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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흐름을 갈아타는 성공의 법칙

by 전경일 2013. 4. 24.

흐름을 갈아타는 성공의 법칙

 

전시 경제에서 어물을 취급하며 쏠쏠한 재미를 보았지만, 구인회는 1941년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어물 거래에도 한계를 느낀다. 전쟁으로 시국이 불안해지자 구인회는 뭔가 바뀌지 않을 것, 닳아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을 급히 찾게 된다. 그것은 토지투자였다.

 

LG 기업사를 보면 징검다리를 건너뛰는 듯 결정적 전환점이 종종 나타나곤 하는데 바로 이때가 그런 상황이었다. 놀라운 점은 하늘이 매번 구인회의 선택을 돕는다는 것이다. 그가 재물 복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냉철한 판단력과 실행력 덕분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다. 구인회만의 긍정적 사고와 도전 정신은 그가 지닌 인간미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들과 만나 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구인회가 예금에서 토지로 갈아 탄 것은 초기 자본 축적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단계이자 시도였다.

 

일단 결심이 서자, 구인회는 식산은행 진주지점에 예금해 둔 40만 원을 인출 한 뒤 일가족과 직원들을 풀어 진양을 중심으로 하동, 고성 등지의 농토를 사들인다. 300석지기 땅 문서로 융자를 받아 사업한지 몇 해만에 구인회는 허씨 집안처럼 만석꾼이 된 것이다.

 

구인회 상회는 이익이 날 때마다 조금씩 땅을 사두기는 했지만, 이때에는 모든 예금을 올인 하듯 일시에 진양, 의령, 함안, 고성 등지의 토지에 투자한다. 구인회에게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무렵 사들인 전답을 보면, 대략 평당 25전에 50만 엔을 들여 2백만 평의 논을 장만한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만주사변 시 전시 특수 경기로 광목을 팔아 번 돈으로 40만 평의 땅을 사들였으니 불과 4년 만에 5배의 토지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로서 구인회는 토지에서 장사로, 장사에서 다시 토지로 돌아오는 사업상의 한 주기를 넘게 된다.

 

구인회가 취한 결정은 일제하 한국 기업가들의 창업기 선택과 거의 같다. 이들의 치부를 보면 운과 함께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안목이 크게 작용해 이후 부의 향방을 좌우한다. 경성방직을 만들고, 동아일보사를 설립한 김성수의 양부 김경중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누구보다 시대의 흐름을 읽는 눈이 빠르고 정확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곡가가 치솟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현금으로 토지를 매입할 것을 권유하지만 김경중은 이를 무시한 채 서울의 일본 제일은행에 계속 예금만 한다. 이는 물가변동의 순환 원리를 ‘물귀즉천 물천즉귀(物貴則賤 物賤則貴)’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물건이 귀하면 다시 천해지고, 천하면 다시 귀해지는 전시 인플레이션 법칙이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18년 말 전쟁이 끝나면서 물가폭락 사태가 벌어지자, 김경중은 은행예금을 찾아 도산한 이들의 토지를 매입한 결과, 같은 돈으로 4배 가까운 토지를 매입한다. 이런 예측으로 김경중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200석(10정보)의 토지를 1만 8천 석으로, 100배 가까이 불렸다. 김성수는 사업 확대의 주요 자금원을 이렇게 얻게 된다.

 

전시경제에 대한 감각은 이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 급변하는 시기에 삼성의 이병철도 토지에서 시작한 부를 상업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토지로 갈아타며 부를 굳건히 지켰다. 위기를 통해 자산을 솜처럼 불렸다. 시대를 불문하고 변화시기가 부의 탄생 시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멀리 내다보면서 무리 없이 합리적으로 재산을 지킨 구인회의 부의 철학은 창업과 수성을 동시에 교묘하게 엮은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버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금주의 사고는 부의 증식의 가장 명확한 원칙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런 판단이 함께 했기에 구인회는 훗날 대기업가로서 성장한다. 구인회식 갈아타기는 숫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훗날 LG를 기약하는 초석이 된다.

 

그런데 구인회의 갈아타기식 부(富)의 유지 전략이 작동되고 있을 때, 머잖아 '락희(樂喜, 럭키)'의 창업 멤버들이 되는 식솔들은 무었을 하고 있었을까?

 

우선 첫째동생 구철회는 형과 함께 포목점을 든든히 지키고 있었고, 둘째 동생 구정회는 39년 봄에 동양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남도청 토목과에 근무하다가 41년 7월부터 구인 상회에 참여했다. 셋째동생 구태회(1923년생)는 일본 복강고교를 거처 동경제대에 다니다가 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에 파견되어 있었다. 장남 구자경은 44년 3월에 진주고보 5학년을 졸업하고 징집을 면하기 위해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정 1년을 수료한 뒤 45년 4월부터 지수보통학교 교사로 일했고, 같은 달에 넷째 동생 구평회는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였다. 가족 모두 훗날 LG그룹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한 각자의 발전단계를 꾸준히 밟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2004년 그룹 분리 전까지 LG를 있게 한 새롭고 강력한 파트너로서 허씨 사람들은 곧 다가올 대격변기와 함께 출연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슬슬 몸을 풀고 있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