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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온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by 전경일 2009. 2. 3.

 

신년연주회 티켓 구했어?

새로운 음악을 배경으로 1433년 설날 아침에 궁궐에 마련된 특별 연주회장에서는 신년연주회가 장중하게 열렸다. 연주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 이날의 성공적인 행사로 박연이 포상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 이것은 실로  음악 분야에서 한국 고유의 음악이 새로이 열리는 팡파레와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수많은 악사ㆍ악공을 지휘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박연이라는 희대의 음재(音才)와 음악적 역량에 있어 결코 박연에 못지 않은 -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박연보다 더 뛰어난 측면이 있는 - 세종이라는 총괄지휘자가 있었다. 세종의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은 1433년에 피크(peak)를 이뤄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민요를 수집하도록 지시한다.

 

세종이 주도한 이러한 신악 창제는 세종 12년부터 박연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추진된 것이다. 이것은 지금으로 보자면, 바로 ‘한국음악을 찾아서’라는 이름으로 추진된 음악 프로젝트였다. 이는 분명 당시 시행되던 중국풍의 음악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으로 자주적 우리 ‘음원(音源) 고르기’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박연 선생, 에헤! 그게 아니죠!

 

그런데, 다소 불미스러운 일은 당시 박연은 친중국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음악인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아침 조회시에 연주곡이나 연주절차 그리고 복장 등을 중국식으로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이에 대해 세종은 분명하게 중심 잡힌 자기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를 지적한다.

 

 

 

 

“박연이 조회 음악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 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12년 12월 계유)

 

이와 같이 세종은 음악 예술 분야에서도 분명한 자주적 입장을 견지 했다. 그는 그만큼 자신이 이끌어 가는 조선이 주체적인 문화 강국으로 자리매김 되도록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그의 이러한 성과는 후대 CEO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성종24년(1493년)에『악학궤범』이라는 한국 음악 최고의 마스터 피스(master piece)가 출현하게 된다. 이 책은 음악적으로 전범이 될만한 것들을 뽑아 묶은 대작으로, 그 서론에 그 책의 내용이 박연의 업적을 비롯해 주로 세종의 지시에 의해 행해진 연구 결과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실로 수 세기 동안 한국 궁중음악의 교과서였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계속해서 참조되고 있다.

 

 

 

 

세종은 조선의 모차르트?

 

개인적으로도 세종은 작곡 능력이 탁월해『용비어천가』중 봉래의(鳳來儀) 7곡, 전임 CEO들의 군사적 업적을 찬미하는 정대업(定大業) 15곡과 그들의 문화적 업적을 칭송하는 보태평(保太平) 11곡을 직접 작곡했다. 그 작곡 방법은 기존의 곡에 가사(歌詞)의 길이를 조절하여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루 저녁에 작곡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음률을 깊이 깨달아 새로운 음악의 절주(節奏)를 모두 제정하였고, 음감(音感)이 대단히 발달하여 전문가도 의식하지 못한 편경의 미세한 음 차이도 식별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박연이 새로 편경을 제작하여 세종 앞에서 시연을 하던 날, “편경의 이칙(夷則)음이 약간 높으니 몇 푼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하시어 박연이 가져다가 보니 경쇠공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씀과 같았다”는 일화(『세종실록』 31년 12월 정사)가 있을 정도였다. 음을 듣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같은 음이라도 몇 갈래로 나누어 들을 수 있는 매우 뛰어난 귀를 세종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짜르트가 음을 몇 갈래로 분리해 들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또한 국가 CEO로서 그는 수많은 악기 개발을 지원하고, 율관을 제작하였으며, 기보법을 창안하고, 관현악곡을 작곡하는 등 실로 대대적인 음악 문화 사업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세종이 한국 음악을 정립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가 ‘문화’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가 우리의 정신과 삶을 이어 나가는 매우 중요한 코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후세에 물려 줄 시스템의 일부로 풍부한 음악 유산을 그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전임 CEO들을 찬미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음악은 조금 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音)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천지가 화(和)하게 된다.”(『禮記』 樂記)

 

 

 

 

이 말은 세종시대 음악 정책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일 것 같다. 세종의 경영은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화음(和音)’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이 국가 경영을 진정한 조화로움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백성의 소리(民聲)’를 ‘화(和)’하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국가 경영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그 당시 시와 노래는 만들어 졌고, 그에 따라 악기가 제작되었으며, 세종은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노래를 읊조리고 소리쳐 그립고 사모하도록 하는 마음이 일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것은 실로 백성의 마음의 울리는 ‘심금의 경영’을 그가 해 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이 이런 경영을 해 나가는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뛰어난 인재였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