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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위기관리 _레드 플래그(Red Flag)

운하, 휴브리스의 법칙

by 전경일 2009. 2. 11.

제11법칙: ‘같은 방법이 계속 통할 거라고 믿는’ 착각의 법칙

  -한번 성공한 방식이 매번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전처럼 또 성공할 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운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 통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를 신앙으로 삼아 집단 체면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 그 같은 착각의 전형적인 예가 있다.

 

약 4천 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을 서부 아시아와 이집트를 잇는 너비 169 킬로미터의 수에즈 지협을 가로 지르는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이른바, 역사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고대 운하인 셈이었다. 이들의 고상한 뜻과 달리 운하는 얼마 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아랍인들의 침공이 있은 뒤인 서기 775년에 다시 묻혀 버리고 만다. 그 후로 운하는 인류사에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듯 했다.


사라졌던 운하는 한참 지나서야 다시 등장했다. 고대에 팠던 운하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유적을 발견하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통상로를 개척하려는 대계획을 세운다. 이때 나폴레옹의 운하 건설공사에 뛰어든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였던 페르디난 드 레세프스(Ferdinand de Lesseps, 1805~1894)였다. 그에 의해 1859년 운하건설은 재개된다. 토목기사였던 그는 운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젊었을 때부터 운하건설에 대해 강한 집념을 품어왔었다. 그것은 그가 지닌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무엇을 향한 것이든 신념이란 대단히 놀라운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대중적인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을 때에는 말이다.


첫 삽이 떠진 후 근 10년 동안 레세프스는 다른 일에는 관심없이 오로지 7,460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흙을 파내는 대규모 토목공사에만 집중했다. 그의 신분은 공사 감독책임자였다. 레세프스는 먼저 건설기지를 세우기 위해 포트 사이드에 인공 항구를 만들고, 약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먹일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나일강에서 수에즈 지협까지 수로를 팠다.


북에서 남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나간 레세프스는 육지에 깊이 7미터의 수로를 파서 도중에 있는 호수들을 하나씩 연결해 나갔다. 그리하여 남부의 대(大)비터 호가 홍해와 연결되어 호수는 바닷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음료수를 공급하기 위해 3천 마리의 낙타가 동원되었고, 낙타는 등에 음료수를 가득 싣고 사막을 지나 맨잘라호까지 날랐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거룻배로 음료수를 운반했다.


징용된 지방 어민들은 얕은 호수위에 손으로 수로를 팠다. 인부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뗏목 위에서 잤다. 이 공사에는 대단위 규모의 인력이 투입되었는데,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약 8만여 명의 농민들이 고용되었다. 그들의 일급은 단 3 피아스터, 당시 미화로 3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인력만이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1863년 이래 노동자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인력을 대신해 준설기와 굴착기가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1869년 들어 운하는 완공을 보게 되었다. 운하가 완공된 뒤 프랑스 기선 루이즈에 마리호가 처음으로 이 운하를 통과해 외해로 나갔다. 이때가 1869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길이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수에즈 운하가 공식적으로 개통된 것은 1869년 11월 17일의 일이었다. 그 날짜 파리 신문들은 “위대한 사업, 두 바다를 결합하려는 위대한 희망은 이제 실현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수에즈 운하는 당시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한 관심사였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공통된 이해가 얽히고 섥힌 국제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개통식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왕가의 대표들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때마침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개통일 자정이 되기 바로 조금 전에 이집트의 프리기트함 한 척이 포트사이드 밖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좌초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로 인해 개통식 날 운하를 통과하기로 되어 있는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선박들이 운하 앞에서 더 이상 항진을 할 수 없게 될지 몰랐다. 이 시점에 각국의 선박들은 사고현장에서 불과 5분 거리 밖에 안되는 곳에 이미 당도해 있었다. 파리에서는 개통식이 연기될 거라는 뉴스가 급전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이 배들은 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다. 개통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이 기념비적인 운하는 교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날 불린 오페라가 바로 ‘아이다’였다.
 

