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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통섭+인문학+세종시대+르네상스+초영역인재를 묶은 신작을 준비 중입니다.

by 전경일 2009. 2. 2.

이번에 가당치 않게 욕심을 내서 통섭+인문학+세종시대 조선의 제1차 르네상스+이탈리아 르네상스+초영역인재를 묶은 신작을 준비 중입니다. 흠... 당찬 시도지만, 학문의 경계를 어떻게 넘나들고, 짧은 지식을 어떻게 예비할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하지만, 역사경영학을 열듯, 인문경영통섭학의 새로운 시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일은 다 끝냈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네요. 여기 한꼭지만 소개합니다.


경영자는 인간과 세상을 아는 자

비즈니스 양태가 가치, 문화, 지식, 기준 등 모든 면에서 뒤섞이고 뒤얽히는 가변성의 시대에 경영자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 혼돈만 넘어서면 천지창조의 신천지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칠흑이다. 그간 효율성의 만능에 젖어 지속가능기업을 위한 경영의 본질, 즉 본원적 생존에의 조건을 망각한 결과다. ‘지속가능’이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통사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즈니스의 전 궤적을 훑게 된다. 지구상 어떤 강국도 지속가능경영에 실패해 왔다. 그러나 그 유산은 다른 정체(政體)로 바뀌며 계승됐다는 면에서 나름의 지속성을 지닌다. 지속은 하나의 조건으로 창조적 혁신을 요구한다. 계속해서 현재를 미래형으로 갱신(更新), 갱생(更生)해 내는 것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워지는 것’이며, ‘처음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기업은 요즘 용어로 ‘개선’, ‘혁신’이라고 부른다.

창조행위를 간과한 결과, 한국 기업들은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 있다. 산업 전체적으로 선행기술은 전도(前途)를 밀어내는 힘이 여전히 약하고, 산업을 이끌 지식은 한계에 봉착해 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 해법만으로 현실을 이해해 온 결과다. 경영학이나 대학의 학제에서는 ‘부(剖, 쪼갠다)’만 강조했지, 상대적으로 ‘검(檢, 봉합한다)’을 소홀히 함으로써 통합적 조망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미흡한 학문적 ‘부검(剖檢)’을 해 온 것이다.

경영현장은 특히나 부분해법이 횡행한, 전문의들의 세계였다. 분석만 하면 창조가 이루어질 것으로 착각해 왔다. 새로운 지식 사회에 대응하지 못 한 채 경영인양 행세해 왔으나, 본질은 원숙해진 자본주의 시스템을 빌려 운용한 것이지, 차원을 달리한 경영은 아니었다. 특히나 한국사회의 학력, 재산 세습과정을 보면 봉건제적 유산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고착되어 더욱 공고히 해주고 있다는 것 같다. 지금의 경영은 과거에 비해 그저 고도화된 시스템에 의해 운용된 측면이 강하다. 제도와 사회적 틀을 넘어 창조사회를 만들었던 르네상스 정신인 통합적 시각, 전체를 조망해 내는 ‘전망(全望)’은 부족하다.

21세기를 시작한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부터 인간은 고유의 무한한 역량과 다양성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인간다움을 마음껏 드러내게 하는 게 옵션이 아닌, 필수사항이 되고 있다. 경영자는 고객의 감성에 구애하기 위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감성훈련을 쌓고 있다. 고객을 알고,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선 과거와 동일하게 세상과 인간을 아는 부분해법이 아닌, 전체를 인지해야 한다. 폭넓은 감식성(感識性) 시야를 지닌 인지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경영은 전체해법을 풀고 이것을 나눔으로써 새로운 지식 빅뱅의 시기를 준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창조경영을 위해서는 경영자의 성장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영 방식, 경영자의 사고가 협소하면, 그가 그려내는 미래는 작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부분해법 시대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거대한 지적 지각에 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에 경영자는 가장 풍부하고, 심도 깊은 지식 설계도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 경영자야말로 기업 내에서 가장 크게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전체 문제를 총체적 인식으로 풀어 나가는 경영자의 자질이 수준 높게 요구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이다. 경영자가 ‘인간과 세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다가서려고 하는가? ’스스로의 존엄성을 알고, 기업 활동을 통해 가치 고양의 주체가 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니다. 기업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것이 건축이든, 예술품이든, 자동차든 인간은 자신에 맞춰 모든 것을 설계하고 만들어 낸다. 모든 욕구의 시발이 인간학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풀어야 할 문제의 규모와 복잡성이 커지는 시대에는 부분해법만 내세우는 경영자는 곧 자기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인간과 세상을 보다 깊이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경영의 숲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도, 경영자의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도 문학, 사상, 역사 등의 고전을 섭렵해 법고창신해 나가는 자세는 차원이 다른 경영을 일궈낸다. 나아가 새로운 지적 지형도에 맞는 리더십을 획정해 낸다.

