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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초발확산을 부르는 힘

by 전경일 2013. 7. 5.

초발확산을 부르는 힘

 

과거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갑자기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경우가 있다. 심연의 어떤 지점에서 변화가 일고 있다가 이를 발화시키는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갑자기 대유행이 되곤 한다. 사람들의 인식이 확 변하는 순간과 새로운 상품이 지닌 강한 선도성이 고객 니즈와 맞아 떨어지며 히트상품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에서 포도주는 인기 없던 술인데 갑자기 누군가 포도주에 함유된 ‘포리페놀’이 좋다고 하자,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누보와인’(Nouveau햇포도로 담근 포도주)이 한때 대인기를 끈 적이 있다. 숙성 안 된 햇포도주로 사람들이 몰린 데에는 맛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어떤 숨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마케팅은 이 같은 고객의 인식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

 

이렇듯 어떤 상품이나 관심이 발화되는 데에는 특정 계기가 있는데, 이것을 ‘소지(素地)’라고 한다. ‘본래 바탕’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새롭게 생겨나는 상품과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등은 이전에 일어난 어떤 현상, 행위, 제품, 사건 등으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산되어 가는 면이 있다. 물론 이런 변화의 동력은 그 시기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가 주도하는 면이 크다. 나아가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작지만 매우 구체적인 초발혁신의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기술개발이나 히트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신의 기초가 되는 ‘소지’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은 유효성 있는 혁신활동의 원천이 된다. 가능성 있는 혁신은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 제품, 실험, 소스, 시도, 실패, 노력 등이 깔려야 한다는 얘기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나 최무선의 화약·화포 제작, 조엄이 가져온 씨고구마 등은 이후 생활 전반을 바꾼 ‘소지’인 셈이다. 이런 것들이 강한 발화력으로 초발혁신을 이끈다.

 

고려 말 화약·화포는 왜구의 침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왜구 격퇴에 결정적으로 쓰인 신무기이다. 고려가 화약을 알게 된 것은 원나라 군사가 고려군과 함께 일본을 정벌할 당시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는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을 때로 보인다. 그 후 고려에서 왜구가 나날이 창궐하자, 고려 조정은 왜구를 물리치는 전략무기의 일환으로 화약을 제조할 것을 결정하고 개발에 나선다. 이때 화약제조에 성공한 이가 최무선이다. 이 점을《고려사》우왕 3년 조는 잘 보여주고 있다.

 

10월에 비로소 화통도감(火㷁都監)을 두니 판사 최무선의 말을 좇은 것이었다. 무선이 원의 염초장 이원(李元)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잘 대우하고 가만히 그 기술을 물어서 가동교인(家僮敎人)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며 시험해 보고 드디어 건일(建日)하여 두게 한 것이었다.

 

신예무기인 화약과 화포는 급속도로 발전해 근 20종에 이르는 화기가 제조된다. 또한 화력도 놀랄 정도로 향상된다. 이에 따라 화기를 다루는 전문부대인 화통방사군(火熥放射軍)이 새로 편성되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화약·화포를 제조하고 전문특수부대가 편성돼 실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1380년의 진포전투와 정지가 남해에서 화포를 사용해 왜구를 크게 무찌른 관음포 대첩은 이렇듯 전략 무기의 우위가 작용한다. 그렇다면 화약과 화포를 만든 이는 최무선이고,《고려사》에 나오는 가동교인(家僮敎人)은 누구를 말함일까? ‘최씨 집안의 어린 사람들로 화약제작법을 배운 사람들’이란 뜻으로, 이들의 존재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야말로 지식가치를 결정적으로 확산시킨 초발확산자의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이다. 지식을 승계하고 이를 확산시켜 나간 주역인 것이다.1)

 

문익점이 목화씨 도입·확산과 함께 직기 개발, 나아가 무명 짜기에 모든 노력을 다할 때에도 초발확산자들은 등장한다. 목화는 섬유 특성상 식물에 맞는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다. 기술혁신과 관련되어 직조 과정에서 장인 정천익의 집에 중국인 승려 홍원(弘願)이 유숙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무명짜기 기술과 기구 만드는 법을 상세히 배운 사람은 그 집 여종[家婢]이었다. 이 집 여종은 홍원으로부터 조직술(繰織術), 장비도구[機具] 조작법을 배워 처음으로 무명베 1필을 짰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무명을 짠 사람이다. 중국에서는 송말원초에 해남도(海南道) 애주(厓州)에 사는 윤락녀 황해파(黃海婆)가 궁핍한 생활을 개선하고자 방직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면업의 태동은 그녀가 만든 직기들이 널리 보급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최무선의 화포・화약 제조 시 이를 전수받은 가동교인이나 문익점의 목화씨 도입 시 최초로 무명베를 짠 여종 등은 조엄 이후 강필리와 강계현, 이광려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초기 확산의 주체로서 고구마를 전국적으로 재배할 수 있게 한 인물들이다. 조엄-강필리의 고구마 프로젝트는 이들을 만나며 전국적 프로젝트로 승화되는 것이다.

 

조엄식 혁신법은 오늘날 새롭게 해석해 볼 수 있다. 핵심사업 정의 분석법을 적용해 보면 보다 뚜렷해진다. 조엄의 고구마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

 

1. 예상되는 산업 격변과 변화에 대한 입장 정리(기존 구황작물로는 한계가 있다.)

2. 기존 사업의 현주소 진단(현재의 정부 정책만으로는 구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3. 2단계를 통해 정의한 출발점(Point of Departure)을 기준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지향점(Point of Arrival)에 대한 일련의 정의(획기적인 먹거리 혁명이 필요하다.)

4. 숨은 자산 발굴(고구마가 대안이 될 수 있다.)

5. 대안을 위한 연구적 분석(고구마 씨종자와 관련 자료 및 이를 실행할 초발확산자들의

헌신적 활동이 요구된다.)

6. 사전에 합의된 기준을 바탕으로 대안평가(강필리가 재배, 보급의 핵심대안 인력이 될

수 있다.)

7. 전력을 다해 조직을 준비체제로 이끌어 감(고구마 씨종자를 제주도로 보내서 전국적

확산을 꾀해야 한다. 재배연구서의 확장성을 이끌어 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확산 모델은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선 혁신의 주체이자 혁신을 주도한 사람들과, 이를 외면한 사람들을 살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먼저 혁신을 외면한 사람부터 살펴보자.

 

 

1)

⟪태조실록⟫ 4년 4월 19일 최무선 졸기에 의하면, ‘(최)무선은 항상 중국 강남(江南)에서 오는 상인이 있

으면 곧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 어떤 상인 한 사람이 대강 안다고 대답하므로, 자기 집에 데려다가

의복과 음식을 주고 수십 일 동안 물어서 대강 요령을 얻은 뒤,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고 하며 험담까지 하였다. 여러 해를 두고 헌의(獻議)하여 마침내 성의가 감

동되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고 무선을 제조(提調)로 삼아 마침내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아들이 있으

니 최해산(崔海山)이다. 무선이 임종할 때에 책 한 권을 그 부인에게 주고 부탁하기를,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 책

을 주라”하였다. 부인이 잘 감추어 두었다가 해산의 나이 15세에 약간 글자를 알게 되어 내어주니, 곧 화약을 만

드는 법이었다. 해산이 그 법을 배워서 조정에 쓰이게 되어, 지금 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 있다’고 하여 아들에

게 화약제조 비법을 완결된 지식서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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