 

 

(왼쪽: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막의 대지에 마치 조각도로 홈을 판 것 같이 운하의 수로가 보인다. 오른쪽은 공사 당시의 전경. 수에즈 운하의 길이는 165킬로미터, 그 가운데 34킬로미터는 호수를 지나고 있다. 꼭대기의 폭은 150미터,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져 밑바닥은 폭이 60미터이다. 총공사비는 1억 5백만 달러가 든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원래 예산의 두 배가 넘는 액수지만 세계 무역에 대한 운하의 가치에 견주어 본다면 미미한 돈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를 개발한 프랑스 외교관 레세프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원래 프랑스 귀족출신이었다. 외교관으로 리스본 영사, 마드리드 공사 등을 지낸 경력이 있다. 그는 그 후 튀니스 총영사로 있을 때, 나폴레옹 3세가 제창한 권위국가를 세우려는 리더십에 크게 감명을 받는다. 프랑스의 실리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권위를 크게 떨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그는 운하의 잠재성에 주목해 운하 건설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이는 자국의 이익과 권위를 내세우는 외교관 업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외교관으로 닦아 놓은 인맥을 바탕으로 레세프스는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마호메트 알리왕조의 4대 군주인 사이드 파샤(Said Pasha)에 접근한다. 그가 수에즈 운하의 개굴권을 얻어낸 것은 1854년의 일이었다. 그가 개굴권을 따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열강들이 서로 다투어왔던 수에즈 운하 개굴권을 일개 총영사급 외교관이 얻어냈다는 것에 경쟁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세프스의 성공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그의 성실성과 인품, 그리고 사이드 파샤국왕과의 우정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레세프스가 파샤 왕로부터 얻어낸 특허는 레세프스의 주재 하에 <만국(萬國) 수에즈 해양운하회사>라는 국제회사를 설립할 수 있는 권리였다. 이 회사를 통해 운하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으므로, 개굴권은 따논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단서조항이 있었다. 특허의 내용은 운하가 개통되는 날부터 99년 동안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었고, 그 무렵 터키가 이집트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사업을 개시하기 전에 터키 정부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이드 파샤 왕이 각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수에즈 운하개굴권이 레세프스에게 부여되었다는 뉴스를 발표하자 유럽 각국은 자국의 이해에 따라 입장이 갈렸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환영했으나, 영국은 반대했다. 동방무역에서 경쟁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레세프스가 넘어야 될 첫 번째 장벽은 영국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터키 왕으로부터 비준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터키 왕에 대해 절대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영국대사였기 때문에 영국의 찬성을 얻어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다급해진 레세프스는 다음해인 1855년 6월 영국으로 달려간다. 그는 런던에 도착해 파머스톤 수상을 만났다.


당시 71세의 고령이었던 파머스톤은 두 가지 반대 이유를 밝혔다. 첫째, 수에즈 운하를 만국민에게 개방하게 되면 영국이 누리고 있는 동방무역의 기득권이 상실된다. 영국으로선 반대할 분명한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미끼로 이집트에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레세프스는 영국의 강경 반응에 직면해 다른 전략을 모색했다. 영국정부는 반대하더라도, 무역업계는 찬성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아 민간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는 전략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에즈 운하 건설이 망상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계획임을 입증해 내는 것이었다.


그는 반대의견을 물리치는 한편, 운하회사의 설립을 서두른다. 1856년 1월에는 수에즈운하회사의 정관을 작성하여 파샤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에 회사의 중앙사무소를 설치하고, 자본금은 액면가 500프랑의 주식 40만주를 발행하여 2억 프랑을 조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회사의 투자가이든 주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국적을 불문하고 자본 참여를 가능하게 해 놓은 것이었다.

