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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광개토태왕]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by 전경일 2012. 3. 13.

문화적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

지정학적으로 볼 때 고구려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만나는 매우 독특한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문화도 이국적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대홍안령 산맥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초원유목문화, 화북의 농경문화, 중국 양자강 유역의 남방문화, 그리고 한반도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영토 확장에 따라 수많은 종족들이 다양한 문화를 보존한 채 고구려제국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구려는 이들을 수용해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완성시킨다. 이종의 문화를 융합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점차 고구려 독창적인 문화로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 문화가 지닌 자유는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특성과 유목민족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것이었다. 이 같은 자유로운 정신은 개방적 문화와 보편성을 지닌 세계관과 어울려 문화 대 활력을 가져온다. 국토의 확장이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다.


태왕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는 영토가 급속히 확장된다. 이때 북쪽으로는 송화강, 동쪽으로는 연해주의 바다,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는 국경선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국경선이 임진강 유역에까지 뻗친다.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비옥한 농토를 갖게 되었고, 농업의 발전과 함께 생산성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또한 막강한 국력에 바탕을 두며 주변 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진다. 특히 중국 북방의 여러 국가들은 물론 서역으로부터도 발달된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였다. 제국다운 포용의 자세가 발휘된 것이다.

이런 다양성은 인구동태학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고구려인을 구성하는 부족도 각기 다양했다. 벽화에 의하면, 아랍계 인종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고구려에 들어와 어울리며 사회 구성원이 되고 있다. 다른 종족에 대해 편견 없이 교류하고, 수용하면서 고구려는 동북아의 최강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지을 때 각 층마다 극복해야 할 아홉 종족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들은 중화, 왜, 말갈 같은 부류들이 있었다. 물론, 고구려가 포함된 것도 당연했다.

영토가 확대되고 새로 편입된 주민들이 늘어나자, 이들을 이용해 고구려 문화는 급속도로 확장돼 나간다. 수준 높은 문화는 막강한 국력과 원활한 문화교류 하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다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인들은 자기 집단과 문화에 대한 자아의식이 강해 종족 정체성에 충실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들을 힘으로 억압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생과 화합의 비전을 제시한 문화의 국제주의를 구현한 것이다.

고구려인들의 정체성과 포용력 있는 문화는 개방성과 다양성의 앙상블이었다. 그리하여 고분벽화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자유를 끊임없이 희구하는 정신이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표현으로 표출되고 있다. 나아가 태왕비 등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웅대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분벽화나 태왕 비문은 고구려의 정체성을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

고구려는 정치,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으며, 제국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동시에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문화국가로 발전한다. 고조선과 부여를 계승했기 때문에 초기부터 문화는 발달했으며 5세기에 이르러 급속히 영토가 확장되면서부터는 더욱 질적으로 성숙해졌다. 물론 영토 확장에 따라 다양성은 더욱 보편화되고, 증폭되었다.

고구려 문화를 살펴보면 중국의 것과 다른 점이 많다. 문화의 주체가 되는 종족부터 다르다. 중국문화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문화를 수혈 받는 지역도 서역 일부와 남쪽에 불과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서역 및 북방초원, 그리고 대삼림 지대의 문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경제형태도 다양했고, 문화도 각양각색이었다. 더구나 이동성이 강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중국적인 요소, 서역의 요소, 북방 유목국가 요소, 남방 요소 등 다양한 문화가 함께 조화를 이루며 공존했다.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오히려 중국문화를 자극하고, 중국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전체적으로 동아시아 문화에 활력과 개방성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 고구려가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북아 정세가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즉, 태왕 시기 중국지역은 극도로 혼란하여 문화의 중심을 이룰 만한 나라가 없었다. 이는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때에 태왕은 고구려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더불어 백성들의 삶마저 안정시킴으로서 다음 시기 동북아 문명의 중심이 고구려로 옮겨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5세기 이후 고구려는 범세계적인 국제성과 함께 독자성이 빛나는 화려한 문명을 꽃피운다. 서역과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서역과 중국에 문화를 수출하며 중국의 북조문화와 서역의 돈황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일본열도에 고구려의 앞선 문화가 전파되는 것도 태왕 시기에 이루어진 성과였다. 

이처럼 태왕은 문화적 역량을 통해 탁월한 글로벌 경영을 펼치며 문화 군주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수왕 때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 문명의 폭을 대폭 넓히는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물론, 그 기초는 태왕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이 같은 문화강국이었던 고구려가 망하자 이후 만주지역은 문화적 공간이 사라짐으로써 동북아 문화는 중국문화의 영향력 아래 일방적으로 놓이게 된다. 중국의 한족을 견제함으로써 진정한 세계주의를 구현한 고구려의 멸망은 그 문화도 함께 쇠퇴내지는 소멸해 가는 과정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강력한 경영능력이 지속적으로 밑받침될 때, 문화도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바꾸어 말하면, 문화적 쇠퇴는 국가의 흥망과도 직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기업이 지닌 주력 산업에서의 경쟁력 쇠퇴는 기업 문화마저도 고스란히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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