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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수성, 도약의 경영을 위하여

by 전경일 2024. 8. 10.

창업, 수성, 도약의 경영을 위하여

-'동양의 통치역사 - 중국과 조선 중심' -

 

역사는 당대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집적한 것이다.

 

당대에 쓰여졌든 후세 사람이 남겼든 기록은 남는다. 모든 유물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투쟁과 적응, 생존과 번영의 몸부림이 중첩돼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황하유역에서 목기나 철제 농기구로 땅을 파헤치던 때나 과학이 인류를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인도하는 지금이나 같다. 사람들은 언제나 벅찬 투쟁과 함께 살아왔다. 인간이 자연에서 삶을 일궈내는 한, 땅을 디디게 되어 있다.

 

은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기 오래 전부터 싸움을 통해 획득의 대상이 되어 왔다. 피가 흐르고, 강약의 구도가 만들어 졌다. 강자가 차지한 토지에서는 더 많은 잉여물이 나왔고, 그 결과문물이 번창했다. 종법(宗法)의 질서가 만들어 졌고,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가 선다"'천명관(天命觀)이 만들어 졌다. 사상 통일을 꾀한 것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다. 그 욕망으로 삶은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고, 밀고 당기면서 세상을 바꿔왔고, 세계의 주인이 달라졌다. 세력과 사상의 조류, 흥망과 성쇠가 맞물려 밀물과 썰물처럼 시차를 두고 번갈아 찾아왔다. 유구한 동양 세계도 마찬가지다.

 

근세 들어 서양의 약진은 지중해와 흑해를 기점으로 구분했던 동서(東西)를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서양이 우위를 보이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동양에서 개척한 육지 길이 있었음에도 명칭 상 동서양은 바다() 개념을 빌어다 썼다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 영역이 확장돼 반영된 말이겠다. 동양이란 명칭조차도 2차 대전 중에나 사용되기 시작해 전후 비교적 널리 퍼진 지리적 명칭일 뿐이다. 그리 오랜 연혁이 아니다.

 

'동양'이라 칭하는 이 대륙과 반도, 군도들을 아우른 땅은 나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서로 같은 면과 다른 면을 동시에 간직한다. 누구나 동양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체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완성된 하나의 역사 세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동양의 여러 국가들은 각기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이 동아시아의 과거이며 현재이다.

 

우리 역사를 살펴보는데, 중국을 보는 것은 오랜 시간 상호 부단한 교류를 해 왔기 때문이다. 무력과 화친의 교류가 번갈아 가며 두 국가 사이에 어우러졌다. 땅의 크기와 문물의 풍성함에 따른 중국식 사상, 문화 등은 주변국에 강한 힘을 떨쳐 왔다. 그 힘을 바탕으로 중국은 패권을 지향하기도, 힘이 부칠 때에는 밀리기도 해왔다. 물론 전적으로 한인(漢人)을 중국인만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뒤섞인 피와 세계관이 역사라는 시간속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계승한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은 중국 주변지역을 지배하에 두든가, 조공이라는 형식을 따르게 함으로써 복속국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형성된 것이 동아시아 세계이자 중화주의이다. 세계를 중화와 오랑캐로 보는 사고는 이때 구체화 된다.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같은 표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중화주의를 표방하는 지금도 유효한 사상적 근거를 이루고 있다.

 

중국은 끊임없이 도전 받아왔다.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될 때 마다 주변국의 독자성은 증대되어 왔고, 때로 이들 이민족은 왕조를 세우며 중원을 지배하고 경영해 왔다. 516국과 뒤의 요()()()으로 이어진 정복왕조가 바로 그것이다. 국가를 세우지는 못했어도 중국을 지속적으로 노려 온 이민족도 무수하다.

 

동양적 세계관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알았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급전직하 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중국은 보다 넓은 세계 가운데로 던져지면서 새로운 전환점에 접어든다. 중화와 오랑캐로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을 내세우며 주변 국가들을 비하하고 외국을 국가로조차 인정하지 않던 중국식 사고는 설 곳을 잃게 된다. (), ()시대를 거치며 주변국을 이적(夷狄)으로 보고, '비례(非禮, 예도 모르는)' 족속으로 폄하 해 온 중화주의는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2000년 이상 장구하게 시행되어 온 이 차등적 국제관계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다시 원점에서 재고되었다.

 

노쇠한 것 같은 중국의 생명력은 찔레나무에 포도순을 접붙이는 것과 같다. 자기 생명이 다 할 때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외부의 피를 수혈해 번영을 추구해 온 전략이다. 이런 접점은 동양 국가들에 많은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과 담론, 인간의 삶의 역정은 귀중한 유산이 되어 동양 각국에서 다방면에 참고하는 원천 컨텐츠가 되어 있다.

 

관료제가 생겨나고 군현제가 발전하고 행정과 정치 시스템이 생겨났다. 그 원형이 우리를 포함해 동양 각국에 지금도 별 이견 없이 쓰이고 있는 점은 새삼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황제(皇帝)가 생겨나고 군주권과 중앙집권화로 권력이 모였고, 관료들을 만들어 냈다. 관료를 지향한 지식인들은 세상을 경영할 담론과 실행 준칙을 생산해 내고 이를 퍼뜨린다.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명분과 실리가 날카롭게 칼을 겨눴다. 중국과 중국을 둘러싼 각 국(민족) 사이에는 분열이 있었고 이어 통일이 나타났다. 생각과 방식 면에서 퇴행과 혁신이 번갈아 찾아왔다.