레세프스는 이러한 정관을 해설하는 팜플렛을 작성해 영국의 산업 중심지와 무역중심지를 순회하면서 수에즈운하가 실현가능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IR 로드 쇼를 다닌 셈이다. 드디어 영국정계의 원로인 글래스톤이 찬성하고 나섰다. 그는 파머스톤 정부의 반대론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이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영국의 반대를 뒤집어 놓은 다음 레세프스는 주식모집을 개시했다. 주식은 열광적으로 팔려 프랑스에서 절반이 소진됐고, 영국에서도 많이 팔려 나갔다. 초기 창업 자본을 조달한 레세프스는 마침내 1859년 봄 수에즈운하의 개굴공사에 착수한다. 일은 순조로워 1866년 3월에는 터키 왕이 수에즈운하 회사를 비준하였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첫째로 그동안 터키 왕이 비준하지 않는 것은 영국이 비준하지 않겠금 압력을 넣어왔기 때문인데, 비준을 통해 영국의 수에즈운하 반대의견이 대폭 완화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둘째로는, 터키 왕이 결과적으로 비준하고 말았으니 영국으로서는 방해공작을 펼 수단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했다. 수에즈 운하의 개굴공사는 이처럼 순풍에 돛 단듯 순조롭게 진전돼 나가 10년이 지난 1869년 11월 17일 마침내 개통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레세프스에게 인도 성훈위대십자장(印度 星勳位大十字章)이라는 훈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런던 명예시민으로 임명했다. 이처럼 수에즈 운하 건설을 줄기차게 반대해 오던 영국의 태도가 극렬 반대에서 극렬 찬성으로 돌변한 것은 정치적 계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수에즈운하회사의 영업실적은 부진하기만 했다. 초년도에 운하를 통과한 선박수는 채 500척에도 이르지 못했고, 수입금은 4,345,758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벌써 파탄의 우려가 유럽 전역에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반대하다 급선회한 영국은 이때 재빨리 수에즈운하회사를 매수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수에즈운하의 지배권을 영국이라는 한 나라가 소유하면 만국공동 소유물이 되게 하자는 정관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어서 레세프스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레세프스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집트 왕실의 재정난이 그의 목을 옭죈 것이다. 레세프스와 이상을 같이 했던 파샤 왕은 이미 1863년에 사망했고, 5대 왕으로 등장한 이스마일 파샤는 정사보다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이미 크리미아 전쟁 때문에 멍들기 시작했던 이집트왕실의 재정은 파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재정 파탄을 면하기 위해 왕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보유의 수에즈 운하회사 주식 17만 6,602주를 내다 파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노려온 영국정부는 레세프스도 모르는 사이에 이집트 왕실의 소유주식을 1억 프랑(400만 파운드)에 인수해 버린다. 이때가 1875년 11월 17일이었다. 이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지 만 5년 후의 일이다.


그런데 영국정부는 어떻게 해서 이집트 왕실 소유의 주식을 모조리 사버릴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국제적인 수완을 발휘한 사람이 바로 영국 수상이었던 디즈렐리였다. 디즈렐리가 이때 이집트 왕실의 주식을 매수한 것은 훗날 정치사극의 주제로 자주 떠오르는 유명한 사건이 된다.


주식 인수에는 두 가지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첫째는 디즈렐리가 이집트 왕실의 구석구석에 정보원을 배치해 왕실의 살림살이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정보전에 탁월했다. 두번째는 디즈렐리가 정치자금의 조달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이 자금을 순식간에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제국주의 분위기에서 이 시기 영국은 이집트를 침공해 엄청난 사업을 이집트 정부의 이름으로 벌리고 그 재원을 영국의 차관으로 조달하도록 하여 이집트 정부의 재정적자를 부풀린 다음 그 댓가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초기 5년간의 운하 운용의 적자는 영국의 교묘한 방해책이 작용한 것일 수 있다. 홍해와 외해를 잇는 이권에 처음 발의하지 못해 반대하며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운하의 가치를 누구보다 눈여겨 본 영국으로선 이를 소유하고자 호시탐탐 노려왔던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은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한편 단기간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들 수 있는데, 400만 파운드 거금을 확보하기 위해 디즈렐리는 비서관을 로스차일드 회사로 보냈다. 비서관이 도착했을 때 로스차일드 2세는 포도를 먹으면서 씨앗을 접시에 뱉고 있었다. 비서관이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살 자금 400만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말했더니 포도를 먹는 일을 멈춘 이 영국재계의 거물은 담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비서관은 디즈렐리가 지시한 대로 ‘영국정부’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 2세는 ‘You shall have it'이라고 말한다. 군말 없이 400만 파운드를 빌려드리겠다는 뜻이었다. 능숙한 정치가인 디즈렐리는 이 건을 가지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달려가서 자랑스럽게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메모지에‘You have it, 미터ada미터'이라고 적어서 비서관으로 하여금 여왕에게 전달했다. 여왕전하가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차지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고, 내부 경제를 마비시키고, 정관 유착으로 자금을 동원하고, 유럽 어느 나라도 모르게 거래를 성사시킨 영국은 그 후 그 좁은 영토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우위의 호조건을 이용해 약탈한 전 세계 자원을 통해 자본 증식을 꾀하며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해 나간다.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 획득이 오늘날 중동의 석유조차 주물럭거리는 영국의 재력이 된 셈이다.    


