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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전경일의 신간]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by 전경일 2011. 10. 26.
제가 이번에 신간을 냈습니다. 한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2012년은 임진왜란 7주갑이자, 420주년이 되는 해!
경제전쟁의 승리자로 돌아온 이순신!
21세기 경제위기시대, 우리는 왜 이순신을 찾는가?

치열함과 탁월성의 경영, 경영학의 교범으로 이순신을 만나다.
필사즉생의 ‘이순신 정신’으로경제위기시대 글로벌 도전을
넘어 설 해법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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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알고 있는 ‘이순신 지식’은 거부한다!
통찰과 통섭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순신 경제전쟁과 임진왜란의 전모를 밝히다!


거북선 R&D 센터 ‘골든 트라이 앵글’의 비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승리의 중심에 거북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거북선이 이순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 앵글’에서 강력한 백업 시스템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세 척의 거북선은 여수 일대 각기 다른 선소에서 제작되었다. 그 장소는 전라좌수영 본영 앞 선소, 돌산 방답진 선소, 쌍봉 선소 세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각기 다른 선소에서 거북선을 제작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3곳에 거북선 제작 센터를 둔 것은 목재 등 자원 채취의 용이성, 동시다발적 제작의 필요성, 진수 후 작전 투입의 적지성(適地性), 건조 지역의 제 조건, 프로젝트 관리상의 백업 시스템 차원 등의 이유가 반영된 것이다. 요즘 말로 ‘제작 포트폴리오’를 분산해 위험요소를 줄이고, 효과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 앵글’인 각 선소들의 위치를 살펴보면 본영 선소는 남해를 통한 경상도 해역 출격 거점으로, 방답진은 고흥반도와 순천만 일대를 포함한 전라 인근 해역 출격 거점으로, 쌍봉 선소는 만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두 선소를 지원하는 백업어(back upper)로써 크게 기능했다. 한편, 전라좌수군의 본영인 진남관 위치상, 본영은 시제품 개발 센터로 ‘테스트 베드’ 역할을 수행하면서 실질적으로 해상전투용 거북선 건조를 총괄한 곳이었고, 방답진은 해상 최전방에 위치해 있고, 쌍봉 선소는 안쪽 깊숙히 위치시켜, 제1 R&D 센터와 제2 R&D 센터로 구성되었다. 물론 이때 쌍봉 선소의 경우에는 ‘숨겨 둔’ 제2 R&D 센터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각 선소간 거리는 쌍봉-본영(7km), 본영-방답진(15km), 방답진-본영(17km)으로 이순신 R&D 센터는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는 ‘진격형 골든 트라이 앵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지식 경영의 결정판, ‘무(無)시차 경영’
이순신 장군은 조총이란 신예 무기로 무장한 왜적을 어떻게 무찔렀을까?  여기에는 가장 효율적인 함포 사격 방식이 도입된다. 장군은 함포 사격 시 화포와 회전이 빠른 판옥선 간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켜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리볼버 소총처럼 배 자체를 360〬 회전시켜 가며 화포 사격을 가했다. 앞면의 포가 발사 중일 때 다른 면의 포들은 장약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시차 없이 100% 효율성을 올리는 ‘함포 발사 프로세스’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 자체로는 적의 3단계 발사 전법인 제사전술과 성격이 같다. 하지만 왜군의 제사 전술이 흔들리는 바다·전함·사수·조총이라는 4가지 불확실한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과 달리, 판옥선의 경우에는 움직이는 해상에서 배와 화포가 일치 되어 불확실 요소가 2개로 줄어들며 상대적으로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발사거리에도 정확하게 수학적 원리가 작용했다. 피타고라스 법칙이 이용되었다. 장군은 적과 아군의 거리는 조총의 유효 사거리보다 크고, 화포 사정거리보다는 작은 지점에서 적함을 맞이해 전투를 치뤘다. 화포 사정 거리 내 적을 둠으로써 명중도를 높이고, 회전식 사격이라는 ‘무(無)시차 경영’으로 함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적에게 치명타를 안겼다. 이런 방식으로 아군의 손실은 최소화시키고 적은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장군의 전투 수행 방식은 어떤 전투 프로세스보다 치밀하고 정밀했다. 이런 화포를 탑재한 ‘이순신 귀선’은 화포시대의 전술을 훨씬 앞당긴 것이었다.
거북선 R&D 센터의 ‘골든 트라이앵글’과 360°회전의 화포사격 ‘무시차 경영’은 이순신 장군의 지식경영의 일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는 예전처럼 ‘매뉴얼 중심의 마인드’로는 경영의 본령을 치고 들어갈 수 없다. 21세기 ‘이순신 정신’으로 변화에 적응하고 위기에 대응하며 상대적 경쟁우위를 점하겠다는 창조적 발상만이 혁신의 본질이다. 글로벌 경쟁에서 이길 힘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점을 장군의 경영은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다.


