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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LG,GS동업비결_구씨,허씨이야기

사람이 들끓는 곳, 새로운 기회와 시련

by 전경일 2013. 5. 6.

사람이 들끓는 곳, 새로운 기회와 시련

 

항도 부산은 인산인해로 들끓었다. 해방으로 귀국 동포가 쏟아져 들어오고 미군 진주로 북적이며 경제는 꿈틀대는 생물처럼 생존과 미래의 웅비를 위해 거친 숨결을 몰아쉬고 있었다. 부산을 한 달 만에 다녀온 구인회는 바로 농토를 매각해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다. 우선 서대신동에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구입하고 이사한 뒤 그 해 11월에 조선흥업사(朝鮮興業社)라는 무역회사 간판을 내건다.

 

이 무렵, 구인회의 부 획득 방식은 타 그룹과 사뭇 대조된다. 이는 LG가 자랑스러워하는 점이다. 한국의 많은 재벌기업들이 일제가 남기고 간 2천5백 개 이상의 공장과 기업체, 부동산 및 전국토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토지 등 전체 16만6천3백건의 적산(敵産)을 헐값에 인수하며 대기업 반열에 들게 된 것과 전혀 다르다. 대신, 구인회는 기업가적 마인드로 사업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킨다.

 

당시 귀속 재산 불하가 얼마나 막대한 혜택이었는지는 다음에 잘 나타나 있다.

 

"일제로부터 인수받은 몇몇 대규모업체는 그 관리를 정부부서에서 맡았다. 전력, 철도, 체신, 연초, 석탄 분야가 주로 해당된다. 일부 업체는 한국 기업인에게 할애되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미군정관재청에 맡겨진다. 관재청은 한국 관리인들에게 그 운영 책임을 위임했다. 1948년 1월에 발표된 이들 귀속재산에 관한 공식 보고에 따르면 '귀속재산의 상태를 확인 유지 및 궁극적인 처분 준비는 이에 수립된 절차와 계획에 따라 1월 중에도 일률적이고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된"것으로 나타난다. 1월말 현재를 보면, "귀속기업체이거나 혹은 과거 귀속기업체의 20 퍼센트 정도가 일부분 또는 완전 가동되고" 있었다.

 

"귀속 재산 불하 과정에서 미 군정청은 이 전(前) 재산소유권을 증명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법적인 노력을 함은 물론, 각종 압력을 받는 등 온갖 수단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그 무렵 귀속 재산은 어떤 조건으로 특정인에게 불하되었을까?

 

"귀속재산의 불하는 불하가격이 부당하고 저렴했을 뿐 아니라 그 대금조차 장기 저리로 융자해 주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나아가서 정부가 각종 특혜를 부여하였기 때문에 운이 좋은 소수 인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부당이익을 안겨주는 셈이 되었다."

 

이후 한국경제를 멍들게 하는 정경유착의 고리는 이때 생겨난다. 많은 기업들이 이런 유착의 결과로 부를 획득하게 되지만, 이런 불하 과정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회사가 LG였다. LG는 창업자 구인회의 R&D와 사업 수완이 초기 자본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여느 재벌기업들과 분명히 선을 긋는 차별점이다. 이에 대해 『LG 50년사』는 자부심에 넘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25 전쟁 이후 산업 시설의 45 퍼센트 이상이 파괴된 가운데서도 LG는 화장품에 이어 국내 최초로 합성수지공업에 도전하여 값싸고 편리한 플라스틱용품을 공급하고 생활문화를 변화시켰다. 금성사를 설립하여 황폐한 이 땅에 전자산업을 일으켰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이승만 부로부터 헐값에 불하를 받았던, 그리고 제분, 제당 등 손쉬운 산업에 안주하던 다른 기업과는 차별화하였다."