이집트 왕실의 소유주식을 인수함으로써 영국은 수에즈운하회사의 총주식의 5분의 3을 소유하게 되어 드디어 그 운영권을 손 안에 넣게 되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수에즈 운하를 성공적으로 열고, 회사까지 만들고 했지만, 그들은 지분의 중요성에 대한 몰이해로 결국엔 뒤처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설령 지분의 중요성을 깨달았더라도 400만 파운드를 조달할 능력도 없었다. 사실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의 경영권을 빼앗기게 된 데에는 지분 문제가 아닌, 영국이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882년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이집트인의 폭동이 발발해 수에즈운하회사에서 일하는 50명이 넘는 유럽인들이 살해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수에즈운하 회사의 운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말았다.


자신이 만든 회사가 영국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레세프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다음부터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의 개굴사업에 뛰어 든다. 수에즈 운하에서의 성공을 복제해내려고 한 것이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에는 10년 동안 3억 5천2백만 달러의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5천6백9명의 인명이 희생됐다.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을 당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뱃길은 2만8백킬로미터에서 8천3백킬로미터로 3배 이상 단축됐고, 이는 상품 유통에 혁신을 불러왔다. 그러나 오늘날 트럭과 비행기의 발달로 운하의 역할은 크게 줄어 줄었다. 더구나 현재 5만척의 세계 화물선 가운데 약 7%는 정도는 운하를 통과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스페인의 탐험가 누네즈 데 발보아가 중앙 아메리카의 좁은 허리에 운하를 파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낸 것은 151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가 실행에 옮겨지는 데에는 4백년이나 걸렸다. 케이프 혼을 경유하지 않고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운하통행료의 약 10배가 절약될 수 있다는 파나마운하회사의 공식보고서 내용은 운하개통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1870년 레세프스는 수에즈 운하의 성공경험을 살려 전혀 다른 지역에 진출한다. 1878년부터 레세프스는 콜럼비아 정부로부터 파나마지협에서의 운하건설권을 따내 운하건설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레세프스의 의도는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만다. 그가 설립했던 파나마운하회사는 계획의 미비, 공사곤란, 자금결핍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만다.

특히 당시 수에즈의 운하의 사업성이 회의적이었던 때라 레세프스는 자금을 끌어 모으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중남미 지역은 중앙이 높아 수에즈 운하처럼 수평식 운하를 만들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풍토병인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극성을 부렸다. 인부들은 대책 없이 쓰러져 갔다. 레세프스의 파나마 운하회사는 채 10년도 못가서 파산하고, 그 운영권은 1902년 미국으로 넘어갔다. 이는 레세프스가 세상을 떠난지 5년 후의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업 환경에 악전고투하다가 실패를 맛본 것이다.


그러나 레세프스가 시도한 이 대륙횡단의 파나마 운하의 가치는 1898년에 이르러서 새롭게 인식되기에 이른다. 미국-스페인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전함 오리건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쿠바로 보내는 데 근 2만 8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항해를 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운하건설 건설지역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지역선정의 임무를 맡은 워커(Walker)위원회는 니카라구아를 적격지로 보고했다.

파나마로 결정할 경우 콜럼비아 정부로부터 이미 파나마에 건설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 운하회사와 협상해야 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더구나 운하자산 및 이권양도 댓가로 프랑스 운하회사는 1억 9백만불을 요구했다. 워커 위원회가 니카라구아를 선정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운하회사가 운하건설에서 손 뗄거라는 것을 감지하고 가격조건을 낮추기 위해 미국이 속임수를 쓴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파나마야말로 운하를 놓기에 최단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운하회사의 구성원인 바리야는 파나마지협에서 운하건설공사에 투자된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미국의 관심을 끌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미국이 시도하고 있는 보다 정치적인 해법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1903년 1월 미국은 넓이 10마일 지역을 99년간 미국에 임대해 줄 것과 이의 댓가로 콜럼비아 정부에 1천만불을 지불하고 매년 25만불 추가지불하는 조건에 서명한다. 하지만 콜럼비아 의회가 비준을 거부하자, 미국은 애당초 생각해 온 계획을 밀어 붙이게 된다.

1903년 11월 3일 파나마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도록 지원하고, 이를 계기로 파나마지역 주민들의 독립을 부채질한 것이다. 수에즈 운하를 장악하려 했던 영국의 교묘한 술책과 거의 동일하게 미국은 당시 내쉬빌(Nashivill)호를 통해 파나마주민 독립을 저지하려는 콜럼비아 군대의 상륙을 저지했다. 파나마 반군을 지원하고, 독립국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 댓가로 운하를 획득하고자 한 것이다.