이순신의 <277> 전사들, 임란 승리를 견인하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해내는 영웅담을 그린 영화 <300>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군과 함께 한 ‘277명의 막하의 장수’들도 이와 같다.
이순신을 따른 막하의 장수들을 보면, 대략 277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대체로 임진년과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인 이후 다시 재발하는 정유년에 이순신 군영에 뛰어든 핵심인물들이다. 이들은 장군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했다. 이 277명의 핵심인물들과 더불어 장군은 7년 전쟁을 한 몸으로 치루어 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십에 흠모돼 구국의 일념으로 합류했다. 장군은 그들을 거두었고, 심지어는 발탁하여, 전투 역량을 배가하고 작전을 숙의했다. 임란 승리에 없어서는 안될 이순신의 분신과 같은 ‘핵심 인재’들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내정치’의 폐해를 파헤친다!
여기 위대한 영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 누구나 영웅은 모든 사람의 위에 존재하며 만인의 축복 속에 자리매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달랐다. 일반 백성들에겐 조선을 구한 구국의 영웅이지만 정적들에게는 제거 대상 1호에 불과했다. 이란 음모엔 역설적으로 장군의 원칙주의와 성과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임란 시기 조선 조정 내부가 ‘사내정치’로 극도로 혼란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정유재란이 재발하기까지 4년여 동안, 명과 왜 사이에는 더럽고 추악한 강화 교섭이 진행되었다. 그로인해 전쟁은 소강상태로 빠져든다. 이때부터 이순신 장군에게는 죽음의 올가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선조 이하 대부분 조정 신료들은 전승과 백성 위무로 추앙의 대상이 된 이순신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 장군을 깍아내리기 위해 ‘원균 명장론’이 급부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직전, 장군은 압송돼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의 위기에 놓인다.
잡히지 않는 ‘내부의 적’에 맞선 장군의 처연함. 그 끝은 저 노량해전에서장군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수순만 남겨 놓고 있었다. 장군과 장군이 짊어진 조선의 운명은 백척간두 위의 처절한 깃발과 같았다.


