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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나에게 묻는다

그때 내가 건넌 강물은 아직 거기 있을까?

by 전경일 2009. 2. 6.
그때 내가 건넌 강물은 아직 거기 있을까?

어부바! 

길을 가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꾀병을 쓰는 딸아이를 업어주며 나는 황토 빛 장마 비로 출렁이는 고향의 강물 앞에 가 섰습니다. 장마 비에 논둑을 보러 가신 아버지 등에 업혀 강을 건널 때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비를 맞아 입술까지 새파래진 나는 우리 집 논밭만큼이나 넓디넓은 아버지 등에 파묻혀 강을 건너오면서 발 아래로 뱅뱅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을 내려 봅니다. 내겐 두려움 따윈 전혀 들지 않습니다. 가끔, 가파른 물 속, 발밑으로 굴러가는 돌에 채여 아버지는 비틀거리셨지만, 나는 손톱만치도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엎힌 그 분은 나의 아버지였으니까요. 아버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거든요. 강을 다 건넜을 때에는 오히려 아버지 등의 따뜻한 체온 때문에 좀 더 엎혀 있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힘든 건 내낸 상관 않고요.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런 호사가 없었습니다. 내 몸은 한 없이 풀어지며 아버지 체온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 녀석, 자냐?”

강을 다 건너신 아버지는 내가 잠자는 시늉을 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터벅터벅 강둑을 걸어 집까지 가셨습니다. 그 사이 나는 마음껏 아버지 등에서 번져오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따뜻함에 흠뻑 빠져들며 온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고요.

 

세월이 한참 흘러, 나는 딸을 업고 길을 가며 그때 내가 한 말을 다시 듣게 됩니다.

“아빠, 따뜻해.” 

그날 밤, 딸애를 엎고 걸어오는 아파트 길 모퉁이에는 엎질러진 달빛만큼이나 내 맘도 한없이 풍요로웠습니다. 그때에서야 내게 오래전 잊혀 졌던 아버지 체온이 전해 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의 체온은 몇 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덧 그때의 강물은 무심한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모두들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사람이란 다 때가 되면 늙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백발의 노인을 내려 보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만 합니다. 늙은 아버지는 이제 검불처럼 가볍습니다.

내가 그때의 강물을 그리워하는 건, 나를 품었던 그 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내게 또 다른 강물을 준비해 둡니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부터 흔들립니다. 너무나도 멀리 온 다음에야 내게 아버지 체온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른 채 딸아이는 내 등을 파고듭니다.

“아빠, 집이야?”

“그래, 그렇단다. 따뜻하냐?”

내 등을 아랫목으로만 아는 딸에게 나는 능청을 떨어 봅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