11월 3일 오후 파나마 공화국 독립이 선언되고, 며칠 후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을 승인한다. 이제 운하건설계획을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미국 대표와 파나마 측 대표로서 바리야가에 1903년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미국은 1903년, 파나마의 새 공화국 정부로부터 폭 16킬로미터의 운하지대를 영구적으로 관리하는 권리를 얻는다. 먼저 1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다시 1913년부터, 해마다 25만 달러를 지불한다는 것과 파나마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약속의 댓가였다.


그러나 프랑스 운하회사가 겪었던 것처럼 운하건설의 최대의 적은 질병이었다. 1904년, 아바나에서 황열병 치료에 성공한 바 있는 월리암 C. 고거스 대령이 위생상태 개선의 책임을 맡았다. 첫 2년 동안은 병균을 퍼뜨리는 모기가 번식하는 광대한 지역의 풀숲과 잡초를 베어 없애는 것이 운하건설단이 해야 할 일이었다. 미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이미 파낸 6천만 입방미터 이외에 다시 1억 4천 2백만 입장미터의 흙을 파냈다.

공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4만3천명이 넘는 일꾼들이 일하고 있었으며, 주요공사는 1914년에 완공되었다. 이 해 8월 15일, 하객선 안콘호가 처음으로 이 운하를 완전히 통과하여 대서양에서 빠져 나갔다. 그러나 산사태가 일어나는 등 한동안 운하는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 7월 12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정식으로 이 파나마 운하를 개통했다.


파나마 운하는 진입로 부분까지 합하여 전장 81.15킬로미터에 해당된다. 태평양과 대서양쪽이 모두 3단계로 되어 있으며, 길이 300미터, 폭 33미터의 갑문이 설치되어 있다. 파나마 지협은 동서로 달리고 있고, 운하는 이것을 비스듬하게 가로 지르고 있기 때문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나가는 배는 카리브해 쪽 입구보다 약 32킬로미터 동쪽으로 나가게 된다. 해마다 약 1만 4천척의 외양선이 이 운하를 통과하고 있으며, 한척이 약 4천 달러에서 5천달러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한다. 배 한 척이 통과하는 데에는 보통 15시간이 걸린다. 전문가들은 파나마 운하가 1년에 통과시킬 수 있는 배의 수는 2만 5천 5백 50척인데, 21세기 초에는 이 한계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총연장 80킬로미터의 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을 1906년 11월 방문한다. 그는 자신의 흰 양복이 더러워지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가 증기 굴착기 운전석에 올라가 수석 엔지니어에게 작동법을 묻는 장면의 사진은 루스벨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꼽힌다. “내가 파나마 지협을 장악했다.”콜럼비아로부터 강제로 분리 독립시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내고, 운하 건설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프랑스를 지칠대로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통해 미국은 마침내 파나마 운하를 손에 넣은 것이다. 루스벨트의 이 같은 환희는 가히 정복자다운 태도였다. 결국 이번의 운하도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는 식이 돼버렸던 것이다. 나아가 각기 두 개의 운하를 장악한 나라가 세계 패권이 주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파나마 운하에서는 수에즈 운하에서 성공한 건설 영웅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파나마 운하 에서 레세프스가 실패한 이유는 여러 치명적인 원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과거에 한번 성공한 사람이 자기 능력과 방법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을 때의 주의점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자기 우상화나 지나친 확신은 금물이다. 수에즈와 파나마 지역은 지형과 기후도 다르고, 풍토병도 있다. 더구나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과학과 기술도 변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세프스는 수에즈 운하 건설에서 사용한 방법을 고집하다가 파나마에서 실패했다.


이런 일은 기업에서 왕왕 일어날 수 있다. 과거에 한번 성공한 방법이 혁신 없이 미래에도 계속 차용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하다.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는 혁신, 외부 환경에 대한 예리한 주시가 없으면, 성공의 재창조는 불가능하게 된다.


