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쓰는 글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12. 9. 11. 10:59

지구상 발견, 마침내 조선에 이르다

지구상 발견, 마침내 조선에 이르다

 

조엄의 통신사 일행은 1763년 8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8월 23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포를 출발한 133일 째인 1764년 2월 16일에 일본 에도에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그 첫 일본 기항지가 대마도 북단 사스우라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곳에서 고구마를 처음으로 본 조엄은 이 뛰어난 식량대용 작물을 부산포로 가는 대마도 비선(飛船)편에 즉각 보낸다. 해를 넘기면 재배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재배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후 고구마는 조선 전래 직후부터 조정과 민간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모으며, 종자 보급과 함께 재배법이 상세히 소개된다. 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식물’이라는 최고의 구황작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많은 사람들이 재배・증식・가공법 등을 개발하였고, 서민들은 먹거리 문제에서 적잖은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꿀과 조청 이외에 당분을 얻을 방법이 마땅찮은 터에 이 단맛이 나는 작물은 일반 서민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를 끈 품목이었다. 지금은 간식거리로 애용되지만, 여전히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조엄의 고구마전래는 문익점의 목화전래에 비견할 만큼 획기적인 일이었다. 전파된 지 140여 년간 서민들의 먹거리는 크게 일신되었고, 민생에 크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1900년까지 구황작물로서 고구마의 위상은 굳건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마는 어떻게 해서 대마도에 와서 재배되다가 조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콜럼버스의 지구상 발견이 함께 한다.

 

고구마는 원래 멕시코와 남미가 원산지였다. 1492년 콜럼버스가 탄 산타 마리아호는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 신항로를 탐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인도제도에 당도해 덩이뿌리 식물인 고구마를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다. 콜럼버스 일행은 이 식물을 채집해 스페인으로 귀환할 때 가져간다. 자신이 ‘인도’를 발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물품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탐사대는 고구마뿐만 아니라 감자, 옥수수, 고추, 호박, 당근, 딸기, 땅콩, 강낭콩, 해바라기, 담배, 코코아, 사탕수수 등 다량의 종자를 함께 채취해 와서 스페인에 소개했다. 이후 이 종자들은 서부 유럽에서 처음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때 탐험대가 가지고 간 고구마는 다른 작물과 달리 남부 유럽지역 일부에서만 제한적으로 재배되고 있었다. 감자와 비교해도 가격이 매우 비싼 편이었다.

 

그러다가 1505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게 되는데, 이 때 고구마는 자연스럽게 필리핀으로 전파된다. 선원들이 비상식량용으로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필리핀은 아열대 작물이 많아 고구마는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한다. 그러다 1594년 명나라 상인 진진용이 무역 차 필리핀으로 가게 되어, 거기서 고구마를 보고 중국 남부지방에서 재배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종자를 얻어 푸저우(福州)지방에서 처음으로 재배하게 된다. 고구마 종자는 푸저우지방에 잘 적응하였고, 재배법도 쉽고 수확량도 좋아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다.

 

고구마는 중국 푸저우지방으로 전래 된지 다시 11년 만에 류큐(琉球)로 전파되는데, 류큐왕국 상령왕(尙寧至) 때인 1601년 명나라로 간 사신 노쿠니 쇼칸(野國總管)이 고구마를 보고 식량사정이 어려운 류큐에서 재배하면 백성들의 식량조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해 류큐 오키나와 섬으로 들여 와 처음으로 재배한 것이다. 노쿠니 쇼칸은 류큐국 오키나와섬 차탄(北谷)지방의 노쿠니(野國) 출신이었다. 하층계급 출신인 그가 지방총관이 되고, 또 류큐왕국의 중국사신 진공사(進貢使)로 발탁되어 푸저우로 간 것이다.

