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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혁신을 외면한 사람들

by 전경일 2013. 7. 26.

혁신을 외면한 사람들

 

조엄이 1763년 10월 중순 경 대마도 사스우라에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 부산진 첨사 이응혁에게 급히 보낸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종자를 받은 그는 이듬 해 봄에 처음으로 파종했지만, 파종과 관련해 특별한 재배 관련 자료를 남긴 것은 아니다. 반면에, 후일 부임하는 강필리는 이전 첨사가 진행한 프로젝트를 맡아 끝까지 수행하며 구체적인 임상 자료를 남긴다. 이 점은 두 사람이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혁신가와 그렇지 못한 자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게 된다.

 

1763년 이응혁은 이미 통신사 일원으로 발탁된 바 있다. 1차 정사 지명자인 서명응이 그를 사행단의 군관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응혁은 사행단에 드는 것을 거부했다. 이응혁이 사행단 참가를 거부한 이유는 통신사행이 고행길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현직급보다 한 직급 낮은 직책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왕명을 거역한 죄로 이응혁은 호남바닷가 충군(充軍)으로 좌천되어갈 위기에 놓인다. 그 무렵 친구 아들의 구명을 도운 조엄은 이 일을 ⟪해사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삼사(三使)의 수역(首譯, 통역)이 상상관(上上官, 수석 통역)인데, 군관은 상관(上官) 직급이라 왜인들이 부영대장(釜營大將)이라고 부르는 부산진 첨사가 수역보다 하급직에 있게 되면 초량왜관과 왜인들이 우습게보게 되니 발령을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으나 서명응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 날 국왕에게 진소하여 이를 철회시킨 바 있다.

 

정사로 임면된 서명응이 이응혁의 사행 거부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자 영조는 노했다.

 

그가 꾀를 내어 동행하지 않는다!

 

이응혁이 충군으로 좌천될 위기에 놓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시 조엄이 이응혁을 구하고자 한 것은 친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변방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엄은 동래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바 있어, 초량왜관의 왜인들이 조선을 우습게 보는 상황을 알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조엄 덕분에 파직을 면한 이응혁은 이후 승승장구하여 1774년에는 충청수사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이응혁의 구명활동에는 조엄의 힘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런 연유로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조엄이 고구마 종자와 재배법을 전해 주었을 때 이응혁이 시험재배에 정성을 쏟지 않았을 리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프로젝트에 임하는 태도이다. 철저한 기록정신을 발휘해 원천지식을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추가해, 지적 영향을 미친 강필리의 실천적 노력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었다.

 

많은 조직에서 업무를 수행하다보면 남이 하던 걸 물려받았으니까, 내가 벌린 일이 아니니까, 별 다른 성과가 날 것 같지 않으니까 등으로 해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렇게 방관된 일들은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온다. 누가 벌렸건, 구원투수처럼 잘 마무리 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더구나 굶어 죽어가는 조선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면, 고구마를 앞에 두고 잠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참된 목민관이라면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거두어 먹일 생각에 빠져들었을 게 분명하다.

 

조엄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이응혁은 재배 적지로 절영도 봉래산 동쪽 해안가 양지바른 구릉지대를 선택했다. 절영도는 부산진 첨사의 관할구역으로, 인가(人家)도 거의 없고 목마장 관리인과 해안경비 수군들만이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비에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이곳은 바다 건너 대마도와 토양이나 기후 면에서 유사했다. 고구마가 조선 첫 도착지인 부산에서 재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처럼 지리적, 환경적, 관계적 측면이 작용한다. 나아가 대마도나 절영도와 같은 조건으로 조엄은 이미 표류하던 제주도민들을 통해 제주도의 토질을 알고 그곳을 2차 확산지로 꼽고 있다.

 

동래에 심은 것이 만약 넝쿨이 잘 뻗는다면 제주와 다른 섬에 재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들으니 제주의 토성이 마도(馬島)와 많이 닮은듯 하다고 하니 그 감저가 과연 잘 번성한다면 제주도민이 해마다 손을 벌리는 것과 나주창의 환곡선을 띄워 곡식을 운반하는 폐단을 거의 제거할 수 있겠다.

 

1764년 6월 귀국길에 오른 조엄은 2차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다. 이때는 수량도 많았거니와,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동래부에 직접 전달했다. 아울러 사행 중에 일본에서 자세히 수집한 보관법, 재배법, 증식법 등 기술적인 자료도 전해주었다.

 

절영도에 심은 고구마는 얇고 붉은 색을 띄며 약간 작으면서도 그 맛이 밤 맛과 흡사해 인기가 높아, 유명한 품종이 되었다. 그러자 일제강점기에는 대마도 상인들이 구입해 다시 대마도로 가지고 가 재배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마치 기술이나 상품이 수출하는 나라에 다시 역수출되는 것과 같았다.

 

절영도에서 첫 재배에 성공한 ‘조내기 고구마’는 이후 다대포와 타 부산지역으로도 급속히 퍼져나갔다. 남도지방은 가장 크고 빠른 고구마 수혜처였다. 재배지역이 타 지방으로 확대될 때 조엄과 강필리가 만들어 낸 지식도 함께 전달되었다. 지식을 받은 해당 지역에서는 자체적으로 이를 업그레이드 해 나갔다. ‘고구마 지식’ 빅뱅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