창조적 소수가 그 성공으로 인해 교만해 지고, 추종자들에게 복종만을 요구하며,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지적, 도덕적 균형을 상실하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판단력가지 잃게 되는 현상을 토인비는 휴브리스(hubris)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60~70년대까지 크게 성공을 거둔 국내 기업 중 1990년대에는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기업이 부지기수이다. 대표적인 예로 동명목제는 지금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지금 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기업 중에 10년 후에 남아 있을 기업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우리 사회는 ‘한반도 대운하’로 여전히 혼동스럽다. 이 같은 주장을 펼친 측은 1996년 7월 제15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경부운하의 건설을 역설하며 운하가 건설되면 물류비용이 3분의 1로 줄어들 수 있다는 주장을 펴왔었다. 그 후 그는 서울시장이 되었고, 자신이 구상한 정책 하나를 실현해 낼 수 있었다. 70년대에 복개해 버린 청계천을 복구해 낸 것이다. 청계천 복원은 그를 일약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다. 청계천에서의 성공은 그에게 또 다른 자신감을 불어 넣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다음 차례로 한반도대운하 계획을 관철시키고자 했(한)다. 대선당시엔 통일을 대비한 북한운하 구상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공사비, 사업성, 환경 문제, 타당성 등은 여전히 논란중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물동량만을 놓고 보더라도 500만톤 정도에 머물러 사업성이 없을 것으로 보기도 했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도 완벽한 의견일치를 보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2010년 경부고속철도 완공이 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48시간이나 걸리는 수송시간이 장점이 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 있다는 주장도 팽배하다.

후에 대통령이 된 이명박 후보는 한 번의 성공을 두 세번 더 확대재생산하고자 했으나, 이미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러기에는 너무나 큰 정치적 모험을 감당해 내야 했다. 휴브리스에 빠진 것이다. 리더에게는 이미 엎질러 진 물이라도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갈 때에는 번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조언을 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경영에서 착시는 치명적 판단 착오를 가져온다. 

 

 

<스웨즈 운하>


스웨즈 운하는 중동전쟁의 가장 뜨거운 감자였다. 전쟁으로 폐쇄되었던 운하는 1975년 6월 5일 7년 만에 재개통된다. 이는 중동 전쟁이 원인이었다. 운하 사용으로 인한 경비절감은 상당히 크다.

예컨대, 로델담으로부터 케이프타운을 경유하여 인도로 수출되는 소맥 및 소맥분의 가격은 톤당 15.4불이며 운하를 이용할 경우에는 톤당 9.22불이 소요되어 6.18불의 가격을 절감할 수 있다.

1976년 당시 유조선은 톤당 2불의 통행료를 지불하고, 기타화물은 1.6불을 지불하고 있다. 1967년과 1975년 초기 사이에 영국과 홍해항국간의 선임(船賃)은 40~50퍼센트가 증가되었다. 페르시아만으로부터의 선임은 25퍼센트, 남부아시아로부터의 선임은 17.5퍼센트, 호주로부터의 선임은 5퍼센트가 각각 증가되었다.

UN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67년 스웨즈 운하의 폐쇄로 발생한 수송비의 추가부담은 1967년 6월~1975년 초기 사이에 87억불에 달하는 무역상의 손실을 초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무렵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시(市)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은 계란 12개에 1.8불을 지불했으나, 스웨즈 운하를 통해 레바논이라 불가리아에서 도입되는 계란은 12개에 1불 이하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파나마운하>


현재의 파나마 운하는 미국에 의해 1904년에 착공되어 4만 여명의 사망자를 낸 난공사 끝에 10년 만에 완공되었다. 당시 규모로는 최대 6만 5천톤의 배 밖에 지나가지 못했다. 더구나 80킬로미터의 운하를 지나는데 무려 9시간 30분이나 걸려 시대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대책으로 제2의 운하 안이 이미 1950년대에 재개되었다. 1982년에 이 운하는 총 3억2천5백만불의 통행료를 거둬들였다. 통행량이 하루에 약 42척으로 늘어났으나, 이 수준은 1982년에 달성된 것이며 84년에는 경기침체로 하루 평균 32척으로 줄어들었다.

경제성 면에서 운하 운용의 위협요소도 있다. 알래스카의 노스 슬로프(North Slope) 산 원유를 지협을 통과해서 운반하는 파이프라인을 사용한 첫 해인 1983년에 운하는 5천만불의 통행료에 상당하는 1,500회의 유조선 통과를 빼앗겼다. 파나마 운하 개통 전에는 발보아 항구에서 대서양 포르트 베요까지의 산악 정글지대를 통나무를 배 밑바닥에 깔아 끌어서 배를 운반했다고 한다.