 

힘이 한 곳에 모이자, 백성들은 고혈을 짜내야만 했고, 전쟁터에 나가서 기꺼이 죽어야만 했고, 식솔들은 죽은 자식을 안고 땅을 치며 울어야 했다. 가뭄으로 굶주림이 몰아쳤고, 이상 기후가 덮쳤으며, 착취와 억압이 있었고, 마침내 민란이 일어났다. 왕조의 붕괴는 너무나 간단한 공식에 의해 성쇠가 거듭됐다. 백성들이나, 이민족들은 죽지 않기 위해 일어섰고, 핍박과 수탈 때문에 싸웠다. 그것이 역사라는 이름에 쓰여진 인간들의 생존욕구였다.

 

이 장구한 기간 동안 한국사는 무엇을 예비해 두고 있었을까? 고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는 흥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5세기 이후 광개토태왕, 장수왕, 문자왕대에 이르러서는 동북아에서 독자적인 생존권을 마련한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한다. 바야흐로 동북아 국제정세에서 웅비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역량을 축적하자 더는 국제환경에 끌려 다는 것이 아니라 동토서략 남정북벌을 통해 유리한 국제환경을 만들어 낸다. 우리 민족의 대약진의 시기였다. 영토가 계속 늘어나고 제국이 되고 힘과 국제관계의 상관성을 십분 활용해 고구려는 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인이 된다. 넓어진 영토에 따라 이민족이 흘러 들어왔고, 다문화를 수용하고 이로 인해 글로벌화가 촉진된다. 팍스코리아나가 성립된 것이다. 이 중심에는 한국사의 영웅, 광개토태왕이 있다.

 

중원에서는 수()와 당()이 세워졌지만 현실을 외면한 정치로 피폐해졌다. 무리한 외정과 내치의 혼란은 북방민족의 공세를 부르는 나팔소리가 됐다. 야생의 힘이 천하에 들끓고 있었다. 어제의 강자가 약자가 되는 것을 보며, 이적들의 주변국은 떨쳐 일어났다.

 

11세기 이후로는 요(), (), ()으로 이어진 정복왕조가 중원을 지배하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일대회전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는 출중한 야생성으로 북방에서 일어났지만, 연운(燕雲) 16주에 머물러야만 했다. ()에 맞서 금을 일으킨 아골타는 뼈에 사무친 치욕을 갚아줄 날을 기다린 끝에 1115년 요를 공격, 마침내 요를 멸망시키고 금왕조(1122~1234)를 세운다. 그 전통은 훗날 후금(後金, )으로 이어진다.

 

만주의 일개 부족이었던 여진은 마침내 기다리던 때를 만났다. 서주(西周)시대로부터 수(), ()을 거쳐 송(), (), (), ()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해 온 역사를 일거에 털어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려는 기지개를 켠다. 때마침 조선에 불어 닥친 조일국제전쟁(임진왜란)은 명과 조선의 눈과 손을 만주에서 떼도록 한다. 고통스런 타국의 현실이 주변국의 기회로 작용하는 흥망성쇠의 불변의 법칙이 1600년대를 기점으로 다시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피나는 노력 끝에 366년 만에 자신의 몸집보다 20배나 큰 중국을 집어 삼킨다. 이후 강희(康熙), 옹정(擁正), 건륭(乾隆)의 치세가 이어지며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국력을 과시한다. 야생의 피를 지닌 오랑캐들이 중원에 들어가 일궈낸 가장 값진 성과였다.

 

한반도에서는 원()에 의한 수탈로 마침내 고려 조정 내부에 향명(向明)향원(向元)의 두 파가 생겨난다.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과격한 혁명을 추구한 이성계의 힘과 통찰이 조선 건국을 가져온다. 위화도(威化島)에서의 회군은 일대 전환점이 된다. 조선은 4대에 들어 마침내 세종이라는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국왕을 맞이하며 일대 르네상스를 일으킨다. 동 시기 지구 반대편인 이탈리아에서도 르네상스 전개된다. 바야흐로 전지구적, 문명사적 대풍평(大豊平)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동양이라 칭하는 동북아에서 지난 3000여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분단되었고, 중국은 희대의 개혁가 덩사오핑의 개방 정책에 힘입어 마침내 오랑캐를 끌어 다 중화의 피를 젊게 한 대()경제 성장이 지난 30여년 간 벌어진다. 중화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적(夷狄)은 이적(夷狄)의 욕망으로 중국에 들어와 중국을 다시 세계대국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이이제이(夷以制夷)와 기미(羈縻, 소에 코뚜레를 꿰는 것)의 형국은 현재 동북아 정치와 경제 등 모든 면에 걸쳐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남북은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 고삐를 풀고 울타리를 박차고 나갈 것인가?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는 대륙을 질주하는 야생성으로 대륙적 기질과 위상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한국경제 도약의 발판을 어떻게 마련하고, 웅비의 날개를 힘차게 달을 것인가. 동북아에 명멸한 역사의 뒤안길을 살펴 봄으로써 창업, 수성,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때이다. (),(),()의 경영은 21세기 무한 성장과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인문적 해법이다. 거친 숨결로 대륙을 내달리던 기상으로 세계를 응시해야 하지 않을까?

 

<포스코> 칼럼 사보글,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