‘이순신 죽이기’ 프로젝트, ‘왜간첩사건’의 다른 해석!
이순신 제거의 명분이 된 가토오의 도해(渡海) 정보. 이와 관련되어 다른 해석이 있다. 즉, 왜장 고니시와 가토오의 이간책이 조선 조정의 보다 주도적인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정유재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게 되는데, 하나는 왜장 고니시와 가토오를 이간질시켜 고니시로 하여금 가토오를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이런 계책은 오히려 일본의 반간책에 걸려들게 된다. 이 작전은 권율이 제안하고 유성룡과 비변사가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다음으로는 가토오가 바다를 건너올 때 바다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해로차단책’이었다. 이는 임금인 선조가 지시하고 윤두수가 지지했지만, 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온 상황이었으므로 성공 가능성은 물 건너간 상태였다. 미묘한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이순신이 희생양이 됨으로써 왜는 당초 노렸던 ‘왜간첩사건’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순신 역경의 삶, ‘더블 딥(W)’을 헤쳐나오다!
‘더블 딥’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세계 경제는 지금 ‘더블 딥’에 빠질 위험에 처해있다. 한번 깊숙이 가라 앉은 것도 모자라 두번이나 가라 앉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더블 딥’ 상황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자신에 닥친 고난의 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순신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종9품 권관(權官)으로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훈련원 종8품 봉사(奉事), 충청병사의 군관을 거쳐 36세에는 종4품인 발포 수군만호가 된다. 우여곡절 끝에 파직되어 훈련원 종8품 봉사직으로 강등된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의 군관, 건원보 권관, 훈련원의 정7품 참군(參軍), 사복시의 종6품 주부(主簿) 등의 부위, 교위를 거쳐 42세에는 당시 장군 품계인 종4품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승진한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이순신은 연속 파직되고, 그후 45세 때에는 하급장교직인 전라감사의 군관으로 강등 보직되어 선전관, 종6품인 정읍현감을 거쳐 47세 때 종4품의 진도군수, 종3품의 사리포 수군첨사로 승진한다. 그 다음 곧바로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승진한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정2품의 삼도수군통제사직으로 승진한 장군은 3차 파직의 아픔을 겪지만 4개월 뒤 복직하여 전사할 때까지 품계와 관직을 유지한다. 현재로 보자면 임원이 되기 전 고참 부장급에서 두번 낙마하고, 대기업 CEO를 앞에두고 한 번을 낙마한 꼴이다. 이순신의 경력을 살펴보면 ‘W’자처럼 두번의 끝없는 추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굴곡진 인생사는 오늘날 경영자들에게 부침 많은 삶에서도 주저없이 일어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순신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울고 갈 좌우뇌 통섭형 인재!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순신 장군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23전 23승의 승리를 이뤄 낸 완벽한 전략·전술의 귀재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이순신 서정시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한산도야음⟩은 팽팽한 긴장상태를 서슬 푸른 칼이 튕겨내는 달빛과 비유해 시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2행의 ‘안진(雁陳)’은 좌수영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군대의 진영[軍陣]으로 비유해 극한의 일체감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날아가는 기러기떼조차 장군에게는 군진으로 읽혔다. 시를 지을 당시 장군은 한산도의 푸른 앞바다를 더럽히는 적들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깊은 전략에 고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밖에 장군이 지은 여러 시편들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며 당시의 참람한 심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이순신은 타고난 감성인이었다.
감성적이면서도 장군은 과학적 원리를 동원해 각종 총통 및 거북선을 발명하고, 조총의 성능을 규명하였다. 철저하게 전쟁 승리에 대한 전략, 전술을 연구한 군사 과학자였다. 특히 거북선은 오랜 시간 누적된 조선 선박의   지식의 집합체이자, 지식통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장군은 거북선 건조 시 자라와 거북을 방안에 두고 3개월 동안 관찰한 것으로 알려진다. 장군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을 정확히 관찰해 배의 구조를 설계하도록 했고, 전투 시 전략적 타이밍을 정확하게 계산해 적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대단히 감성적이며,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이 만능인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울고 갈 통섭형 인재였던 것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세종대왕 시기 이후 ‘조선의 르네상스’를 재현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한국의 경영 현실, 무자원 경영! 과연 이순신은?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자원으로 하는 것이다. 자원을 확보는 생존의 전제조건이다. 빈 손이다시피한 장군에게 자원문제는 장군을 괴롭힌 가장 심각한 현실적 조건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수국(水國)’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전쟁을 치르기 위한 경제공동체를 장군이 직접 만들어 부족한 자원에 대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군은 호남에서 농사를 지어 군량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 수행과 민생안정의 최우선 과제라고 파악했다. 군사와 민생을 크게 염려하여 여러 섬에 있는 목마장과 미개간지를 활용하여 피난민과 노잔병을 중심으로 둔전책을 조직했다. 전시 군량확보와 피난민을 구휼하려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를테면 경제공동체 건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를 전시경제의 한 방편으로 삼은 셈이다. 수군의 자원 확보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이라는 이중 효과를 염두에 둔 창조적 발상이다.
정유재란이 터지고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난 뒤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손에 쥔 것은 불과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군사가 전부였다. 더구나 살아남은 군사들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탓에 심한 심리적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군은 오합지졸로 막강 수군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강적을 맞아 싸우기 위한 환경요인 분석은 이후 해전에서 연전연승으로 나타난다.