 

이처럼 한국 재계는 6.25 전후 악성 인플레이션 과정에서 귀속재산의 불하를 통해 엄청난 이권을 거머쥐며 일어난다. 그 대금조차 감면ㆍ면제되거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며 공짜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해방이 되고 구인회가 처음으로 손을 댄 사업은 무역업이었다. 그는 격변기에 왜 무역업에 손을 댔을까? 우선, 해방공간에서 생필품 수요가 많을 것이라는 예측이 주효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무역업은 제조업보다 사업에 많은 이점이 있다. 토지나 기계와 같은 고정설비가 들지 않았고, 허가만 받으면 맨 주먹으로도 사업을 벌여 일확천금을 벌 수 있었다. 구인회로서는 당연히 군침이 돌았다.

 

일본 업체와의 직거래를 통해 마진 확보도 쉬었으므로 구미가 당겼다. 더구나 일제가 물러간 마당에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미 군정청과 거래를 트는 일도 향후 사업 전개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로 인식됐다. 무역업은 이런 계산을 꼽아보는 구인회에게 마땅히 처음 시작해야 할 사업으로 부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시대의 흐름에 대한 판단에 따라 구인회는 우선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업 허가 제 1호 업체로 조선흥업사를 세운다. 이 시기는 구인회의 사업 인생에서 매우 큰 전환점이 되는데, 그가 소상인적 지주 기업가에서 근대적 기업가로 도약하는 시점이 된다는 것이다. 뼛속까지 바꾸는 변신과 환골탈태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특이한 점은 훗날 한국 재계를 형성하는 거부들의 경우 대부분이 지주출신 기업가였다는 점이다. 관료출신의 기업가들이 벌인 사업이 전부 실패로 돌아간 것과 달리 지주형 기업가들은 대부분 성공한다. 그 배경은 전환기에 현금 조달 능력과 함께 일제 강점기 때 불리한 사업 환경에서도 일본인들과 경쟁해 온 생존 경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무엇을 무역할까 고민하는 구인회의 눈에 띈 것은 숯이었다. 해방이 되자 '숯'이 품귀였고, 적산가옥이 늘어선 부산은 일본식 다다미방에 많아 숯의 수요가 크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생각과 실행의 시차가 거의 없는 구인회는 곧 대마도산 목탄 무역에 뛰어들게 된다. 숯을 생각하게 된 것은 주요연료로 음식점 등에 숯을 들이대는 업자들이 많았지만, 정작 수요를 못 따라 간다는 점과 대마도에는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분석 때문이었다.

 

큰 기대를 갖고 첫배를 띄웠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배는 대마도로 향한 것이 아니라 풍랑으로 인해 후꾸오까(福岡)에 도착하게 된다. 구인회는 어쨌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곳을 이리저리 탐색한다. 전후 일본에서 가져올 만한 것으로는 농기구 밖에 없어 구인회는 그것을 사다가 미군정에서 수입면허장을 얻어서 팔게 된다. 그러나 예상 외로 재미를 보지 못한다. 그때 이런 즉흥적이고 대책 없는 사업에 대해 구인회는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은 안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뒤로 마음과 달리 사업상 실책이 연이어져 기업가 구인회에게는 한없는 슬럼프 시기가 찾아온다. 무역업의 뒤를 이어 자동차 운수업이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 인수한 자동차 사업에서도 그는 그대로 손해를 봤다. 그는 직원들에게 돈 한 푼 받지 않고 자동차를 다 줘 버리는 것으로 사업을 접어 버렸다.

 

기업가 구인회의 일생에서 힘만 들이고 허탕 친 사업의 예를 들라면 대표적으로 이 두 개를 꼽을 수 있다. 사업이란 무작정 '이게 안 되면 저거라도' 하는 식의 임기응변적 대응으로는 실익이 없다는 점과, '남이 한다고 내가 하는 건 아니다.'라는 교훈을 그 무렵 구인회는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LG가 자동차사업에 손을 댄 것도 회사 역사상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동차 사업이 그룹 체질에 맞지 않은 것도 작용했지만, 첫 시도에서 호되게 당했던 게 나중에도 기피 사업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