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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왜(倭)의 이국정벌론: ‘대(對)고려 침공계획’

by 전경일 2012. 8. 13.

왜(倭)의 이국정벌론: ‘대(對)고려 침공계획’

 

일본의 ‘신라정토 계획’이 무산되고 난 다음 실로 오랜 세월이 흐른 1271년 5월 들어 한․일 간에는 새로운 전란의 파고가 요동친다. 당시 고려는 대대적인 몽골의 침입을 받았는데, 몽골 침입군에 맞서 고려 삼별초는 최후의 거점인 진도에서 항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되기 직전, 계속 밀린 삼별초는 왜의 막부에 첩장을 전달했다. 첩장의 내용과 목적은 뚜렷했다. 몽골이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는 것, 식량 및 병력 지원을 요청한다는 것, 연대해서 몽골 침입군을 막자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삼별초의 첩장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일본 막부에 의해 무시되고 만다.

 

대신 막부는 몽골 사신 조양필이 다자이후(太宰府)를 다녀간 1개월 후인 1272년 2월부터 규슈 연안에 경비 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그 무렵 몽골 사신이 다녀간 것은 원 세조(世祖)의 명에 따라 일본에 항복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지만 일본이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한다.

 

1274년 10월 원군(元軍) 2만 명, 고려군 8천 명으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은 전함 9백 척에 나눠 타고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북서부 하카타만(博多灣)에 대대적으로 상륙했다. 이 시기 고려군은 몽골의 강요로 불가피하게 용병으로 동원된 혼성 부대원의 자격이었다. 이것이 몽골의 제1차 일본원정이다. 그런데 때마침 몰아닥친 폭풍으로 원정군이 실패하게 되자, 막부는 오히려 여몽연합군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여몽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막아내게 되자 막부는 방어적 태세에서 벗어나 규슈 연안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는⟨이국경고번역(異國警固番役)⟩을 공포한다. 규슈지방에 소령을 가지고 있는 어가인(禦家人)들에게 ‘이국정벌(異國征伐)’이라는 반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나아가 규슈와 산인도(山陰道)·산요도(山陽道)·난카이도(南海道)등에서 선원을 차출해 그 이듬해인 1276년 3월까지 하카타에 집결하도록 명령한다. 이때 막부의 ‘이국정벌’은 고려 공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는 백촌강 전투시나 그 전에, 또는 그 이래 일본이 대륙 진출을 꾀하고자 할 때 항시 한반도를 침구 제1거점으로 삼고자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는 한․일 간 지리적·역사적 거리와 관계성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막부의 기대와 달리 다음 해 어가인들의 참여가 소극적이자 이 계획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다. 어가인이 동원한 병력이 ‘이국정벌’에 참여한 게 아니라 하카타에서 석축을 쌓는 등 방어적인 일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부터 북(北)규슈 전 지역에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된다.

 

제1차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조공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섬나라 정벌에 강한 집착을 보여 1281년에도 출정을 감행했다. 이때에는 총 병력 4만 명(원군 3만 명과 고려군 1만 명)에 전함 900척의 규모로 합포에서 출정하고, 별도로 멸망한 남송의 군대인 강남군(江南軍)도 3천500척의 배에 분승해 10만 명이 동원되어 가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으로 여몽연합군이 정벌에 실패하게 되자 일본 막부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된다. 막부로서는 두 번째 침입을 용케도 막아 낸 것이다. 두 번째 침공까지 막아내자 막부는 상황 판단을 달리 내리기 시작했다. 즉 대반격의 호기(好機)로 보고 그 해 8월 규슈의 어가인들에게 다시 ‘이국정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때에 어가인들은 막부의 명령에 부응해 군사를 동원하였을까? 1275년 ‘이국정벌’ 명령 시와 마찬가지로 이때에도 ‘정벌’ 계획이 실제로 실행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을 막아 낸 일본 막부는 보복 차원에서 이국정벌을 계획했지만, 이 계획은 실제 일본 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내부 단속용이었지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것이었다. 즉 막부는 체제 유지 차원에서 실효성 없는 명령을 거듭 발동한 셈이다.

 

비록 불발로 그쳤지만, 1275년과 1281년 후에 있은 일본 막부의 ‘대(對)고려 침공 계획’은 761년에 계획된 ‘신라정토 계획’처럼 한반도를 목표로 한 대대적인 침략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중대성이 있다. 이 두 번의 침공 불발은 언제고 다시 폭발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신라정토 계획’이 구체적으로 준비되었던 때로부터 513(520)년이 지난 시기였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