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의 리더십 _ 나는 정치 군일일 뿐이었다


무관(武官)의 칼은 운다. 밖으로는 나라의 강역(疆域)을 넘보는 적들을 향해, 안으로는 손에 쥐어질 듯 가까운 국가 권력과 그것을 향해 꿈틀거리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나라의 령(令)을 따르면 일등 공신이 되나, 자기 욕망을 좇으면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을 움켜쥐게 되는. 그래서 이성계 같은 정치군인의 출현은 나라의 먼 장래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군인이 칼을 안으로 돌리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정치군인은 이미 권력에 단맛을 들인 반란군 주모자인 것이다. 그러나 근세 이전 권력 창출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역사상 마지막 왕조를 세운 조선의 시조 이성계도 예외는 아니다.


문(文)은 칼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더구나 그가 국명을 위반하고, 칼끝을 안으로 겨누었을 때에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 고려의 희망은 고구려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었으나,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로 국한 시킨 다음에 다시 일어선다는 것은 유리한 국제 정세가 따라야 했다. 또 내부도 준비되어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핍진했다. 준비도 부족한 가운데,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었다.


고려말의 동북아 정세는 가히 드라마틱하다. 중국을 100여년간 지배하던 몽고족의 원(元)은 새로 일어서는 한족의 명(明)에 의해 다시 북쪽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세계 경영을 했다지만, 수탈 위주의 정책이 가져온 결과였다. 한족은 일어섰다. 여러 세력들이 군웅할거 했으나 결국 중국 통일은 일개 목동 출신의 의심 많은 한 사나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원장이  바로 그다.


때마침 고구려가 활동하던 고토(故土) 만주는 완전한 힘의 공백지대였다. 명나라는 원과의 장기전으로 지쳐 있었고, 고려가 북원과 동-북면에서 협공해 들어간다면 명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단기간내 만주를 도모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처음이자 지금까지 는 마지막인 우리 민족의 고구려 옛 강토를 수복할 기회를 저버렸다. 칼을 안으로 돌려버린 탓이었으며, 그 자신 정치군인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그를 요동정벌의 좌군사령관으로 임명한 것부터가 실책이었다. 그는 이미 위화도 쯤에서 회군하리라고 결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군사를 몰아 위화도까지 가면서도 정벌군답지 않게 느릿느릿 행군했던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왕 14년(1388년) 4월 18일 평양을 떠난 정벌군은 5월 7일이 되어서야 위화도에 진을 치게 된다. 작전 전개를 위해 신속히 이동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8일만에야 도착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회군할 때에는 개경까지 단 11일만(5월22일~6월 1일)에 당도해 도성을 포위했다.
 

