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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엄: 조선의 먹거리 혁명

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by 전경일 2014. 6. 10.

초발확산가들의 무한 지식경영

 

주지했다시피 고구마의 최초 전래자는 조엄이다. 하지만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인물은 강필리와 이광려, 김장순 같은 이들이다. 특히 강필리는 1764년 8월 동래부사로 부임해 온 뒤 조엄이 6월에 2차로 전달한 종자를 받아 보관하는 한편, 조엄의 요청에 따라 일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이때 종자와 함께 조엄이 보낸 재배법 자료는 구황 작물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강필리가 편찬한 ⟪강씨감저보⟫는 1764년 조엄이 대마도와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를 보완해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부산진 첨사 이응혁이 절영도에서 시험 재배한 경험도 반영되었을 여지가 있다. 강필리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조선에서 처음으로 재배하는 고구마 종자는 각 지방으로 전해지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재배법과 함께 보급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강씨감저보⟫는 서책이 아니라 필사본으로 전해왔다. 이 원천 자료를 근간으로 고구마 지식은 이후 급속도로 확장되는데, 50여년이 지난 1813년에는 김장순(金長淳)과 전남 보성의 주민 선종한(宣宗漢)이 9년간 고구마를 재배하며 연구한 끝에 ⟪감저신보(甘藷新譜)⟫를 펴냈다. 1805년에는 이광려가 ⟪이참봉집(李參奉集)⟫을, 1813년에는 서경창이 ⟪종저방(種藷方)⟫을, 1834년에는 서유구가 ⟪종저보(種藷譜)⟫를, 조엄의 손자 조인영이 ⟪운석유고(雲石遺稿)⟫를 내놨다. 조선 각지에서는 고구마 육종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고, 좋은 상품을 더욱 좋게 만들려는 노력들이 붐을 이루며 릴레이 현상처럼 퍼져나갔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자발적 참여와 지식증강이 자연스럽게 누적된 효과였다.

 

이광려와 강계현 팀

1763년 10월 중순 고구마 종자가 부산포에 도착한 직후 이 새로운 작물은 금방 입소문을 탔다. 고구마 종자를 가져온 지 불과 7개월 만에 정보는 금방 퍼져나갔다. 신생 작물이 지닌 강력한 소구력, 상품성, 구황식물 대체 가능성이 불러 온 열풍이었다. 원천 종자를 구하기 위해 초기 확산자들은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모여 들었다.

 

이광려가 지은 ⟪이참봉집⟫에는 이광려와 강계현이 고구마 종자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뛴 내용이 나온다. 일본을 통해 조선에 고구마가 도입・보급되는 과정은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한 갈래는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구매해 동래로 보낸 과정과, 다른 하나는 조엄이 구해온 고구마 종자를 이광려가 취득해 전파시키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고구마 종자를 국내에 전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광려는 누구였을까?

 

그는 조선 후기 양명학의 수용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천거를 받아 참봉 벼슬을 했다. 연암 박지원(朴趾源)과도 교의가 두터웠다. 그의 아버지 이진수는 양명학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1725년 이진수가 평안도 선천에 유배되었을 때 그 밑에서 학문을 배운 계덕해라는 인물은 이진수가 지행합일의 양명학 기본 논지를 적극 실천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광려가 고구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실리에 바탕을 둔 학문에 관심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그는 중국 서광계의 ⟪농정대전⟫을 보고 고구마에 관한 사전 지식을 얻고 있었다.

 

1762년 인척인 서지수(徐之修)가 호조판서로 연경으로 가는 사신단에 참여하게 되자 이광려는 편지를 보내 종자를 구해줄 것을 수차례 부탁한다. 이는 조엄이 일본에 통신정사로 가게 된 것보다 1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때 이미 이광려는 고구마를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광려가 고구마를 도입하고자 한 것은 “백성들의 기아를 면하게 하고, 도적을 그치게 하며, 백폐(百弊)를 모두 해소할 수 있는 방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식량 문제 해결을 통해 사회적・제도적 문제까지 해결하려한, 성장 엔진을 가동시켜 조선이 처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서지수는 연경을 다녀오면서 종자를 구해서 돌아오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가져오는 도중에 모두 고사해 버리고 만다.