 

명나라 책봉사가 류큐왕국으로 온 것은 1599년과 1606년 단 두 차례뿐이었다. 명나라에서 류큐왕국으로 보내는 사신은 해로(海路)가 지극히 위험하여 고위관리를 파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명나라가 하급관리를 책봉사로 뽑은 것은 고위관리를 파견했다가 항해 도중에 사고로 생명을 잃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파견 인력에는 주로 하위 관리를 선발했고, 이들에게는 일품복을 입혔다. 항해는 험난해서 일행은 항해 중 해난사고로 목숨을 잃을 것을 대비해 관을 따로 챙길 정도였다. 그만큼 사행(使行)길은 어려웠다. 당시 류큐왕국의 중앙정부 고위관리는 불과 1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하급관리였던 노쿠니 쇼칸이 발탁된 것이다. 노쿠니 쇼칸은 1599년 명나라 정사인 하자양의 1차 사행에 대한 답례로 류큐왕국이 파견한 진공사였다. 그는 명나라가 건조하여 보내 온 진공선(進貢船)을 타고 1601년 수도 나하항을 떠나 명나라 푸저우로 향했다.

 

4년 후인 1605년 노쿠니 쇼칸은 명나라 푸저우에서 귀국하게 되는데, 그가 가져온 물품 중에 고구마가 있었다. 푸저우지방에서 재배하고 있던 고구마 종자를 얻어서 귀국한 것이다. 그 후 고구마는 류큐에서 지배되기 시작하는데, 류큐는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이라 쌀 생산량이 낮고 대부분 밭농사여서 고구마가 풍토에 잘 맞았다. 게다가 다른 어떤 작물보다도 수확도 많았다. 노쿠니 쇼칸의 고구마 도입 프로젝트는 류큐에서 대히트를 쳤다.

 

1609년 5월 류큐왕국에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친다. 일본 사츠마(薩摩)번주인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3,000명 군사를 동원해 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류큐는 무참히 정복당하고 만다. 왕 이하 100여명의 중신들은 사츠마군의 포로가 되어 가고시마(鹿兒島)로 압송 된다. 이후 슨푸(駿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고, 에도에서 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를 배알한다. 그들은 앞으로 사츠마에 복속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석방되었다. 이것을 ‘시마즈(島津)의 침략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 후 류큐왕국은 사츠마번에 복속되어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비록 종속되었지만 왕정체제는 그대로 존속하였고, 중국과의 책봉・진공관계도 지속됐다. 우리와도 깊은 교역의 역사를 지닌 류큐가 일본 영토로 편입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류큐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던 고구마는 1609년 이후 사츠마번과 류큐 간에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1612년에 사츠마지방으로 전파된다. 처음 이름은 ‘당우(唐芽, 카라이모)’였는데, 지금 일본에서 고구마를 ‘살마우(薩摩芋, 사츠마 이모)’라 부르는 것은 일본 내 재배 지역과 관련이 있다. 규슈 남단 가고시마 지방에서 널리 재배되어 타지방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1615년 들어 사츠마지방에서 재배되던 고구마는 곧 나가사키로 전해졌고, 이후 나가사키에서 다시 간사이(關西)지방으로, 이어 간토(關東)지방으로 전해졌다. 이때가 1716~1735년경이었다. 120여년 만에 비로소 고구마가 일본 전역에 전파된 것이다.

 

고구마가 대마도에 전파된 것은 일본 내 다른 지역보다 이른 편인 1715년이었다. 대마도 쿠하라(久原)에 사는 농부 하라다사부로 우에몽(原田三郞右衛門)이 가고시마에서 구황작물로 고구마가 널리 재배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서 종자를 구하고 재배법을 배워 대마도 내 5곳에서 약 20정보를 심은 것이다. 고구마는 곧 대마도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보리 다음가는 재배작물이 되었다. 그것은 풍토가 열악한 대마도 지세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는 고구마 특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상품성이 뛰어나면, 없던 시장을 열어젖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그만큼 고구마는 다른 어떤 작물보다 경쟁 우위를 지닌 작물이었다.

 

이처럼 남미가 원산지인 고구마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스페인 선원들이 필리핀으로, 명나라 상인 진진용이 푸저우로, 노쿠니 쇼칸이 류큐로, 다시 일본으로 전해져 1716~1735년경에는 사츠마번, 가고시마, 나가사키, 간사이, 간토로 전파되었고 가고시마를 통해 대마도로 전해졌다. 류큐로 전파 된지 120년 만에 규슈와 혼슈 등 일본 남부 여러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되었고,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지고 온지 270년 만에 마침내 조선에까지 온 것이다. 그야말로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우리와 운명적 만남을 이뤄낸 것이다. 나아가 지구상의 대발견이 낳은 놀라운 결과물이었고, 이 새로운 ‘지구촌 시대’는 조선과 일본 간의 크나 큰 변화를 잉태하고 있었다.

