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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인재 경영을 하라

by 전경일 2009. 2. 3.

민주주의가 싹트는 근대 이전 한 나라의 국가 경영권을 다른 세력이 잡는다는 것은 결코 무혈(無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요순시대에나 가능했을런지 모른다.

조선은 창업을 하며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다. 선죽교를 붉게 물들인 피는 가장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피는 권력을 잡고, 위엄을 세우는데 가장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신하의 범주 안에서 충성을 다짐하던 인물이 갑자기 국가 경영권을 탐내며 대권 도전에 뛰어들었다면, 그는 반드시 ‘적(敵)’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은 그렇게 창업된 나라였다.

이렇듯 역성혁명에 반대한 자들이 흘린 피는 세종이 CEO로 취임하던 조선 창업 27주년 되는 해에도 여전히 그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혁명은 연속 혁명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태종은 형제들의 피까지 보면서 CEO가 되었고, 또 CEO가 된 이후에도 자신과 아들의 처가(妻家)까지도 도륙을 냈다. 사실 태종은 경영자라기보다는 - 그 시대에 맞는 표현대로 - ‘전제적 통치자’였다.


[세종, 인재 고갈 현상에 직면하다]


고려 말에 양성되었던 쟁쟁한 인재들은 조선의 창업과 함께 역성혁명의 반대자로 지목되어 제거되고, 그러다보니 국가 행정은 그야말로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실질적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인재들은 백이숙제처럼 숨어 버렸고, 새로운 인재들이 나타나기에 27년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었다.

세종은 자신의 취임식에서 자신과 함께 국가 경영의 일선에 나서 줄 실력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얼마 전까지 전임 CEO들과 함께 조선을 경영했던 ‘창업 동지군(群)’은 이제 너무 늙어 버렸거나 이미 죽고 없어서, 세종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세종은 인재 고갈 현상에 철저하게 직면했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사람이 없다면, 그 자신 그토록 경영 수업을 해오며 비전을 펼쳐 보이고자 했던 준비들이 하나같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종은 어디서 인재를 구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변계량이었다. 그는 조선의 대학자이자, 인사(HR)분야의 최고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세종의 새로운 국가 경영에 기꺼이 동참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에게서 실로 가치 있는 인재 발굴의 아이디어를 얻어 실행에 옮기게 된다. ‘집현전’은 그래서 사서(史書)의 낡은 페이지 속에 잠자고 있다가, 운명적으로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인재를 끌어 모으다]


“덕은 외롭지 않아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변계량을 만나며 22세의 청년 CEO 세종은 순간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자기를 겸허히 하고 낮추었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국가 경영의 일선에서 뛰던 선배들의 고견을 경청했다. 그러자 그의 태도는 뭇 고려조나 조선조의 전임 CEO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신하들에게 비쳤다. 이같은 세종의 인품과 자세는 신하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세종 또한 그들의 마음을 얻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세종은 생각했다. 조선에 인재가 없는 것은 실제로 인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 변화의 시기에 중국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기량을 닦고 있는 인재들이나, 아니면 초야에 묻혀있는 인재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하지만 전임 CEO의 칼날에 묻어 있는 피는 아직도 그들이 다가오기에 멈칫거리게 만들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의 살육의 현장을 돌아본다면, 덕 있는 자 중에 어느 누가 선뜻 조정에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덕 있는 CEO에겐 반드시 인재가 모이게 마련이다. 세종은 창업자들과 달리 자신의 차별화 요인으로 제일 먼저, ‘인(仁)’과 ‘덕(德)’을 삼았다. 그리고 이같은 세종의 몸에 밴 자질과 철학은 그대로 국가 경영에 드러나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 준다.


[뉴 페이스(New face) 얼굴 좀 보자]


변계량은 용의주도하게 인재를 끌어 모았다. 그는 어디서 끌어 왔는지, 숨은 인재들을 대거 영입해 왔다. 거기에는 인재를 끌어 모으는 제도도 크게 한 몫을 했다. 그는 그야말로 한 눈에 천리마를 알아보았다는 백락(伯樂)과 같았다. 그리하여 변계량의 주도하에 세종은 새롭고 참신하며, 열의에 불타고 있는 새로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우선 그들 중에는 최항ㆍ신숙주ㆍ 이석형ㆍ하위지ㆍ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 등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의 후학으로, 서거정ㆍ김수온ㆍ강희맹ㆍ이승소ㆍ성임 등의 얼굴도 보였다. 이들 모두 집현전 멤버들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이들, 조선의 인재들과 함께 하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고 국가 경영에 나선다.


[CEO의 최대의 관심사는 ‘인재’]


사실 CEO의 최대 관심사는 인재이다. 인재 전쟁, 그것은 원(元)이 명(明)으로 바뀌면서 중국에서도 일고 있는 동아시아적 열풍이기도 했다. 세종은 ‘경영=인재 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가운데 변계량은 세종의 기대에 부응해 출중한 역량을 두루 갖춘 훌륭한 인재들을 대거 리쿠르트 해 왔던 것이다.

세종은 일일이 그들의 면접을 보며, 오히려 변계량이 못 본 그들의 잠재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매우 잠재력을 가진 ‘HPI(High Potential Individual)’로 충분히 육성할만한 가치가 있는 ‘핵심 인재’들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잘만 관리하고 육성한다면 국가 경영의 곳곳에서 부각을 나타낼 수 있는 멀티형 인재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세종이 추구하는 학문의 전 분야, 즉 역사ㆍ지리ㆍ도덕ㆍ예의ㆍ천문ㆍ의학ㆍ운학ㆍ종교ㆍ농사ㆍ음악ㆍ문학 등 모든 영역에서 위업 달성에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세종 자신, 보편적 르네상스형 인물이었으므로 그러한 인재를 갈구하고 있었다.


[세종, 조선의 비전을 프리젠테이션 하다]


세종은 그들에게 ‘집현전’이라는 핵심 조직과 미션, 그리고 오블리게이션 및 보상체계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직 운영에 대한 지침을 발표했다. 그것은 바로 변계량을 중심으로 발탁과 추천 업무를 수행케 하며, 집현전을 통해 젊고 총민한 인재를 뽑아서 국정 자문에 응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현전 멤버들은 그 후로 모두 변계량의 추천을 받게 된다. 세종시대, 신진 인재의 발탁은 전적으로 그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실로 HR분야의 대단한 귀재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뉴 페이스들은 과거라는 임용시험을 통해 더욱 속속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집현전을 비롯 각 정부 부처에 포진되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