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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위대한 발견

고구마,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위대한 발견

 

인생에선 때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항해에 나섰다가 신대륙을 발견했듯, 우연한 기회에 찾아지는 행운을 흔히 ‘영민한 발견(serendipity)’이라고 부른다. 부산을 떠난 조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난생 처음 접하는 새로운 발견으로의 초대였다.

 

조엄 일행은 1763년 10월 6일 대마도에 도착해 5일 동안 사스우라에 머물게 된다. 이 때 조엄은 조선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대의 구원투수를 만나게 된다. 바로 고구마였다. 고구마를 처음 본 순간, 조엄은 그것이 구황작물로 이용후생에 가치가 높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는 즉시 고구마의 생태재배법저장법 등을 상세히 탐문하여 기록하고, 고구마 종자를 사서 재배설명서와 함께 부산진으로 보냈다. 이 신(新)작물을 성공적으로 재배, 채종케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뒤 통신사로 일본열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엄은 다시 2차분 씨고구마를 구하고, 재배・저장법까지 얻어서 귀국한다.

 

이때에는 고구마를 대마도와 토속이 비슷한 제주도에 이식시키고자 한 게 주목적이었다. 당시 조엄은 고구마를 제주도에서 성공적으로 재배하게 된다면 제주도민에게 큰 혜택이 돌아가리라고 확신했다. 본토에 양식을 청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점과 나창(羅倉)에서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어려움이 없어질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이 있다.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오기 전에도 숫한 기근이 벌어졌었는데, 그에 대응한 구황작물은 없었던 것일까? 조선 초 구황작물은 야생식물 중에서 식용 가능한 잎・열매・뿌리・껍질을 골라 사용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런 것들도 종래의 지역적・개별적 기근 극복 방법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확대한 것에 불과했다. 조선 초 세종은 야생 초목에서 식용 가능한 식물을 찾아내도록 명했다. 세종 시기 구황작물로 재발견되었던 것은 콩잎팥잎죽실해초송피초실상실황각청근갈근 등이었다. 이들도 쓸만한 구황작물이었지만, 훗날 조엄이 가져온 고구마에 비견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심지어 백토백적토까지 취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식용화할 정도였다. 따라서 조엄의 고구마 도입은 기존의 구황작물 수준을 확연히 뛰어넘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조선 최대의 구황 혁신가 조엄이 당쟁의 피해로 병사한 곳은 귀양지인 경남 김해이다. 하지만 그의 묘는 현재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69-31번지(작동 앞산)에 있다. 문중에서 시신을 운구하여 원주에 이장했기 때문이다. 묘역에는 상석과 촛대 2기, 묘비가 있고, 이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입구 쪽에 신도비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의 묘를 찾아가는 길은 한산하다. 묘를 알리는 색 바랜 표지판만이 한적하게 길가에 보일 뿐이다. 무덤 앞에는 조그마한 절터가 있지만, 파헤쳐져 현재에는 못이 생겼다. 세월의 무심함과 먹거리의 귀함을 잊은 우리의 무관심이 자아낸 결과이다.

 

조엄은 고구마를 조선에 전파하여 일반 백성을 기아에서 구한 일등 공로자였다. 하지만 그를 추모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반면 중국 푸저우에서 류큐 왕국으로 고구마를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노쿠니 쇼칸은 사당을 지어 공적을 추모하고 있고, 1955년에는 고구마 전래 35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고구마를 일본 전국으로 확산시킨 아오키 곤요(靑木昆陽)에게는 도쿄 메구로(目黑) 소재 용천사 경내에 ‘감저선생지묘’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또 고구마를 대마도로 전파한 하라다사부로 우에몽(原田三郞右衛門)에 대해서는 공적비를 쿠하라촌(久原村)에 세우고 그 후손을 사족(士族)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기근에서 구한 조엄에게 돌아간 것은 당쟁에 휘말려 사사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이를 면하고 1년 뒤 유배지 김해에서 생을 마감한 것 밖에는 없다. 혁신가들이 어떤 푸대접을 받았는지 역사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국가적 숙제 구황(救荒)

 

