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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남자, 마흔 이후 | 마흔 살의 우정

[남자 마흔 이후] 떨어진 벼이삭 줍기

by 전경일 2009. 2. 6.

떨어진 벼이삭 줍기


얼마 전, 주말을 이용해 시골에 갔다 왔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농부가 밭가는 장면을 디카로 찍었다. 회사에 돌아 와 노트북 컴퓨터에 파일을 저장했다. 바탕 화면에 깔고 나자, 수시로 볼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가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게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인생의 씨를 뿌리는 봄철을 맞이하고 있는가? 추수하는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나는 지금 저 농부처럼 밭을 갈고 있는 것인가?’

밭 가는 장면에서 씨도 뿌리고 거두는 내 인생의 종착점을 생각해보며, 시간이 갈수록 더 먼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생은 짧다지만, 또 질길려면 쇠심줄같은 것 아닌가. 마흔 무렵,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시간은 촉박하기에 때론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러다간 쭉정이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 서둘러 간다면 몇 안되는 낙수(落穗)라도 더 주울 수 있지는 않은지, 허허로움이 밀려온다. 어느덧 그런 나이에 나는 접어든 것이다. 

밭가는 농부의 사진을 보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내 인생의 휴경지가 어딜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소중한 것인데도 둘러보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직, 내게 주어진 충분한 여분의 시간이 있을 때, 이를 찾아서 채워가야 하리라. 그럴 때, 비어 있는 인생퍼즐의 한쪽이라도 더 메울 수 있을 것이다. 마흔 넘어 줄행랑치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일거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내 나이대 사람들은 직장생활에서도 이골이 날 만큼 격전을 치룬 용사들이니 별의별 경험이 다 있을 것이다. 경험이란 것은 자기가 겪어 본 바를 의미하기에, 간혹 가슴 아픈 일도 있었을 것이다. 실직의 쓰라림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과 조직에 대한 배퇴감(背退感)도 있었을지 모른다. 가슴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누구든 붙잡고 나는 아직 열정 있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쌩쌩하다고. 두 팔의 알통을 걷어 부치며, 누구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백 퍼센트 맞는다 해도 지금까지 내게는 결코 작지 않은 허점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었는지, 중년을 가까이에 두고도 이러는지, 내 나이엔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점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도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보니 굳건한 신념이나, 확신은 말처럼 쉽지 않다. 중년 고개에서 방황할지 모르는 당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슴을 쭉 펴는 일, 그것이 그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삼십대보다 더욱 가슴을 넓게 펴고 자신을,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가슴 속이 그나마 후련해진다.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했나, 하는 자괴심이 들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처량해 보일지라도, 날개를 펴듯 가슴을 쭉쭉 펴자. 좀 더 근사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들에 대해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하자. 이제 우리는 인생을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 새가슴 따윈 집어 치워도 된다. 새가슴에서 날개가 돋아야 얼마나 큰 깃이 나겠는가? 큰 깃을 달면 하늘 높이 날테니까 설령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해도 더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의 밭가는 농부는 내게 그것은 말하려는 것은 아닌가?

  

ⓒ전경일, <남자, 마흔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