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나는 인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by 전경일 2009. 2. 3.
 

이 날, 당대 천재들의 토론은 진지했고,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세종은 그의 비상한 능력을 곧바로 알아보고, 또 한 사람의 인재를 얻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하여 CEO 세종은 장영실을 발탁 인사 조치하며, “그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가 있을 뿐 아니라, 성품이 특별히 영특하고 매양 강무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여”(『세종실록』15년 9월 16일)뽑는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천재성과 성실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정영실에 대한 인사조치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장영실을 대소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6품인 상의원의 별좌에 임명하게 된다. 이 직책은 왕실천문ㆍ지리ㆍ역법 연구기관인 서운관의 천문학 교수 및 고을의 현감과 같은 지위였다. 이러한 파격적인 인재 스카웃과 함께 세종은 그를 중국에 유학시켜, 최첨단의 이슬람 과학기술을 도입할 것을 지시한다. 일개 관노가 아무리 그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특별 발탁이 된 예는 극히 드문 경우였고, 이러한 발탁인사조치는 자칫 신분제도에 커다란 혼란을 줄까봐 신료들은 크게 반대하였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득권의 틈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종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에 힘입어 장영실은 15세기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이었던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초정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를 발명하고, 측우기, 해시계, 대소간의대 및 기타 기계건축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낸다. 그는 이 분야에서 제작 및 감독 역할을 맡아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국영 조직체의 연구소장이면서 동시에 프로젝트 매니저 그리고 실무개발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 낸 것이다.


또, 음악 분야를 예로 들자면, 박연은 음악에 관한 한 당대 제일의 음재(音才)였다. 한국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정도는 된다고 할까? 오히려 작곡 및 음악이론 정립, 그리고 악기 개발에 제작일까지 수행한 것을 보면 음악 분야에서도 그를 따라 잡을 자가 없어 보인다. 나중에 세조가 조선의 제 7대 CEO로 취임했을 때, 성임 - 그도 집현전 출신의 학자다. - 에게 “음율에 있어 박연을 당할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박연을 따를 자가 없다”고 했을 정도다. - 그런 음악의 귀재도 편경 제작시 음의 미세한 차이를 잡아내지 못해 세종에게 지적 받은 바 있다.


그 무렵 맹사성은 악학제조(樂學提調)을 맡았다. 이는 음악 이론 분야를 세웠다는 얘기다. 한편 정양은 박연과 함께 악기를 만들었으며, 남급도 악기 제작 기술자였다. 그 당시 이들이 시제품으로 개발해 낸 악기는 대략 200여 가지나 되었으니, 가히 거의 모든 악기의 종류를 고안해 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악기들도 있다.


세종은 특히 박연을 신임했다. 특히 아악의 제정과 제작 분야에 있어 더욱 그러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연을 비난했고, - 천재에게는 반드시 적(敵)이 나타나기 마련 아닌가! - 그 자신도 음악에 있어 친중국적 성향이 있어 세종과 갈등을 빚기도 했으나, 세종은 끝까지 그를 지켜주었다. 세종은 진정으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던 CEO였다. 그것이 세종이 인재를 가까이 두고 쓰고 있는 이유였고, 또 한편으로 그의 인사 방침이기도 했다. 세종의 이러한 ‘인재 모시기’와 인재 관리 프로그램은 실로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었다.『연려실기술』에 나와 있는 다음의 얘기는 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세종 2년 3월에 임금이 첨성대를 세우기로 명하고, 천문이 고명하고 산수(山水)에 극히 정통한 사람을 뽑아 천문을 맡기려 했는데, 전(前) 관상감정 윤사웅이 장흥에 퇴거해 있어,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이처럼 국가 최고경영자가 말까지 내리며 타고 올라오라고 하는데, 감동으로 휘달려 오지 않을 인재들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으로 얘기하자면, 기상대 관장 정도 되는 인사를 부르기 위해 정부 차를 보내 올라오게 배려한 것이었다. 또, 천문학자인 이무림ㆍ정영국 등을 등용하여 수령으로 임명할 때에도 하시라도 부를 수 있도록 서울 부근의 고을에 배정하는 등 세종은 뛰어난 인재를 항시 측근에 두고자 했다.


이는 비단 천문학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의 인재 중시 철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집현전이라는 이너써클(inner circle)의 설립과「훈민정음 TFT」등은 세종이 가장 가까이서 인재를 다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례일 뿐이다.


[적재(適材)와 적소(適所)라 함은 무엇이더냐?]


집현전은 신생 조선에 맞는 최적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행 조직이었다. 인재양성과 학문 진작 그리고 국가 경영 전략의 수립 등은 신생 조선으로써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었고, 국가 안정의 초석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장기적인 마스터플랜 하에 이를 수행할 특별기관의 설립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집현전은 정책연구의 체계성과 일관성, 그리고 연속성을 위해 그 구성원의 전직(轉職)이나 이직(移職)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만일 이직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의미했다.


[다른 데로 움직여 볼까?]


그렇다면, 집현전 출신 멤버들은 요즘 쓰는 표현대로 ‘다른 데로 움직여보려고’ 생각 했었을까?

그랬다. 집현전 소속 인재들은 CEO의 관심과 후원을 집중적으로 받는다고는 하나, 직책의 성격상 ‘권력’에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어 이른바 ‘출세’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 후에 전직 희망자들이 생기자 세종은 이들의 이직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 그리하여 세종은 집현전 요원들을 종신토록 다른 부서로 옮겨 갈 수 없도록 했으며, 심지어는 다른 조직에는 없는 ‘사가독서’라는 특별휴가를 주어 별도로 공부하게 하는 등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또한 집현전의 멤버들은 조회에서 같은 품계 중 서열이 가장 앞서는 반두(班頭), 즉 ‘반장’이 되게 했으며, 궐원(闕員)이 생기면 이조의 당상관과 의정부에서 그 후보자를 추천해 올리게 했다. 그리고 집현전 요원들은 특별히 궁중 안에서 근무하게 했으며, 아침과 저녁은 궁중의 내관이 특식으로 공급하게 했다. 세종의 집현전 멤버들에 대한 관심과 대우는 특별나서, 그들은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았으며, 서적도 우선적으로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출세나 이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직 희망자들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핵심 인재는 직무에 맞게 특별 관리한다]


세종이 이렇듯 집현전 요원들을 ‘특별 관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재 활용에 있어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원칙’ 때문이었다. 어렵게 학문적 깊이를 더한 인재들이 좀 더 출세길이 보장되고, 보수도 많이 받는 부서로만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인력들은 그 가능성(potential) 하나만으로도 앞날의 문화적 대 르네상스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는 인재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자기 전공 분야에서 취득한 전문가적 지식을 포기하고 일반 행정 업무로 전환한다면, 실제 그들을 육성해 온 이유조차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들을 제너널리스트(generialist)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동안 세종 자신이 그들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조직 내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직접 관리해 온 보람조차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전직이나 이직은 그들의 경력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순지(李純之)의 경우였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