그의 회군 이유이자, 쿠테타 이유인 사불가론(四不可論)은 그가 차마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인지 의심가게 만든다. 첫 번째 이유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철저한 사대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농사철이자 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군사력을 총동원한 틈을 노려 왜구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 넷째 이유는, 장마철을 맞아 활의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이 질병에 걸릴 것이 염려된다는 것이다. 회군이유로는 너무나 궁색하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한족은 승리했다. 유교와 사대의 사상을 이들 신진 군부 세력에 뿌리깊게 내리게 했으니 말이다. 사실상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어찌 사상적 측면에서만 나온 결과였겠는가? 그는 이미 주원장과 속국의 왕이 되겠다는 빅딜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치군인 이성계의 북벌의 꿈을 꺾는데에는 속국의 왕이되는 걸 인정하는 밀약만으로 충분했으리라 본다. 그런 측면에서 주원장의 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조선’이란 나라 이름까지 묻고 정할 정도였다.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것조차 묻곤 하는 이성계의 굴신의 외교는 지금까지 이어져 사대의 근성이 여기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를 장악한 군인. 그가 그 자신의 이너서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국가의 먼 장래까지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선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우두머리로 하는 신흥 무장 세력과 사대부 세력이 합치는 절묘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그를 도와 고려를 전복하는데 힘을 모은 문신들은 이성계와 사상적으로 동질 의식을 느꼈다. 이는 고려의 훈구 세력(기득권층)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요구를 꿰뚫어 본 같은 부류들간의 교류일 수도 있겠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릴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그의 설득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회군하면서 동료 사령관인 조민수를 동참시켰고, 수하 병사들로부터 충성 언약을 받아냈으며, 다양한 인심 이반책을 통해 고려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정치군인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고려조를 폐하면서도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시점을 4년 후로 연기한 것도(이성계는 처음에는 일단 고려 왕으로 등재되었다.) 그 자신의 치밀함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이기에 위화도 회군은 철저히 준비된 쿠테타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고려조 권문세가의 경제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전제개혁을 통해 그는 준비된 반란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전제 개혁의 핵심은 기존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아 이 중 일부를 이성계 추종 신진 사대부들에게 지급함으로써 내부적으로는 반란세력의 경제적 역량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정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반란 동지였으나, 이제는 거추장스러워진 조민수를 제거하는 작업은 이 전제 개혁에서 거두어들인 부수적인 성과였다. 나아가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신흥사대부는 물론 절개의 대명사 정몽주로부터의 지지도 이끌어 냈다. 게다가 왕권을 얻는 과정은 여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옥새를 받는다는 식으로 모양새를 갖추어 진행했다. 형식상으로는 고려 왕실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 날이 1392년 7월 16일이었다. 실로 대단한 술수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국가 경영의 원대한 꿈이나 경험은 전혀 없어, 후계자 선택 과정은 물론 개국 공신 선정 과정에서도 연달아 실수를 범한다. 지도력의 혼선과 함께 만년에는 레임덕 현상까지 가중된다. 왕자의 난은 바로 후계자 선정상의 실수가 빚어낸 예에 불과하다. 아들이긴 하지만, 창업 과정에서 일등 공신 역할을 수행했던 방과와 방원에 대한 평가를 간과한 것은 비록 부자지간이라도 창업에 참여한 공인(公人)에 대한 인사정책으로는 한참 뒤떨어진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의 능력 및 리더십에 있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장군의 자리와 국왕의 자리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탓에 기인한다. 이 점은 그가 정권의 영속성을 위한 준비가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태조본기 1년(1392년) 7.18일조에는, 태조가 “백관에게 지시해 전 왕조[고려조]의 정력(政令), 법제의 장, 단점과 변천해온 내력의 세목을 상세히 적어 보고하게 했다.”고 쓰여있다. 그는 왕이 된 후에나 이 같은 국가 경영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던 셈이다. 그러며 혹시나 있을 왕씨들의 반격을 우려해 그는 원년 10월에는 유화정책을 취하고, 2년 5월에는 “하늘이 과인에게 명해 한 나라의 군주로 삼았으니, 무릇 영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적자(赤子)다.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해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도, 이듬해 왕씨들에게 대한 정책을 급선회해 대간과 형조를 시켜 왕씨를 제거토록 한다. 그 후로 왕씨들은 강화 나루에(태조3년 4.15), 거제 앞바다에(태조3년 4.20) 던져졌고, 중앙과 지방에 남은 왕씨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해 이들을 목 베었으며(태조3년 4.20),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전왕조의 후손이 아니더라도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는(태조3년 4.26) 정책을 취한다. 자신감의 결여인 것이다. 무관답게 죽여 없애야 탈이 없다는 생각을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한 다음에도 그대로 쓰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군인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국왕이었다.


조선의 모습은 고려 왕조, 즉 상부 구조만 바뀐 형국이었다. 경영층만 바뀌었지, 조선다운 그 무엇인가가 없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나라의 강역을 넓힐 비전조차 짓뭉개버린 그가 조선을 세우며 한 일은 결코 창업자다운 것이 아니었다. 함흥차사 따위의 개인적 감정 표출은 한 무장의 정신적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마디로 이성계에겐 정치 앞날을 예견하고 통찰하는 장기통치전략이 부재했다.


민족 강역론(疆域論)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였다. 당시 객관적 정세를 보면 요동정벌군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 욕망의 크기가 작고 뒤틀어진 까닭에, 칼은 안으로만 파고들었던 것이다. 안에서 우는 칼을 잠재워라. 위화도 회군이 천추의 한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그러니 역사에서 경영을 배우고자 한다면, 오늘날 CEO는 크고 원대한 생각으로 떨쳐 나가 크게 행동으로 옮길 일이다. 불회군 불퇴군(不回軍 不退軍)의 정신으로 말이다. 그럴 때 세계는 당신에게 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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