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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이순신] 작은 첫출발과 원칙주의

by 전경일 2011. 10. 11.

이순신의 첫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무과 병과에 합격한 후 첫 관직은 마땅히 정9품인 효력부위(效力副尉)여야만 했다. 그러나 종9품인 권관에 임명되고 만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는 18품 30계로 되어 있다. 7, 8, 9품은 부위, 5, 6품은 교위, 3, 4품은 장군, 1, 2품은 대부로 되어 있다. (35~37쪽 〈조선시대 서반의 품계와 대한민국 현재 직급체계 비교〉 참조) 관직 초기부터 불이익이 함께 했지만, 장군은 이를 원망하거나 불만삼지 않았다. 오히려 피나는 자기 노력의 기회로 삼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력주의는 현실을 헤쳐 나가는 열쇠가 된다.

장군에 대한 일화가 있다. 첫 관직인 권관 때의 일이다. 당시 감사로 있던 이준백이 자기 관할 하에 있는 여러 진을 순행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를 시킨 적이 있다. 이때 이순신만이 유일하게 감사의 우대를 받을 정도로 무예에 능통했다. 평소 끊임없는 자기개발이 관직 초기부터 장재(將材)로서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다. 일테면 요즘 인사용어로 ‘잠재적 핵심인재’였다. 경영자가 되고자 하는 자의 준비역량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신은 동구비보에서 근무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진된다. 이때가 35살이었다. 그런데 훈련원 봉사 재직 시 조직생활에 큰 위기가 닥친다. 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서익이 행한 정실 인사에 반대했다가 그와 관계가 악화된 것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부정에 눈 감고 대충 타협했더라면 보다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칙을 지켰다. 서익과의 악연은 그 뒤로도 계속 된다.

이순신은 그 후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었다가 36세에는 전남 고흥반도 끝 발포(鉢浦)의 수군만호가 된다. 이때 수군 장교로 바다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훗날 남해 바다에서 왜적을 완전 격멸하는 운명적인 수군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발포만호는 전라좌수사의 지휘를 받는 수군의 단위부대였다. 이때의 작은 경험은 후에 장군이 나라를 구하는데 크게 쓰인다. 만호 시절 이순신은 바다를 알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자신이 모르거나 확인해야 할 일이 있으면 부하들에게 꼼꼼히 캐묻고, 수군 전술의 강약점을 몸소 체득했다.

이후에도 상급자와의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감사 손식이 벌을 주기 위해 진도(陳圖)를 그리게 하는 시험을 치르게 했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용은 주변의 질시를 믿고 호시탐탐 벌 줄 구실만 찾았다. 그러다가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온 서익이 다시 보복성 보고서를 올리면서 결국 파직되고 만다. 5년 2개월의 군 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순신을 파직한 서익이 훗날 임진왜란 때 장군의 활약상을 보았다면 그는 자신의 경거망동과 비윤리적 행동을 참회하였을까? 그런 서익은 이순신의 활약상을 보지 못한 채 임란이 일어나기 5년 전 사망하고 만다.

장군의 삶에서 우리가 되짚어보게 되는 게 있다. 어느 조직이든 원칙주의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는 것이다. 특히 비윤리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사리사욕을 좆는 조직일수록 정의로운 사람은 눈엣가시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당시 조정의 풍조가 이러했다. 이런 부패구조가 임란을 불러들이는 주요 내부원인이 된다. 이순신이 상사와 갈등을 겪게 된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탓이 크다. 원칙주의적인 면모는 개인적 어려움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줄곧 나타났다. 장군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그런 강직함은 적과 맞서 싸우는 데서도 수군의 기강이 되었다. 어느 때보다 윤리경영이 강조되고 있는 이즈음의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친기업적 정서의 핵심은 윤리의식에서 나온다. 원칙을 져버릴 때, 기업은 걷잡을 수 없이 고객 불만과 여론의 뭇매를 맞게끔 되어 있다.