 

이후 이광려는 1763년 친구의 아들이 조엄의 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가게 되자 고구마 종자를 구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1년 전의 실패에 실망하지 않고 왜관(倭館)이 있는 부산포나 동래에 가면 종자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궁리한다. 그러던 1764년 봄, 그는 집의 식객인 강계현에게 통신사 일행이 고구마 종자를 구할지 확신할 수가 없고 혹여 고구마가 동래와 부산지역에 전파된 게 있지 않을까 하는데 다녀올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자 강계현은 선뜻 다녀오겠다고 나선다. 고구마 종자를 구하기 위해 강계현이 길을 나선 것은 1764년 4월이었다. 강계현은 이광려의 친구가 부사로 근무하는 밀양으로 소개장을 가지고 갔으나 구하지 못하고 다시 동래로 갔다. 동래에서도 종자는 구할 수 없었다. 동래와 부산지역에 고구마가 전래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통신사 일행이 귀국하여 밀양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강계현은 당시 밀양현 하급관원인 김인대를 만나 조엄 사행단 일행에게서 종자 하나를 얻어 나무 궤에 담아 돌아온다. 이때 강계현이 얻은 고구마 종자는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구해 온 것이었다. 조엄이 수행원 중 밀양으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종자를 확산시키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광려는 어렵사리 구한 고구마 종자를 서울에 있는 자신의 집 앞 공터에 심었는데 8~9월이 되어 잎이 매우 무성하게 나면서 거의 몇 보의 땅을 뒤덮게 되었다. 이광려는 이웃사람의 친척으로 새로 동래부사에 임명된 강필리에게 고구마의 일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그런데 이광려가 재배한 이 고구마는 제대로 보관을 하지 못한 탓에 다음해에 종자로 쓸 수 없게 된다. 증식에 실패한 것이다.

 

한편 동래부사 강필리는 이광려의 편지를 받고 다음해인 1765년 고구마 종자 증식에 성공해 서울에 있는 자신의 본가에 고구마 종자를 다량으로 실어 보낸다. 이 종자는 조엄이 2차로 가지고 온 종자를 동래부에서 증식한 1세대 조선 고구마였다. 이에 이광려는 강필리의 집에서 고구마 종자 몇 개를 이듬해 다시 얻어 심었다. 이광려와 강필리가 각각 서울과 동래에서 고구마 증식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때가 바로 고구마가 온 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한 1766년이다. 실학자 서유구도 본격적으로 조선에 고구마 종자가 보급된 해를 이 때로 보고 있다. 이 해를 보급기로 보는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사고하는데서 연유한다. 이때 이광려가 강계현을 통하거나 직접 종자를 구하기 위해 뛰었던 것은 개인적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서울에서도 이미 고구마가 진미라는 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의 보급은 1765년이지만, 조엄이 1763년(1차)과 1764(2차)년에 가져온 고구마 종자는 이때 이미 영남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강필리는 경험을 바탕으로 재배법의 일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혁신가의 혁신 계승이 단절의 위기를 맞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강필리의 동생인 강필교가 쓴 ⟪감저보⟫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아, 공(강필리)이 세상을 떠남에 고구마 종자 역시 끊어졌다. 백성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려고 했던 공의 생각이 끝내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에 가장(家藏)되어 있던 ⟪저보(藷譜)⟫까지 분실하였고, 경성(京城) 여러 곳에 심었던 감저 또한 모두 단절되고 말았다. 소문에 영호남 사이에 더러 고구마가 있다고 하지만 멀어서 구해보지 못하였다.

 

이 점은 혁신이 지속적인 노력을 전제로 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즉, 혁신관리 역량이 혁신을 계승하고 발전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이광려의 역할이다. 그는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당시,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고 일찍부터 책을 통해 고구마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조엄이 가지고 들어온 고구마로 재배에 착수했지만 기술이 부족해 실패하게 되는데, 이 같은 시도는 오히려 동래부사 강필리를 자극해 고구마 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한 밑바탕이 된다. 프로젝트는 실패했어도, 다른 사람의 성공을 고무시킨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그리하여 조엄, 이광려, 강필리, 강필교 등 일부 관인, 사족 층의 노력에 힘입어 고구마는 18세기 후반을 거치며 본격적으로 재배 지역이 확대된다. 애초에 고구마가 도입된 지역이었던 동래, 부산 등 영남 남해안 지역으로부터 퍼져나가며 점차 북상하였다. 이는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목화씨가 진양(산청)을 거점으로 삼남지역 일대로 확산되어 가다가 북상했던 것과 같은 양태를 보이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때 고구마 재배 확대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실제 고구마를 경작한 농민들이라는 점이다. 이 점 역시 목화씨가 진양 주변 마을사람들의 손을 빌어 삼남지방으로 퍼지다가 전국 각처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과 같다. 그리하여 목화는 채종에 성공한 지 채 10년도 못 되어 황해도,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점차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고구마의 경우, 앞서 ⟪강저보⟫의 서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전라도 부안 지역까지 재배지가 확산되는 과정은 강필리의 재배법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실제 경작 과정에서 확보된 경험과 기술이 그대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민간의 지식이 쌓이며 테스트베드형 현장이 아닌, 생생한 생산 현장으로 확산되어 간 것이다. 이 점은 고구마가 종자와 함께 획기적인 민간참여형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한다. 나아가 사실상 전 농민 프로젝트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마 종자를 다룬 농서를 보지도 못한 농민들이 고구마를 재배하고 널리 퍼뜨려 나갔던 것이다.

