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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남왜공정]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

by 전경일 2012. 7. 23.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

 

일본은 유사 이래 주기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해 왔다. 900여회의 침구 행위는 끝내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라는 일본이 주도한 전란과 국체(國體)상실을 가져왔다. 약탈 행위가 침략 전쟁으로 발전한 세계사의 공통점과 마찬가지로 잦은 노략질이 끝내 국가적 침략 전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이 같은 전란으로 인해 우리가 역사상 입어 온 인명과 재산상 피해는 실로 극심한 것이었다. 나아가 역사적 웅비 조건마저 매시기 왜(倭)에 의해 짓눌려 버린 면이 크다. 또한 그 후과(後果)가 현재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한․일 간 모든 면에서 씻을 수 없는 과거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난 역사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어느 면에서는 더 커진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사는 분명 현재사의 피할 수 없는 골간을 이룬다. 임란 후 420년, 합방 후 100여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67년…. 과연 일본과의 전쟁은 끝났는가? 재침의 우려는 없는가?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바가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설’과 ‘재침론’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어 온 바로 지금도 현재진행형에 있다. 또한 과거사를 살펴봄으로써 미래를 예측케 한다는 점에서 준비태세만 완벽하다면 대비 가능하다는 교훈도 준다. 미래에 벌어질지 모를 전란은 변화된 현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왜구의 침구 양태는 보다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양태는 달라도 왜구 침구의 본질은 같다.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설’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미래의 환란에 대비코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왜(倭)의 침구 연결고리: ‘신라정토(征討) 계획’

 

왜(倭)가 한반도를 침구한 역사는 실로 장구하다. 이는 오랜 시간 한․일 양국 사이에 가로놓인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와 일본간에 놓인 숙명적인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1348년 전으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백제 멸망 후인 서기 663년, 백제의 부흥군과 왜의 백제구원군은 현재의 금강 부근인 백촌강(白村江)에서 나당연합군과 맞붙는다. 이는 고대시대 왜가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침입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사뭇 다르다. 이 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의 백제구원군은 나당연합군에 대패하고 왜(倭)의 파병군은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한․일 간에는 깊고 오래된 구원(舊怨)과 변화된 국제질서가 가져온 ‘다른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된다.

 

이 시기, 왜가 4만2천명의 군대와 800척 이상의 대함대를 동원해 백제를 지원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 이유를《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오늘로써 백제의 이름이 끊겼다. 어떻게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다시 오갈 수 있을까.

 

고대 시대 왜(倭)의 왕실이 백제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 수전(水戰)의 패배로 백제는 회생 가능성을 찾지 못한 채 완전히 멸망하고, 백제의 일부 유민과 왜는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패주해 가게 된다. 이것이 백제와 일본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성’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헤이세이(平成) 일왕이 자신에게는 “(백제)무령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와 관련있다.

 

백제 멸망 후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다시는 백제와 왜의 관계처럼 긴밀하지 못했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백제 건국으로부터 멸망한 다음까지도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백제-왜간 관계에서 시종일관 우호적일뿐만 아니라, 특별한 침공이나 토벌 사례도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부터 고대 한․일관계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백제부흥군의 패배로 한반도와 끊긴 왜는 동아시아 변화에 따라 그 연결고리를 다시 찾고자 절치부심 했다. 왜의 백제구원군이 철수한지 96년 지난 759년 때마침 당(唐)에서 ‘안사의 난(安史─亂)’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난은 중국 당(唐)나라 중기에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755∼763년)으로 동북아 정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대형 사건이었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계획은 전면 수면 위로 급부상한다. 왜로서는 100여년 전 백촌강 전투의 패배가 당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의 쥰닝(順仁)천황은 당(唐)의 영향력이 한반도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이태 후인 761년, 한반도에 대한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는 당시 군권을 움켜쥐었던 일본 내 실력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 仲麻呂)의 기획품이었다. 후지와라노는 어린 천황을 좌지우지하는 전제정치로 일본 내 비난 여론이 들끓자, 다른 씨족이나 파벌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신라정토(征討) 계획’을 획책했다. ‘신라정토 계획’은 이후 일본발(發) 모든 침략·침구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부에 모든 분란의 원인과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때 일본은 모든 국가적 관심과 역량을 기울여 철저히 이 침공 계획을 준비했다. 한반도 재진출과 침략적 근성을 드러낼 호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전쟁을 상정하고 준비한 ‘계획’은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그리하여 수많은 배가 건조된다. 무기 제조도 일본 내 기술만이 아니라 당나라의 신식전법과 기술도 도입하여 본격적으로 군비(軍備)를 갖추었고, 신식무기인 노(弩)도 만들었다. 그 외 전쟁에 필요한 군사 양성과 훈련이 이어졌다. 심지어는 신라어 통역자를 양성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한․일간 전란으로 크게 번질 수 있었던 이 침략 계획은 불가피하게 급제동이 걸리고 만다. 제(諸)파벌과의 불화, 가뭄으로 인한 기근, 당·발해·신라간 관계 정비와 더불어 보다 결정적 요인으로는 후지와라노가 정치적 역학 관계에 따라 몰락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신라침공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비록 불발에 그쳤지만,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후지와라노는 8세기 중반 무렵의 토요토미 히데요시(風臣秀吉)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이, 한․일 간에는 수많은 정치적, 국가적 변동이 있었고, 근 50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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