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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왜, 지금 광개토태왕인가?

by 전경일 2010. 4. 6.

고구려를 세계제국으로 확장시킨 우리 역사상 최대영토를 개척한 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다. 중국 측 기록인 『진서(晉書)』에는 ‘안(安)’이라고 적혀 있다. 태왕은 374년에 태어나 제 18대 임금인 고국양왕 재위 3년(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6년 뒤인 392년 5월에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태왕의 큰아버지는 소수림왕이며, 아버지는 소수림왕의 동생인 고국양왕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했으며, 뜻이 고상하고 성인(聖人)의 풍모를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광개토태왕조>나 권근의 『양촌집』에도 태왕이 “허우대가 매우 크고 활달한 뜻을 가졌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높았다.”고 동일하게 전하고 있다. 기록으로 미뤄 보건대, 태왕은 선천적으로 왕기(王器)이면서 정복군주로 태어났을 것 같다. 태왕의 이 같은 자질은 고대국가의 왕의 조건 중 하나인 군사 능력 면에서 매우 탁월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고대국가에서는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 선봉에 서야 했기 때문에 국왕이면서 동시에 무장(武將)다운 면을 갖춰야 했다. 태왕은 이런 면에서 전혀 손색없었다.

태왕은 등극한 후, 413년 10월 승하할 때까지 22년의 재위기간 동안 쉴새없이 남정북벌(南征北伐)하여 고구려사에서나 민족사에서 한 시대를 여는 그야말로 ‘광개토경(廣開土境)’의 경영 성과를 이룩해 냈다. 그는 39살이라는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그의 치적을 담은 광개토대왕비에서조차 그의 사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태왕은 재위시 ‘호태왕(好太王)’, 또는 재위기간의 연호인 ‘영락(永樂’)을 따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렸다. 이와 달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도 불리며, 이를 줄여, ‘광개토왕’, ‘호태왕(好太王)’, ‘광개토지호태왕(廣開土地好太王)’, ‘평안호태왕((平安好太王)’,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이는 태왕의 업적과 특징을 잘 표현한 것으로 “땅으로 널리 개척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해 준 좋고 성스러운 대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승하 후의 시호인 ‘광개토(廣開土)’는 그의 업적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시호의 표현대로 그는 나라의 ‘토경(土境)’을 ‘광개(廣開)’하여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확장했으며, 동방 천하를 패도로써 제패했다. 이처럼 시호는 그 자체로 왕의 업적과 성격 및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모두 담고 있다.

시호를 좀 더 분석해 보면, 시호에 드러난 ‘국강상(國岡上)’은 왕의 무덤의 위치를 뜻하는 장지를 뜻하며, ‘광개토경(廣開土境)’은 살아생전의 외정(外政)의 업적을, ‘평안(平安)’은 내치(內治)의 업적을, ‘호태왕(好太王)’은 왕을 아름답게 부르는 미칭(美稱)인 ‘호’와 제왕호인 ‘태왕(太王)’의 결합어이다. ‘태왕(太王)’이란 말은 대왕 중의 대왕, 즉 우리말로 황제를 뜻한다. 중국의 황제나 천자, 막북의 칸(汗)처럼 ‘왕중왕(王中王)’을 칭하는 말로 태왕은 밖으로 뻗어 나가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한 왕에게나 쓰는 칭호였던 것이다. 한 왕조에서도 태왕이란 칭호를 받는 왕이 겨우 1~2명 나올 정도로 귀한 칭호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광개토태왕은 왕 중의 왕이었다.

그런데 태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특히 국토 확장과 관련이 깊다. 불과 20여년의 재위기간 동안 태왕의 고구려가 세운 새로운 세계질서는 영토적으로는 북으로는 송화강(松花江)과 바이칼호 근처까지 다다랗다. 고조선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절대사명인 그들의 역사적 책무가 태왕 때 와서 이뤄지기에 이른 것이다. 또 서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만리장성을 넘고, 동으로는 연해주(沿海州), 남으로는 한강유역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면서 일본열도를 그 영향권에 넣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어느 왕도 이루지 못한 대영토였다.

이는 고구려가 단순히 변방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왕이 39세의 한창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뜰 때까지 고구려는 아시아의 강국으로 광활한 영토를 가진 명실상부한 대제국이 되어 있었다. 왕을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널리 떨친 왕, 민족의 위대한 꿈을 펼친 지도자이자 팍스코리아나 리더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의 대륙경영에 찬한 찬사>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사에 견주어 볼 때, 상당히 의미심장한 두 기록물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태왕이 왕성하게 대륙 경영을 추진하던 시기에 고구려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적 기록으로, 그의 부하 장수였던 모두루(牟頭婁)의 무덤의 글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무덤에는 8백자의 묘지명(墓誌銘)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데, 고구려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가장 성스러운 나라라는 것을 천하 사방이 다 알고 있다.”

태왕의 부장은 죽으면서가지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태왕이 일궈낸 일생의 역사는 당대 고구려인에게는 경이와 칭송의 대상이었다. 나아가 후세에도 가장 커다란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태왕의 능비는 그의 업적을 기리며 다음과 같이 현창하고 있는 것이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들을) 쓸어 없애시니, 백성들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이 문구는 태왕의 업적이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나라의 부강과 백성들의 평안 그리고 경제적 번영을 이뤄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왕의 정복전쟁과 영토 확장의 최종 목표이자, 궁극적인 결과가 ‘평안한 세상 만들기’에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 점은 태왕을 정복군주이자, 동시에 외정(外征)과 내치(內治)를 조화롭게 이뤄낸 참다운 제왕으로 인식하겠금 만든다. 그의 왕호에 드러난 ‘광개토경(廣開土境)’과 ‘평안호태왕(平安好太王)’이란 찬양은 바로 이런 경영 미션과 경영 성과가 상호 상승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가 이뤄낸 경영 실적이 실로 광대무변했음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