‘단견(單見)’, ‘단기(單期)’, ‘단편(單編)적’ 접근은 미래의 대안적 방법이 될 수 없다. 이는 해법(解法)이 아닌, 졸법(拙法)에 불과하다. 단(單)은 홀이기에 짝을 이루지 못한다. 경영지식은 짝을 이룰 때 온전해 진다. 경영자가 철학적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일개 장사꾼에 불과하다. 각종 최신 경영기법이 넘쳐나는 수도꼭지를 닫고, 인문학의 수원지(水源池)로 눈을 돌릴 때 ‘근원적 가치 창출’에 보다 가까이 다가선다. 철학은 이런 항해에 가장 명확한 나침반이 된다.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이런 상황은 비유하자면, 조선 초의 상황과 비슷하다. 조선이 고려를 대신해 창업된 배경에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고려 정부의 재정 붕괴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 보다도 철학적 변동 영향이 훨씬 크다. 불교를 대체해 생생한 국가경영의 담론을 창출해 내는 유교로의 철학적 이전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의 나팔소리나 다름없었다. 창업 후 가장 찬란한 세종 시대의 문물은 다름 아닌, 天(.)地(ㅡ)人(ㅣ), 이 세 개의 기호로 유교의 모든 철학을 드러내며, 이런 철학을 기반으로 국가 경영은 시작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도 삼재(三才)는 대단히 창조적인 심볼이자, 사상이다. 권력이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것이므로 하늘이 곧 백성이라는 생각에 가 닿는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根本)(즉, 민유방본民惟邦本)임으로 국왕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대천이물代天而物),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양육하는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것(위민爲民)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국왕의 책무는 “오로지 애민하는 것” 이다.

이 같은 신유학적 철학으로 세종 정부는 ‘드높은 평화에의 경지’인 ‘융평(隆平)’과 ‘절대 풍요의 경지’ 인 ‘풍평(豊平)’을 국가경영의 목표로 삼는다. 세종의 경영정신에 항시 ‘하늘(天)’인 백성이 있던 것은 이런 철학에서다. 이런 철학적 사고로 세종은 과거 고려의 국가 철학인 불교의 내장(內臟)함, 은둔함, 심오함과는 거리가 먼 생생(生生)함으로 당시 민중들에게 다가갔다. 세종의 탁월성의 경영의 원류가 인간과 세상을 알고자 한 철학적 바탕에서 나왔기에, 조선은 신새벽의 가슴 벅참을 느끼며 르네상스를 열어젖힐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글자에 이처럼 간결하게 국가경영철학을 상징적으로 반영해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정인지의 말마따나 이 ‘간단하면서 무궁무진한 글자’는 천지인 세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삼재(三才一貫)의 유교적 원리에 다가 입모양인 ㄱ(ㅋ), ㄴ(ㄷ, ㅌ), ㅁ( ㅂ, ㅍ), ㅅ(ㅈ, ㅊ), ㅇ( ㅎ)의 5개 자음이 상호 교접하고, 통섭하며, 통합되고, 순열과 조합으로 뒤섞이고 뒤얽히며 조화를 이뤄낸 것이다.《훈민정음》창제의 원리는 새로운 인간 세상을 그리는 염원이 깃들어져 있는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런 통섭적 사고가 있었기에 세종시대는 전 시대와 완연히 다른 창조적 지평을 활짝 열어젖힐 수 있었다. 창조적 발상의 근원, 즉 ‘창원(創源)’은 세상과 인간을 알고자 한 그 시대 사람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없는 지식을 주어 섬김으로써 경영이 철학 없는 운용 수준으로 국한되는데 일조해 왔다. 그 결과 사회는 철학 없는 부(富)와 냉소적 방관주의가 팽배하고, 진정한 고객 가치는 도외시 되거나, 객체로 존재해 왔다. 그러다보니 세상속의 사람, 사람 속의 희구를 꿰뚫며 그 속까지 깊숙이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피상적 관계로 비즈니스 세계의 기업과 고객을 대해 온 셈이다. 진정성 없는 친절에 고객들은 머리를 가로 저었고, 도덕과 철학적 부재에 가로막힌 기업에 돌을 던졌다. 말만 풍성하거나, 세상에 대한 헌신, 참여, 배려, 환원의 ‘노블리스 오블리쥬’에 인색하기만 한 기업에게는 침을 뱉었다. 이런 배경을 무시한 채, 대한민국을 ‘반(反)기업정서’가 판치는 사회로 몰아가며 어깃장을 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천박한 부의 행패로 밖에 볼 수 없다.

