오래 유지되도록 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수성 CEO로 임명된 이유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세종은 그 자신 수성 CEO였지만, 전임 CEO들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무력(武力)으로 얻어진 국가경영권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가 CEO가 된 시기는 창업의 전 과정이 완전히 끝난 시점도 아니었다. 창업과 수성의 이행 단계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지는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수성의 시기로 넘어 간다면 국가 인프라 정도는 갖추어 졌어야 했다. 그러나 세종이 위임받은 조선은 아직 그처럼 안정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세종은 전임자들로부터 물려받을 게 별로 없었다. 따라서 국가 전반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필요한 시스템, 즉 법ㆍ제도ㆍ기준(standard)ㆍ조직 등은 거의 미비 된 상태였다. 따라서 세종은 자신이 그것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운영해 다음 세대의 CEO에게 넘겨주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직의 기틀을 튼튼하게 마련하고자 노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 다운 일을 해야 한다]
더구나 조선은 고려와 달리 복잡계의 경영이 필요했다. 사회가 그만큼 발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CEO에게 힘이 주어지는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한다면, 국가 인프라를 다지는 모든 계획들은 추진력을 잃을 게 분명했다. 중앙집권을 이룰 때에라야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다. 세종은 고려가 무기력하게 무너져 버린 이유가 바로 CEO에게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문제에 있어 고려는 세종에게 큰 점수를 받지 못했다. 실제 고려는 호족연합체의 국가경영체제여서 CEO의 힘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국가경영에 관해 엇비슷한 지분 관계 하에서는 결코 중앙집권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의 역대 CEO들은 이를 바로 잡고자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나, 그들은 500년이 지나 문을 닫을 때까지도 이를 결코 확고히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고려는 500년 동안 늘 경영권 도전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어떤 CEO가 고려를 이끌었었는가, 하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세종의 강한 국가 경영은 이처럼 중앙집권과 함께 CEO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신생 조선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책은 국가 인프라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파급력이 강했고, 그 속에서라야 뭔가 일다운 일을 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세 정의를 실천하라]
문무(文武)를 오갔고, 문제를 찾아내는 혜안과 그것을 풀어내는 실천적 기술력을 공히 갖추었던 세종은 현안 문제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들여 다 보았다. 그러자, 몇 개의 키워드가 잡혔다. 그것은 다음과 대체로 같은 것이었다.
민생ㆍ 생산ㆍ분배ㆍ기준ㆍ소통ㆍ제도 등.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