조선시대에는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을 때 급히 메밀과 같은 작물을 대신 파종했다. 이를 대파(代播)라 하고 그 작물을 대파작물(代播作物)이라고 했다. 대파작물로 메밀이 권장된 것은 다른 밭작물보다 성장기간이 훨씬 짧아서 파종에 실패하고 7월 중순에 심더라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왕조에서는 구황식품의 종류로 산야에 자생하는 식물의 잎줄기뿌리나무 열매껍질 등이 주종을 이뤘다. 또 곡식을 가공하고 남은 찌꺼기나 곤충개구리해초 등도 포함되었다. 비상시에 식량대용으로 쓰인 식물과 열매는 뿌리를 먹는 것, 과육을 먹는 것, 종실을 먹는 것, 꽃가루와 꽃잎을 먹는 것, 나무껍질을 먹는 것 등으로 나누어진다. 식물에 따라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보면 소나무도라지칡뿌리도토리토란느릅나무고사리뽕나무복령대나무 열매더덕둥굴레가무태나무찰밥나무 등과 산열매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산야초는 곡물과 섞어서 죽을 쑤어 먹던지, 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며 자체 조리해 먹기도 했다. 구황작물로 송엽과 유피는 조선시대 구황서에 등장하는 유력한 이용대상물이었다. 구황식품을 주식으로 이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가루를 내어 죽을 쑤는 것이었다. 죽으로 끓이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부피가 크게 늘어날 뿐만 아니라 식물의 거친 섬유질을 연화시킬 수 있어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생소한 식품들을 먹기 위한 방법으로 장류로 제조하는 방식도 널리 쓰였다. 죽을 쑤는 방법, 무쳐먹는 방법, 장을 만드는 방법, 끓여먹는 방법 등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구황식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도토리였다. 1419년 호조의 건의를 받아 세종은 실농(失農)한 호(戶)로 하여금 흉년에 대비하여 풀・나무・뿌리 등을 축적하게 하였는데, 이때 주된 것이 도토리였다. 그리고 1424년에는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잔호(殘戶)로 나누어 각각 구황에 쓸 초식을 60석40석20석10석씩 미리 축적하게 하였는데, 이때에도 도토리를 우선적으로 예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도토리가 구황에 요긴한 점은 조선후기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숙종은 1695년 흉년을 만나 구급을 지시하는 교서에서 “흉년이 든 해의 구급에 상실(도토리)보다 좋은 것이 없어 내가 이미 뜻을 두고 궐내의 여러 곳에 분부하여 착실하게 모아두게 하였는데 크게 모으지 못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식용에 이용된 도토리가,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구황에 적당한 구황식품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계속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도토리가 이 땅에서 나는 가장 구하기 쉬운 열매였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이 되면서는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파종하여 경작하게 된다. 고구마는 가뭄과 홍수에 영향을 받지 않고 걸지 않은 땅에서도 잘 자라 기근이 심할 때에는 주식으로 대용할 수 있었다.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온 것은 구황작물로서 활용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명실상부한 구황작물로 도입된 것이었고, 정부의 구황정책과 실질적인 구황효용을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조엄뿐만 아니라 고구마 재배법을 정리한 여러 인물들의 지적에서도 고구마의 구황효과는 절절히 언급되고 있다. 비록 조엄은 일본으로 고구마가 전래된 경로가 중국 난징(南京)이라고 사실과 다르게 소개하고 있지만, 당시 일본 전역은 물론 대마도에서 특히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점은 올바르게 밝혀 두고 있다.

 

고구마 재배법을 정리한 강필리의 ⟪감저보(甘藷譜)⟫는 유중림의 ⟪증보산림정제⟫에 압축되어 수록되어 있다. 유중림은 ⟪증보산림경제⟫에서 조선의 고구마 경작법 정리의 토대가 된 강필리의 ⟪감저보⟫를 수록하면서 초발혁신가들의 노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구황작물의 경작에 관심을 기울여 실질적으로 ⟪산림경제⟫의 증보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증보산림경제⟫⟨감저종식법⟩에는 고구마가 지닌 구황효과를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 물(物)은 수한(水旱) 풍황(風蝗)이 들어도 그 피해를 받지 않고, 병황이나 기근이 일어나도 식량용으로 많이 충당할 수 있다. 농가에서는 한 해라도 종(種)하지 않을 수 없으니 구황에 제일인 즉 진실로 생민의 기산(奇産)이고, 천하의 이물(異物)이다.

 

19세기 초반 ⟪종저보(種藷譜)⟫를 지은 서유구는 구황작물로서 고구마가 지닌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농업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진실로 식구가 여덟 사람인 집에서 무릇 묵혀두고 내버려둔 공지에 고구마를 수십 구 심으면 굶어죽지 않을 것이고 굶주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구마는 구황이라는 당대의 가장 절박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작물로 도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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