이순신 장군의 ‘울돌목 경영’을 통해 21세기 불리한 경영환경을 뛰어넘어라
불리한 자연조건은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작은 군비로 적을 맞서기에 오히려 적임지가 될 수 있다. 장군이 12척의 함대를 수습하여 회령포, 이진, 어란포 등지를 살펴본 것은 일대회전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죽음을 ‘삶의 가능성’으로 환원해 내는 작업이었다. 장군은 여수에서는 남해의 노량수로를 기가 막히게 활용하였고, 한산도에서는 견내량을 중요 방어기지로 결정했다. 이미 적선이 서쪽으로 많이 이동해 있었기 때문에 장군은 서해로 가는 길목인 명량해협을 최종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전함은 진도 북동쪽 고금면에 위치한 작은 항구 벽파진으로 항진했다. 불리함을 이용해 이기는 전략을 짜는 ‘울돌목 경영’은 이순신 경영의 백미를 이룬다.


글로벌 시장을 헤쳐나가는 이순신 정신!
한번도 해전 경험을 쌓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한 이순신 장군은 어떻게 23전 23승의 완전무결한 대승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장군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당파적 술수에 가려 원칙은 산산히 깨어지고, 완벽한 준비도 없이 전쟁을 맞이했다. 불확실성이 고조된 전쟁국면에서 군졸로 실각되는 아픔도 맛보았다. 그런데도 장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후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궤멸되고 재임용되기까지 온갖 음모와 술수에 공이 가려졌다. 조선수군을 다시 맡았을 때는 함대재건이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장군을 기다린 것은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해야 끝나는 임진왜란의 종결판이었다. 어느 것 하나 위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 우호적 경영 환경이란 존재하지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은 떨쳐 일어나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순신적’ 힘과 의지는 위기상황에서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승리의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장군이 이렇게 엄청난 위기 속에서 승리를 이뤄낸 비밀은 무엇일까?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에게까지 칭송을 받는 완전무결한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세계 군사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생생한 승리의 여정을 통해 승리의 비밀과 벤치마크 해야 할 점들을 살펴보면, 불리한 경영환경에 대처하는 대원칙이 돋보인다. ‘이순신 정신’은 단순한 개별 전투의 승리가 아닌, 전쟁의 양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해 내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2008년, 2011년 세계 경제 위기와 함께 경제전쟁에서 방향타를 잃은 이들이게 이순신은 하나의 이정표가 된다. 위기 속에서 ‘희망’을 불러내는 ‘이순신 정신’은 경영 현장에 생생한 교훈으로 지금 다가오고 있다. 