 

고구마는 불과 1, 2년 만에 서울과 삼남지방까지 확산되었다. 고구마의 탁월한 기능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는 부유층 사이에 이국적인 기호작물이자 진미로 인식된 것과 달리 지방에서는 구황작물로 인식되고 재배된 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마가 그만큼 탁월한 작물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강필리와 강필교 팀

강필리가 동래부사로 부임한 것은 52세인 1764년 8월 20일, 한양 내직으로 전출된 것은 54세인 1766년 11월 10일이었다. 1767년에는 대사간으로 제수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직하고 그해 11월에 죽었다. 따라서 강필리가 동래부에서 고구마를 시험재배 및 증식할 수 있었던 것은 1765년 봄과 1766년 봄, 두 번뿐이다. 후임 부사로 가자마자 그는 조엄이 전해 준 고구마 프로젝트를 평생의 마지막 과제로 삼게 된다. 그렇다면 부사 시절 강필리는 고구마를 혼자서 재배하고 연구했던 것일까?

 

강필리의 시험재배 및 증식에는 동생 강필교가 실무를 도왔을 것이다. ⟪강씨감저보⟫는 조엄이 전해준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강필교는 실무 책임자로 두 차례에 걸친 증식 과정을 통해 얻은 지식을 보완하여 형이 이 책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종자와 함께 타지방으로 보냈다. 그 자신이 인지했든 하지 못했든 강필리는 죽음을 앞두고도 고구마 재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러한 사실은 서유구의 ⟪종저보⟫ 및 ⟪만학지(晩學志)⟫ 감저(甘藷) 토의(士宜)조에 인용된 ⟪강씨감저보⟫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강필리는 자신이 직접 시험 재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관 하에 동생 강필교가 맡아 재배・증식하고, 이를 토대로 조엄으로부터 전해 받은 자료와 초량왜관을 통해서 입수한 대마도 자료를 보완하여 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남저(고구마)는 강필교의 ⟪감저보⟫, 김씨(김장순)의 ⟪감저보⟫, 서유구의 ⟪종저보⟫ 및 일본에서 전해온 원보(原譜)가 있다”라는 대목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강필교가 만들었다는 ⟪감저보⟫가 바로 ⟪강씨감저보⟫이다. 강필교는 친형 강필리의 요청으로 고구마 증식작업에 관여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맡아 한 강필교의 탁월한 점은 종자를 제주도에까지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 궤짝에다 흙을 담아 고구마 종자를 중앙정부 기관인 비변사에 보내며 재배법까지 알려준 점이다. 정부의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한 강필교의 이 같은 노력으로 고구마 프로젝트는 널리 알려진다.

 

1813년에 출간된 김장순의 ⟪감저신보(甘藷新譜)⟫는 보성에 사는 선종한이 김장순의 지원을 받아 9년간 재배, 증식, 가공하면서 터득한 비법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당시 세간에 알려진 ⟪김씨감저보(金氏甘藷譜)⟫가 이것이다.