1989년 3월 24일 미국 알래스카 주 부근 프린스 월리엄 해협에서 유조선 엑손(Exxon) 발데스호가 암초에 전복되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사고가 발생했다. 좌초된 선박에서는 3,700여 톤의 원유가 쏟아져 나와 알래스카 해안 인근수역 72km가 기름으로 뒤덮였다. 6개월 사이에 4,800km의 천연 생태계가 파괴됐다. 사고 당시 배를 조정한 사람은 무면허 3등 항해사인 그레고리 쿠진스(Gregory Cousins)였다. 사고 직후 선장 조셉 하젤우드(Joseph Hazelwood)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해안경비조사단은 선장과 3등 항해사의 혈액을 채취해 음주 측정을 했는데, 사고 후 9시간이 지났어도 선장의 혈액 내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알코올 농도가 측정되었다. 사건 발생 후 엑손은 언론에 사건 설명을 회피했다. 그러다 전국 방송이 시작되고 나서야 대변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4시간이 지나도록 엑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회장인 로렌스 럴(Lawrence Rawl)은 사건 발생 후 언론에 대해 매우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사에 짜증을 내기도 했다. 사고에 대한 파장이 확대되어 미 정부가 ‘대형 참사’로 규정하자 그제서야 로렌스 럴 회장은 생방송 TV 인터뷰에 출연했지만, 대책을 묻는 질문에 답변 대신, 비난의 화살을 언론 쪽으로 돌렸다. 엑손이 저지른 사고와 불성실한 대처의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기름 유출에 따른 비용으로 약 70억 달러가 부과되었다. 무책임한 기업 활동에 대해 부과된 벌금액 중 사상 최고액이었다. 또 유막(油膜) 제거 등 청소비조로 21억 달러를 지불해야만 했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11억 달러의 피해보상금도 추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또한 선주는 1억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었고, 항해사도 형사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후 선장은 90일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에 대해 형량이 너무 가볍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추된 기업 이미지는 이 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엑손은 세계 1위의 석유회사에서 3위로 추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엑손 발데스는 ‘오만한 기업’의 동의어로 회자됐다. 이 사건은 1년 넘도록 언론에 오르내렸고, 사람들은 쉽게 잊으려 하지 않았다. 비윤리적 경영 행태와 오만한 태도에 대해 전 미국인의 심판이 뒤따랐던 것이다. 이후 기업들에게 윤리경영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칙으로 부각되었다. 윤리경영의 중요성을 되짚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군의 초기 고충은 썩어 빠진 조정 현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또한 올곧은 삶의 철학이 투영된 것이었다. 파직된 지 4개월 후 이순신은 서울 훈련원 봉사로 복직된다. 비록 하관말직이었지만, 장군은 본분을 다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장군을 일으켜 세운 것은 굳은 의지였다. 39살이 된 1583년 10월 장군은 3개월간의 함경도 병사 군관 생활을 마치고 함경북도 두만강변 건원보로 전임돼 여진족 추장을 사로잡는 공을 세운다. 이는 이순신이 처음으로 지상전투에서 승리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직속상관이었던 북병사 김우서가 이순신 단독 작전을 시기하는 바람에 다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초기 관직 생활은 이처럼 주변의 질시와 속 좁은 처사에 적잖은 시련과 마음고생을 겪은 시기였다.

이후 훈련원 벼슬이 만기 되어 참군(정7품)으로 승진했다가,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 병마만호에 임명된다. 그러나 이때에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여진족 침입을 패전으로 규정하면서 이순신은 투옥된다. 이순신이 병력 증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운데 소수의 병력으로 여진족 침입을 격퇴하고 군민 60여 명을 생환시킨 전투였지만, 장계는 패전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전투성과가 인정돼 조정으로부터 패전이 아니라는 판정이 내려지며 이순신은 처형의 위기에서 간신히 모면된다.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한 대목이 있다. 패전이 아니라면 혹독한 인사 상 불이익이 없어야 할 텐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애 첫 백의종군이었다. 이순신을 파면시킨 이일은 당시 조선 장수의 상징적인 위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름값과 달리 그는 임란이 일어나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선봉군 2만 명을 상주에서 막지 못한 채 무참히 패배하고 만다.

조산보 전투 이후 이순신은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치가 판치는 군내부에 환멸을 느꼈을 법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작은 직위라도 유지하려 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고 이를 평생 실천하고자 했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나, 비울 때에는 찬 서리처럼 엄격하게 비워냈다. 비웠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역사의 부름을 받았다. 이순신을 이렇게 결단케 한 것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려는 일관된 의지와 헌신의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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