 

콜럼버스 대항해의 결과: 감자는 북쪽에서, 고구마는 남쪽에서 

오늘날의 감자는 19세기 초에는 북저(北藷) 또는 마령서(馬鈴薯)라고 불렀는데, 우리나라에는 고구마보다 50~60년이나 늦은 1820~30년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마령서’는 땅속에서 들어 올릴 때 딸려 나오는 모양이 마치 말의 목에 다는 방울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작물도 1492년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진상한 진상품 가운데 하나였는데, 1532년부터 스페인 사람들이 원양항해를 하면서 선내 식량으로 사용하다가 인도에는 16세기, 미국에는 17세기경에 전파되었다. 1645년에는 독일에서 헝가리로, 스위스에는 1654년, 프랑스에는 1714~1724년, 스웨덴에는 1746년경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 감자는 차코닌・솔라닌 등의 독성 때문에 어린 감자를 날로 먹거나 발아한 씨감자를 먹고 죽는 경우가 더러 있어 유럽에서는 더 이상 널리 재배되지 않았다. 그러다 1745년 이후 독일에서 흉년이 계속되자 다시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1601년에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재배하던 것을 네덜란드 상선이 나가사키 데지마(出島)로 전래했다. 처음에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다가 1683년 대기근 때에서야 비로소 식용으로 재배되었다. 따라서 발견 후 일본 전래에 110여년이 소요된 셈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1824~25년에 함경도 명천 사는 김씨라는 사람이 북쪽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과 또 “청나라 사람이 인삼을 몰래 캐가려고 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을 수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설로 미루어 보면 인도에서 중국대륙으로 전파된 것이 다시 만주지방을 거쳐 19세기 초에 우리나라 북부지방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감저경장설(甘諸耕藏說)⟫에는 1830년(순조 30) 신종민이 북관육진 국경지대에서 몇 알을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감자는 1820~30년대 북쪽지방으로 전래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구마와 같이 남미 원산인 감자는 스페인 선원들이 선내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 인도로 전파되어, 다시 중국대륙과 만주지방을 거쳐 우리나라 북부지방으로 전래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감자는 콜럼버스 발견 후 조선 전래에 대략 330여년이 걸렸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감자는 한・냉성 기후조건에 맞는 관북・관서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고, 고구마는 아열대작물이라 남부지방에서만 확산되었다.

 

한편, 1832년 조선에 통상 요구 차 영국 상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호가 7월 17일(양력)부터 8월 17일까지 1개월간 서해안 도서지방에 나타났다. 이 상선에는 신교 선교사 규츠라프가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는 중국에서 한문을 배워 필담이 가능했다. 그는 서해안 고대도・불모도・대원도・간월도 등의 해변주민들을 만나 성서와 함께 감자 종자를 전하면서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외국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는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과 배가 떠나고 난 후에 파헤쳐지는 일로 인해 이때 조선으로의 전파는 실패했다. 그가 조선에 종자용으로 가지고 온 것이 감자인지 고구마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로드 암허스트 호는 영국에서 중국 톈진으로 왔고 규츠라프도 톈진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으니, 아열대성 작물인 고구마일 가능성보다는 당시 영국 원양항해선 선원들이 보조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던 감자(마령서)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에 고구마가 전래된 이래로 크게 번성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 남부지방에서 주식을 대용할 마땅한 작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농민이나 어민들이 야산이나 다른 작물을 재배하지 못하는 곳에 쉽게 경작이 가능했고 수확량이 좋았으며 장기적으로 저장할 수 있어, 쌀이나 보리가 떨어지는 춘궁기에 주식으로 대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대항해와 함께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재배된 고구마, 감자, 옥수수, 고추, 호박, 당근, 딸기, 땅콩, 강낭콩, 해바라기, 담배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농작물 ‘베스트 11 신상품’이었고, 지금도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농산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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