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시대에 그처럼 많은 인재들이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세종의 탁월한 안목과 인재 중심의 인사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세종은 탁월한 인물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기량을 이끌어 낼 줄 알았다. 거기에다가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길 때처럼 줄래줄래 다른 분야의 인재들까지 딸려 나왔다. 그중 대표적인 인재가 바로 박연과 장영실이었다.
그 때에는 활발한 제안과 천거제도가 있어서, 이를 활용해 세종은 장영실과 같은 IT분야의 숨은 보석을 손에 움켜 쥘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박연과 같은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음재(音才)’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박연과 장영실이 자신과 “같은 시대에 함께 태어난 것”을 정말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이렇듯 인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임 CEO인 세종 앞으로 밀려 들어 왔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흠모의 정’이 있다]
더구나 그들은 앞서 스카웃된 인재들을 통해 세종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세종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 ‘충성’ 이상의 흠모의 정을 키우고 있었다. 이것은 창업자인 태조나 태종이 결코 누려보지 못한 - 물론, 그들 시대에도 인재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국가 지분’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로 말미암아 제거의 대상이 된다. - ‘인재 얻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전임 CEO 대에 수많은 인재들이 숨어 버린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세종은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인재를 불러들이는 것은 CEO의 능력]
결국 인재를 불러들이는 것은 CEO의 능력이다. 그래서 ‘덕치(德治)’는 중요하다. 세종 때에 공신(功臣)이 한 명도 없었다는 얘기는 국가 경영이 매우 안정되어 있었고, 또 개인적 영달을 꾀하기 위한 간교한 책략이 발붙일 수 없었다는 것과도 같다. 공신(功臣)이라 함은 국가에 특별히 환란이 있어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로를 인정해 줄 때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신은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조정 내 관리 계급의 음모와 술수가 먹혀들어갈 룸(room)이 전혀 없었다. 이는 공정성과 도덕성, 합리성에 근거한 CEO의 인사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았고, 그들을 힘껏 육성했으나, 결코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 따라서 조직 내 병목과 불화의 원인이 되는 - 인물은 중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만큼 사람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쓸 줄도 알았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꽃이 된다]
세종은 인재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제도적으로 인재 발굴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가능성 있는 인재들을 스카웃해 키우겠다는 목표를 뚜렷이 했다. 그리하여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와 균형감 있는 CEO의 눈에 드는 인재들은 하나같이 더 큰 인재로 클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것은 결코 ‘비벼서 서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핵심 인재 정책에 흔히 사용되는 용어처럼 누구도 ‘HPI(High Potential Individual)’로 선정될 만한 충분한 기준, 즉, 업무성과(performance)와 함께 리더십ㆍ창의력ㆍ실행력ㆍ도전정신 등이 있어야 했다. 세종은 ‘잘하지만’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을 조선의 핵심 인재로 키우는데 진력해 엄청난 국가적 투자를 실행했다.
[‘HPI’를 육성하라]
그런 까닭에 변계량이 ‘특별 관리 대상’으로 상신한 인재들은 핵심부서(key position)에 배치되었고, 여러 프로젝트를 옮겨 다니며 두루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사가독서의 수혜자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중국으로 파견(이와 관련되어서는 성삼문ㆍ신숙주ㆍ손수산 등이 「훈민정음」프로젝트와 관련되어 요동에 13차례나 파견된 바 있다.)이나, 유학( 장영실이 IT기술 관련되어 유학 갔다 온 케이스였다.)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세종의 부름을 받고 긴급한 국가적 프로젝트에 즉각적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그들은 해당분야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였으면서도, 동시에 국가 경영 전반에 있어 CEO를 보좌하기 위해 광범위한 지식과 경험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제너널리스트(generalist)이기도 했다. 세종은 그런 차원에서 멀티형으로 인재를 키웠던 것이다.
[용인(用人)이란, 칼끝을 잡는 것]
한편, CEO로서 세종은 용인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가 용인술의 대가라는 얘기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네 가지 원칙만 준수하면 되었다. 첫째, 그는 인재를 알아 볼 줄 알았다. 둘째, 그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셋째, 지속적으로 자기 개발을 하도록 이들을 후원하였다. 넷째, 철저하게 보상을 했다.
세종의 시대처럼 어느 시대나, 어느 누구나, 이 단순한 원칙을 지킨다면, 인재를 창출해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천하를 얻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용인(用人)’ 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어설픈 ‘용인(用人)’으로는 소(牛)도 못 잡는다. ‘용인(用人)’ 의 칼은 사방 어디를 줘도 손이 베이지 않는 칼끝이 아닌 곳이 없다. 그만큼 어렵고, 부리는 사람도 반드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을 잡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셈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