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조선초의 왜구 문제는 대왜관계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다. 고려 멸망 원인의 하나가 왜구의 끈질긴 노략질과 그로 인한 국력 피폐 현상이라고 볼 때, 왜구소탕작전은 조선으로써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태종 때에만 하더라도 왜구의 침입이 무려 64회나 될 정도였다.
태종-세종조 때의 온갖 화기 개발과 수군 정비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시도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 원년 6월에 수행된 기해동정(己亥東征, 즉, 대마도 정벌)은 바로 왜구라는‘악의 축’을 끊어내려는 태종-세종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때는 세종 원년 5월 25일. 두 임금은 한강정 북쪽에까지 나아가 일선으로 출발하는 유정현 함대를 전송하며 승전을 격려했다.
이 작전의 결과는 대 성공. 군선은 6월 20일 대마도에 도착해 수많은 전과를 세우고 7월 3일 거제도를 거쳐 돌아왔다. 비록 박실이 전술상 실패를 한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정벌 이후 왜구의 준동은 한동안 사라졌다.
이런 조치는 마치 로마와 카르타고가 싸울 때,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이 17년 동안이나 로마에 침입하여 괴롭히자, 이를 참지 못해 아예 로마가 카르타고 본국 정벌에 나서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후대의 군사 전략가들은 평하고 있다.
이때 세종은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취했을까?
태종-세종은 강약의 경영기법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토벌과 교류 허용의 상반된 방식이었다. 강온을 뒤섞은 전략운용 방식이었다고나 할까?
이는 태종 때부터 추진해 온 국가적 과제를 계승해 국가적 이해를 도모한 정책으로 풀이되고 있다. 태종은 이때 대마도 왜구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식했다.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지시해 대마도를 도모하기 전 대마도 수호에게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도록 했는데 그 내용이 이렇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지금의 경주)에 예속되었으니, 본시 우리나라 땅이란 것은 문적(文籍)에 실려 있고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 다만 대마도는 땅이 매우 편소하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 왕래가 불편하여 백성들이 살지 않았더니, 왜놈들 중 제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두 이리로 모여들어 굴을 파고 살며, 어떤 때에는 도적질을 하러 나서서 우리 백성들을 겁략하여 전곡을 약탈하고 마구 사람을 살해하며, 집에 불을 놓는 등 흉악무도한 짓을 자행해 왔던 것이다. ...내 선왕에 이어 대통을 이어 너희들이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는 등 너희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일에까지 마음을 써왔는데, 요사이 와서 배은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만들어 피망의 길을 스스로 취하려는 것은 알 수 없는 길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만약 번연히 깨닫고 뉘우쳐서 너희들 섬 전체를 들고 와서 항복하면, 좋은 벼슬과 후한 벼슬을 줄 것이다...우리가 이렇게까지 너그러이 생각하고 너희들을 위하여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며 아직도 도둑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는다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공격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세종 원년 7월 17일)”
그러나 왜구들이 모르쇠로 대응해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회신이 없자 태종과 세종은 대마도 재정벌 작전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9월 20일에야 대마도 왜구 쪽에서 찾아 와 항복하기를 빌고 귀순의 뜻을 비쳐와 세종 2년 윤 1월 23일에 마침내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고, 모든 보고나 문의할 사항이 있으면 경상도 관찰사를 통하여 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이미 대마도는 조선의 행정 구역내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 3년 4월 6일 대마도주 종정성이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은 사적을 상고하고 부로(父老)에게 물아보아도 사실을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며 전에 간청했던 대마도의 경상도 예속을 번복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과 세종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두 임금은 이번에는 대마도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처럼 무역을 허락하였다.
왜그랬을까? 가장 주요한 이유로 두 임금은 대마도인의 내왕을 막아 왜구의 재발을 방지코자 했으며, 한편 정벌의 목적이 영토 경략에 있었던 게 아니라, 왜구 근절을 위한 것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 내 정치 판이 안정되고 대마도주 이하 호족들이 평화적 내왕자로 변모함에 따라 왜구는 점차 근절되고, 새로운 대외 정책이 생기게 되었다. 세종 재임 초 대일 관계의 강약 운용책은 태종-세종간 멋진 팀 플레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대마도를 완전히 복속시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왜구는 근거지를 상실하게 됨에 따라 일본 본토내로 기어들어가고, 그로 인해 조선은 가장 골치거리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시야를 저 멀리 북원으로 돌릴 수 있지 않았을까?
왜구에 대한 관용적 정책이 훗날 임진년의 비극과 한일 관계사에 돌이킬 수 없는 근세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때, 이때의 대응책은 어찌보면 훗날 국가 안위에 대한 미온적 대응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시대 일을 지금과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경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하나가 지금의 의사 결정이 훗날에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훗날 무엇이 영향을 받게 될지 거듭 심사숙고하는 자세는 CEO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책적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니 기업이나 국가경영 또한 통사(通史)적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난국 해법에 대해서도 결코 우왕좌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정이 아닌, 나라와 민족, 그리고 후세에 대해 분명한 자주적 입장을 원칙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후세에 대물림을 하며 오천년 이상 이어져 온 것이 아니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