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바!
길을 가다가 다리가 아프다고 꾀병을 쓰는 딸아이를 업어주며 나는 황토 빛 장마 비로 출렁이는 고향의 강물 앞에 가 섰습니다. 장마 비에 논둑을 보러 가신 아버지 등에 업혀 강을 건널 때의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비를 맞아 입술까지 새파래진 나는 우리 집 논밭만큼이나 넓디넓은 아버지 등에 파묻혀 강을 건너오면서 발 아래로 뱅뱅 소용돌이치는 흙탕물을 내려 봅니다. 내겐 두려움 따윈 전혀 들지 않습니다. 가끔, 가파른 물 속, 발밑으로 굴러가는 돌에 채여 아버지는 비틀거리셨지만, 나는 손톱만치도 아버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엎힌 그 분은 나의 아버지였으니까요. 아버지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알았거든요. 강을 다 건넜을 때에는 오히려 아버지 등의 따뜻한 체온 때문에 좀 더 엎혀 있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힘든 건 내낸 상관 않고요.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런 호사가 없었습니다. 내 몸은 한 없이 풀어지며 아버지 체온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 녀석, 자냐?”
강을 다 건너신 아버지는 내가 잠자는 시늉을 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터벅터벅 강둑을 걸어 집까지 가셨습니다. 그 사이 나는 마음껏 아버지 등에서 번져오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따뜻함에 흠뻑 빠져들며 온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었고요.
세월이 한참 흘러, 나는 딸을 업고 길을 가며 그때 내가 한 말을 다시 듣게 됩니다.
“아빠, 따뜻해.”
그날 밤, 딸애를 엎고 걸어오는 아파트 길 모퉁이에는 엎질러진 달빛만큼이나 내 맘도 한없이 풍요로웠습니다. 그때에서야 내게 오래전 잊혀 졌던 아버지 체온이 전해 온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의 체온은 몇 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덧 그때의 강물은 무심한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모두들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사람이란 다 때가 되면 늙는 법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백발의 노인을 내려 보면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만 합니다. 늙은 아버지는 이제 검불처럼 가볍습니다.
내가 그때의 강물을 그리워하는 건, 나를 품었던 그 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내게 또 다른 강물을 준비해 둡니다. 하지만 나는 발걸음부터 흔들립니다. 너무나도 멀리 온 다음에야 내게 아버지 체온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런 내 마음을 모른 채 딸아이는 내 등을 파고듭니다.
“아빠, 집이야?”
“그래, 그렇단다. 따뜻하냐?”
내 등을 아랫목으로만 아는 딸에게 나는 능청을 떨어 봅니다.
ⓒ전경일, <나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