최근 빌 게이츠가 창조적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것을 보면 그의 기업가로서의 철학적 고민이 예전과는 달리 사뭇 달리 성숙한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경영이 그에게 가르켜 준 바, 경영자란 ‘완성되어 가는 자’라는 심오한 철학적 화두를 실천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모든 경영자는 돈을 벌고, 사업을 키우고자 하나, 철학없는 경영은 운용에 불과하고, 철학 있는 경영은 세상을 생각하고, 인간을 키워 낸다. 그러기에 경영은 인간이 수행하며, 역으로 인간내지 인간 고유의 심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각차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름 아닌, 철학에 달려있다.

기업은 경영자의 수준에 크게 영향 받는다. 한국기업에서 최고경영자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한 기업의 성장은 최고경영자의 역량에 달려있기도 하다. 그가 기업 경쟁력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최고 경영자가 사람을 비용으로 보는지, 인적 자원으로 보는지에 따라 사람에 대한 정책도 따라서 달라진다. 성숙되고, 유능하며, 인간을 알고자 하는 경영자라면, 직원들은 빼어 닮는다. 그런 이유로 경영자는 ‘완성되어 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경영자가 인간과 세상을 안다면, 경영에서 더 이상 알아야 할 게 무엇이 있을까 싶다.

훌륭한 경영자의 탄생은 다방면에 걸친 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그 사회의 품격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지금까지 경영자에게 대체로 요구되어온(품격 차원에서 치장되어 온) 기능적 지식은 이런 것들이었다. 영업, 기획, 회계에 통달하고, 제품과 시장을 꿰뚫어 보며, 직원들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이 백업되는 시대에 그런 것은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대신 창조자의 역량을 요구한다. 과거의 격식 있는 경영자상처럼 프랑스 요리를 어떻게 먹고, 각 와인의 빈티지나 품격을 논하고, 클래식 음악회에 가는 것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패션 디자인의 새롭게 뜨는 별이 누구고, 암스테르담에 가서는 어떤 바를 찾고, 누가 정치권과 밀접한지를 아는 것 따위로는 미래를 열어 나가지 못한다. 이전에는 이런 것들에다가 다소 품격을 더 하기 위해 어느 분야에 심취해 있고 조예가 깊다는 식의 홍보성 자찬(自讚)이 주를 이뤘다. 이 정도의 깔끔한 교양 따위로는 철학 있는 경영을 이뤄낼 수 없다. 윤석철 한양대 석좌교수는 “21세기 경영자는 인간의 아픔, 정서, 욕구를 파악할 줄 아는 감수성으로 고객의 수요를 읽어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의 지적은 우리가 지향하는 경영자상에 잘 들어맞는다.

창조 시대의 경영자는 인간적으로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을 깊게 자극할 수 있는 영혼의 향기가 나야 한다. 경영자는 돈을 버는 행위를 넘어 이제 그 사회에 철학을 불어 넣는 일에 뛰어 들어야 한다. 일천하기만 한 이재론(理財論)으로는 세상을 감동시킬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 CEO들로부터 경영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드러커에게서, 다양한 사업부문을 자르고 떼내고 붙이는 수완으로 전 세계 경영자의 벤치마킹이 된 100년 넘은 기업의 최고경영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철학이라곤 기껏해야 자기의 우주 내에 머문 것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것은 기껏해야 미국식 경영효율에 불과했다. 여기 어디에 깊이 있는 철학이 있는가? 하지만 창조시대는 출발부터 다르다. 전사적 창조 역량이 중요해 지고, 이것은 경영자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피터 센게는 “개인의 위대함이 위대한 인물을 모방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위대한 조직이 다른 기업을 답습함으로써 이루어진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조직의 우위를 위한 경영자의 철학적 우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경영자에게서는 남다른 철학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가 빚는 세상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철학 없는 자들과 경영을 얘기하는 것만큼 소비적이고, 값싼 대화는 없다. 우리는 그들과 결별한 채 내일로 가고자 한다. 경영자는 인간과 세상을 알고, 거기에 생명과 영혼을 불어 넣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자이다. ⓒ전경일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