 

     

 

 

<두 운하의 교훈>

오늘날의 경영자들은 분명한 하나의 사실, 즉 처음의 성공이 다음번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시대와 환경, 그리고 기술여건 등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고와 전략을 구사한 나머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퇴장하는 기업들이 부지기수이다. 기업사는 흥망의 역사로 가득한 것이다. 과거에 성공을 가져다 준 경영방식은 그 시대의 조건에 부합한 결과였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바뀌었어도 예전 방식을 그대로 고집한다면, 그 기업과 경영자는 휴브리스의 우를 범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ㆍ경제의 가장 큰 딜레마는 과거에 성장 원천이었던 핵심경쟁력이 환경이 바뀌며 핵심 경직성(core rigidity)로 전환되는 극적인 현실에 직면해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미래를 담보하는 성장 엔진을 얻기도 어렵거니와, 이전의 틀을 뛰어 넘는 발상조차 할 수 없다. 현실의 모순에 대한 각성은 과거에 일어난 창조적 활동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도록 하며, 이는 미래를 열어 나가는 활로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국가나 기업의 경영이 원천적 소스(source)보다는 어플리케이션(응용분야)에 급급했던 우리 현대 국가ㆍ기업의 경영사는 창조의 본질을 보다 적극적으로 희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는 과거의 성공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때 유지될 수 있다. 과거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이었던 어플리케이션은 이제 원천적인 가치가 요구되는 시점에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는 가장 성공적이었던 경험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 나가야 한다. 21세기 경영은 그렇기 때문에 복잡계의 사고가 절실히 요구된다. 단순한 모방, 반복적인 복제의 덫에 갇혀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창조적 경영을 이뤄낼 수 없다. 현재 처한 경영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문제에 대한 해법 및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은 기업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레세프스가 실패 이유는 과거에 한번 성공한 방법이 혁신 없이 미래에도 계속 차용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한 환경부적응의 결과이다. 우리의 조직은 끊임없는 혁신, 외부 환경에 대한 명확한 인지가 요구된다. 새로운 시각이 없다면, 성공의 재창조는 불가능하다.

 

 

 

래드 플래그 제11법칙: 휴브리스의 법칙


-한번 성공한 방식이 다음번에도 성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영상의 치명적인 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직들, 개인들은 이 같은 오류를 범한다.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에 빠져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거나, 욕망에 눈이 어두워 현실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다.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이전의 방식으로 경영하려 하거나, 개인사에 있어 과거의 영예에 집착하려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오판은 궁극적으로 기업경영에서 쓰디쓴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 이는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징후 예측과 위험 발생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들 >


-예전의 방식을 선호하는 조직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가? 우리 회사는 관습, 관례만을 중시하지는 않는가? 만일 회사 분위기가 이렇다면, 지금 당장 혁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꼼짝없이 앉아 있다간 좌초하고 말 경쟁의 한가운데 우리 기업은 놓여 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결국 우리가 죽게 되는 것은 움직이기 않기 때문이다.


-조직 내 변화의 무풍지대가 있는가? 말로만 변화를 외치며 실질적인 행동으로는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만일 이런 조직이라면 위기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자기 계발이라든가, 지속학습의 노력이 없다면, 그런 직원은 도태하기 십상이다.


-조직 내 차원을 달리하는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변혁이란 무엇인가? 예전의 방식을 뒤엎는 환골탈퇴, 혁명적 변화가 없다면 단순한 개선밖에는 얻을 게 없을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전략과 경쟁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상태조차 지키기 어렵다. 조직혁신이란 현재의 상황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조직은 위기의 나락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기업이나 개인은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는가? 비판은 건전하게 받아들여지며, 현재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자유스럽게 토론할 수 있는가? 과거에 지닌 자신의 경쟁우위를 지금도 믿고 있는가? 변화하며 생존하는 조직과 개인은 이런 질문에 대해 뚜렷한 답을 내 놓아야 한다.

 

 

 <참고자료>

「파나마 운하」,  『라이프 가족』, 1990.10. 통권 43호, 36~37쪽.

 고승제, 「페르디난 드 레세프스」, 『유공』, 1984.7. 통권 137.

『NewsWeek』, 1999.12.22.

『Chief Executive』, Feb. 2007, Vol. 51.

 이상영, 「불야성을 이루던 파나마 운하」, 『선경』, 1987.2.

『국토정보 다이제스트』, 1985.3.1. 제3권 제5호.

「격론에 부딪친 파나마 운하의 앞날」,  『삼성건설』, 19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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