책 속으로
1960년대 국민소득 79달러라는 최빈국에서 90년대 완제품 시장으로 진출한 쾌거는 이미 과거의 성과에 불과하다. 그간 우리의 수종 산업이었던 반도체, 정보통신, 가전, 자동차, 조선 등 주력산업이 크게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세계 12위의 경제 강국이라지만 내수 부문은 보잘 것 없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같은 총체적 위기상황을 타개할 묘안은 무엇인가? 이순신이 해답이다.
-(1장)

1592년 4월 13일 158,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적이 부산포에 상륙하는 것을 시발로 전란은 발발한다. 마침내 우려했던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이순신은 바로 보름 전인 3월 27일에야 대포 쏘는 시험을 했고, 하루 전에는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는 훈련을 했다.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간신히 대책을 마련한 셈이다. 전쟁 개시 바로 전까지 부족하나마 준비했다는 점에서 우리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한지 1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데 전란을 준비하기에 그 1년은 충분한 시간이었을까? 이 짧은 기간 동안 장군은 어떻게 해전에 대비해 우리 수군을 파악하고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을까?
이순신의 관직 경험을 보면, 발포 만호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육전 경험을 쌓았는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사항이 있다. 알다시피 발포는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군진이다. 평소 이순신의 준비자세로 보건대, 발포만호로 있던 수군지휘관의 경험은 수군의 중요성과 함께 수군 작전에 대한 이해도를 대폭 높인 계기가 되었다.
‘준비’란 일이 닥치기 전의 예비 상태다. 평상시 준비 역량이 곧 기업의 관리능력이다. 초유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며, 불확실성의 경제에 대한 준비태세는 경영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고 있다. 준비하는 기업만이 위기를 피하고, 더 큰 기회를 맞이할 수 있다. 준비역량이 경영능력의 하나로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장)

학익진은 학(鶴)이 날개(翼)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한 진법(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렬 횡대의 일자진(一字陣) 형태를 취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앙의 부대는 뒤로 차츰 물러나고, 좌우의 부대는 앞으로 달려 나가 반원 형태로 적을 포위하며 공격하는 전투전개방식이다. 이 진법은 육상 전투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騎兵)들이 수행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해상 전투에서도 기동력이 뛰어난 전선(戰船)들이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순신은 육전 전투법을 해상에 변용, 적용해 한산대첩(閑山大捷) 등에서 왜군을 대파한다. 여기엔 기동성이 뛰어난 함대 운용과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화포 공격이 창의적 전법과 복합시너지를 내며 효과를 극대화시킨 면이 주효했다. 여러 요소를 통섭해 전술지식을 현장에 접목시킨 장군의 창조적 혁신과 운용의 묘미가 읽혀진다. 기업은 장군이 펼쳤던 학익진 전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학의 날개를 활짝 펴고 글로벌 시장을 품을 대담한 구상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3장)

영화 <300>에 나오는 것처럼 이순신과 함께 한 277명의 핵심 전사들은 이순신과 함께 했다. 이들의 이름을 지우고서 임란 승리를 평가할 수는 없다. 누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적에게 맞서 싸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았을까? 이순신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부하와 백성의 충성을 이끌어 낸 이순신과 더불어 일심동체의 협력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뢰라는 자산이 없으면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4장)

빈손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장군에게 자원이 넘쳤던 경우란 없다. 장군은 늘 가진 자원이 너무나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상상을 뛰어 넘는 발상으로 창조적 혁신을 이끈다. 불리한 군비(軍備)를 뛰어 넘어 적의 경쟁우위를 무력화시킬 전략병기를 만들려는 역발상에서 나온 것이 기존의 거북선을 재창조 해 낸 ‘이순신 혁신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적에게 간담이 서늘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순신 거북선’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철저하게 전투 활용을 목적으로 했다. –(5장)

외부의 적과 맞서는 건 주적이 명확하다. 그러나 내부의 적에 맞서는 데엔 그보다 더 큰 고충이 뒤따른다. 더구나 상대가 왕과 그를 둘러싼 측근 세력들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일생 동안 장군을 괴롭힌 내부의 적은 임금인 선조의 변덕스러움과 불신 그리고 질투와 시기심이었다. 이순신이 패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장군을 따르는 전라도 민심과 군사들의 추앙은 살아 있으되 죽은 자로서 장군이 공을 세우기를 바라는 식이었다. 이순신의 처연함이 여기에 있다. 나는 장군의 이런 면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프다. 작은 것에 연연한 세태 때문일까. 공을 세우되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영웅의 운명은 장군의 심중을 짓눌렀다. 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장군은 원균과 조정 내 그의 후견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방해와 모함에 시달렸다. –(6장)

