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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남자, 마흔 이후 | 마흔 살의 우정

[남자 마흔 살의 우정] 따뜻한 그때 그 술집

by 전경일 2009. 2. 6.

따뜻한 그때 그 술집


나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음악이 취미인데, 함께 술을 마시면 어느새 피아노가 놓여 있는 술집으로 나를 이끈다. 거기서 우리는 잔을 부딪쳐가며 애들 크는 얘기를 하고, 회사 얘기를 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처량함과 도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적당히 취하고 나면 친구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고, 나는 가끔 거기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6월의 넝쿨 장미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지는 못해도, 10월의 맨드라미처럼 우리는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맨드라미 같은 친구라서 나는 그가 좋다. 서로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고독이나, 아픔에 대해서도 동병상련으로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는 거 어떠냐?”

“다 그렇지, 뭐. 몰라서 물어?”

짧은 대화만으로도 친구와의 자리는 충분히 즐겁다. 자리를 마칠 때까지 미처 못 다한 이야기가 있어도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놔뒀다 나중에 보자기처럼 풀어 보아도 되지 않을까? 마음 편안한 관계란 이런 것이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산 사람들끼리는 대강 봐도 인생의 밑천이라는 걸 송두리째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구구절절 사연을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가 지그시 눈 감고 듣기만 해도 알 것은 다 안다. 그거면 됐다. 우리는 친구 아닌가.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댓글 달듯 맞장구를 쳐주지 않아도 무방하다. 적당히 알아서 술 마시고, 인생을 흥얼거리며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빡빡한 세상에 나나 저나 이 정도면 됐지. 인생을 알 만치 아는 나이가 아닌가. 이 정도면 정말로 됐다는 생각이다. 관계에 대해선 말이다. 우리가 나누는 우정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와 만날 때면 나는 가끔 경이로운 수수께끼를 눈앞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환경에서 살며 같은 고민으로 중년을 살아가는 사내들끼리 나누는 대화라는 건, 가끔은 침묵만으로도 큰 웅변이 된다. 정말이지, 놀랍지 않은가. 동질감이란 것 말이다.

이 친구를 만날 때면, 종종 살며 겪는 우울한 일에 대해 얘기를 들을 때에도 그저 입 꾹 다물고 들어 주기만 해도 된다 싶다. 귀를 여는 것만으로도 그의 울적한 기분을 풀어 줄 수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와 나는 정이 통하고 마음이 함께 한다. 어느 누구와 만나든, 최고의 만남이란 마음과 마음끼리의 만남이며, 그런 만남은 우리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한다고 믿게 된다. 그나 나나 이 정도는 나누는 사이 아닌가. 후덥지근한 회사 얘기를 마중 인사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건 그저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는 것에 불과하다. 술 한잔 마신 우리는 인생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한다. 그도, 지치긴 한 모양이다.
   “근데 말이지. 김광석이 노래는 인생을 좀 알고 부르는 것 같단 말이야. 왜 있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꿈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찾아 살고 있는지…… 뭐 이런 거 있잖아…….”

중년이 되면서 자기가 무얼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이 친구는, 가끔 인생이 신기루 같다고 한다. 신기루, 그래! 인생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그게 신기루든 아니든, 혹은 인생 자체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든 어쨌든 누구나 달리는 과정에서 하차라는 걸 하게 되어 있다. 나는 그가 부린 호기가 술에 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즐기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걸 안다. 조금은 흐트러지고 싶은 거겠지. 가끔 세상살이라는 건 어쩌면 뼈라고는 가져 본 적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기도 해야 하는 거다. 그게 슬기롭게 이 세상을 견디는 법이다.

“너무 가슴 아픈 척 하지 마라. 나는 네가 내일 아침이면 쌩쌩 날아다닐 거라는 걸 다 안다. 너나 나나 안 달리면 어쩔건데?”

오랜만에 만난 그와의 자리는 그렇게 마감된다. 택시가 와서 멈추고, 나는 친구를 보내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가끔 내 손을 잡고 위로해 주는 인생과 사회생활의 단짝이다. 그건 더없는 행운이다. 가족도 형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건만,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타인과 두텁게 맺은 인연인 셈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를 호출해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 때 좋은 술이 있으니까 좀 나와라. 한번 호탕해져 보자.”

술집이든, 식당이든, 길거리 모퉁이에서든, 우리는 언제나 함께 같이 있을 것이다. 다소 청승맞아 보일 수는 있어도 세상에 술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늙어 죽을 때까지 술잔을 겨눌 상대가 있다는 것은…… 안 그런가, 친구?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