장군은 울돌목의 가파른 물살을 역이용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시장 변동요인, 경쟁사의 실책, 빠른 기술 변화 등 가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복잡계 경영환경을 보는 듯하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칠수록 경영자들은 불리한 경영조건을 투지와 역발상의 사고로 뛰어넘을 것을 요구받고 있다. 불리함을 이용해 새로운 생존 판도를 짤 때 위기와 맞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이 나온다는 것을 21세기 ‘울돌목 경영’은 경영자들에게 웅변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7장)


출판사 리뷰
시대를 초월한 경영의 힘!
힘에 부친 글로벌 도전 앞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이순신 메시지’의 정수!

어느 개인이나 기업이든 세상을 깜짝 놀래킬만한 기적을 이루고 싶어 한다. 그런데 다들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위기가 찾아옴에도 생사를 건 전투에 임하듯 떨쳐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경쟁자들은 발빠르게 위기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입지를 든든히 구축한다.

우리 역사를 보면 무수히 많은 왕과 장군들이 생멸해 왔지만, 위기를 뛰어넘어 진정한 승리를 얻은 ‘경영자’는 많지 않다. 이순신 장군은 치열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필승의 전략을 짜고 완벽한 승리를 이끈 성공 사례로 가장 두드러진다.

이순신 장군은 서른 두살에 무과에 급제하며 처음으로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에게는 숫한 난관과 시련이 닥쳤지만, 이 놀라운 원칙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는 시련 앞에 굴하지 않았다. 묵묵히 준비역량을 기르고 창조적 혁신 활동에 몰두했다. 남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오히려 기회를 잡아 조선, 나아가 세계 해전의 역사를 온 몸으로 썼다. 온 나라가 ‘불안정한 성공의 덫’에 걸려 한치 앞도 내다보지 않고 내부 문제에만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훗날 승리의 훌륭한 밑천이 될 분야에 미리 뛰어들어 고군분투한다. 그의 혁신 활동은 단순히 전투 승리에 그치지 않고 전쟁 전체 판도를 뒤바꾸는 파급력을 지닌 전략으로 역사 전개 방식을 틀어 버리는 괘거를 가져왔다. 여기에 세상의 변화를 읽는 눈과 통찰력, 유연성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장군으로 하여금 전투, 나아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한 배경이다. 장군의 평생에 걸친 ‘이순신 정신’의 발로는 역발상 전략과 함께 창조, 신뢰, 협동의 정신으로 나타난다. 창조는 믿을 수 없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고, 신뢰와 협동 정신은 ‘결전 의지’로 집약된다. ‘결전 의지’의 정신과 함께 이순신 장군의 정신적 뿌리는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라는 각오 하에 모든 전투를 수행했다. 조선 수군 승리의 토대는 이것이다.

이 책은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정적들의 음모와 술수를 넘어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임에서도 어떻게 떨쳐 일어나 완전한 승리를 이루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나아가 유려한 필체로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와 공인으로서의 삶의 면면을 살피며 장군을 21세기 경영리더로 새롭게 되살리고 있다. 이순신의 경영학적 삶에서 21세기 경영 리더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순신 정신을 21세기 경제·경영학적 의미로 해석한 이 책은 장군의 승리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 마지막 승리의 여정까지 따라가게 한다. 나아가 21세기 대한민국 기업의 향방에 웅혼한 가늠자가 되어 준다. ‘이순신 정신’은 그 확장판인 글로벌 경제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궁극적으로 승리에 이르게 하는 웅변이 되고 있다. 21세기 초우량 기업의 조건은 ‘이순신 정신’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