이 외에도 서호수의 ⟪해동농서(海東農書)⟫(1778), 이광려의 ⟪이참봉집⟫(1805), 서경창의 ⟪종저방(種藷方)⟫(1813), 서유구의 ⟪종저보(種藷譜)⟫(1834)와 저자 미상의 ⟪감저경장설(甘藷耕藏說)⟫도 나왔다. 이 책들은 고구마의 파종수확시기 및 재배에 알맞은 토양에 대해서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으로 분리 고찰한 것들이다. 1763년에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부산포로 급송한 후 1764년부터 강필리가 확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현장지식의 총아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감저보⟫와⟪종저보⟫. 이 농서들은 조선후기 고구마 재배법에 대해 소상한 발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농업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혁신가들의 노력은 전국적 농법 지식 확대에 기여하며 조선사회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엄의 손자인 조인영(趙寅永)이 지은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실린 행장(行狀)을 살펴보면, 조엄이 1764년 6월 2차로 가지고 온 고구마 종자 중 일부가 바로 제주도로 보내져 1765년 봄부터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도 조엄이 일본에서 조사해 온 관련 자료가 함께 보내졌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널리 재배된 조엄의 고구마는 ‘조저(趙藷, 조엄의 고구마)’라고 불렸다. 이 무렵 고구마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친 소문이 돌았었는데, 전라도 부안에 사는 80대 노인이 꼽추병을 앓다가 고구마를 장기 복용하고 나자 병이 나아 정력이 좋아져 부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그러자 고구마를 앞 다투어 구하여 매년 백여금을 벌어들이는 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몸에 좋다면 크게 인기를 끄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한편,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종저(種藷)⟩조에는 “고구마는 구황작물로 제일이다(甘藷爲救荒第一)”라고 하여 실학자들 사이에 이미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조는 비변사의 주청에 따라 대대적으로 농정을 진작시키고자 ⟪농정대전⟫을 널리 보급하도록 했다. 고구마 재배가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된 국가 농정 프로젝트로 발전한 것이다. 특이한 사항은 뒤의 모든 농서들이 앞의 농서의 부족한 점, 새로운 임상 결과 등을 보완・보충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마 프로젝트의 의의 중 지식의 누적적 합산은 오늘날 지식을 생성해내고 키워가는 프로젝트의 연속성과 가상성(加上性) 면에서 큰 교훈이 된다. 우리가 아는 농서가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라 생생한 지식 집적체임은 오늘날 고구마 재배과정이 선조들의 연구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모든 조직의 지식경영 원칙이 그러해야 하듯, 쌓아온 지식을 어떻게 더 풍요롭게 꽃피워 가는지가 늘 핵심인 것이다. 이 점에서 선조들은 고구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마와 감자

18세기 중엽 고구마가 중국 연경을 통해 조선 실학자들에게 전해질 때에는 감저(甘藷)라고 불렸다. 고구마가 조선 식자층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63년 조엄 전파 이전으로 명말 서광계가 저술하고 그의 제자 진자용이 1639년에 편찬한 ⟪농정대전⟫에 ‘감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데 기인한다. 이 책에서 서광계는 고구마의 장점을 12가지(十二勝)로 분석하고 있다.

 

첫 번째, 수입(소출)이 많은 것.

두 번째, 색은 희고 맛은 달아서 여러 토산 중에 특히 뛰어난 것.

세 번째, 사람을 돕는 것이 마와 효능이 같은 것.

네 번째, 땅에 두루 퍼져 옮겨가며 나와서 줄기를 잘라 심으면 올해 줄기 하나가 이듬해에는 수십

묘를 심을 수 있는 것.

다섯 번째, 가지와 잎이 땅에 붙어 있어 마디가 생기는 대로 뿌리가 나서 비바람에도 손상되지 않

는 것.

여섯 번째, 미곡을 대신할 수 있으면서 흉년에도 재해를 입지 않는 것.

일곱 번째, 제기(祭器)에 담을 과실 노릇을 할 만 한 것.

여덟 번째, 술을 빚을 수 있는 것.

아홉 번째, 말려서 오래도록 저장하여 자루를 내어 떡을 만들면 꿀을 쓴 것보다 나은 것.

열 번째, 날 것이나 익은 것이나 모두 먹을 만한 것.

열한 번째, 땅이 적어도 되고 물대기가 쉬운 것.

열두 번째, 봄・여름에 심었다가 초겨울에 거두어들이되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하여 잡초나 더러운

것이 끼지 못하며 단지 흙을 북돋아주기만 하고 호미로 김매지 않아도 되어 농공(農工)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는 것 등을 꼽고 있다.

 

이광려는 이 12승만 봐도 고구마는 가히 전천후 재배, 최대 생산 효익, 강한 적용력 등을 지닌 뛰어난 작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홍만선의 ⟪산림경제⟫,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정약용의 ⟪산림경제⟫, 박제가의 ⟪북학의⟫⟪증보산림경제⟫에 ‘감저’라고 알려진 것은 모두 고구마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감자는 마령서(馬鈴薯)로 불렸다.

 

그 외에도 고구마는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 점, 대용식품으로 쓸 수 있다는 점, 단맛이 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식자층으로부터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정조시기 농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각종 농서가 출간되면서 고구마에 대한 관심은 더 커졌으나 종자를 구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조엄에 의해 부산포로 들어오고 강필리가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후 고구마에 관한 각종 저술에서 한결같이 ‘감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764년 봄 이응혁이 절영도에서 처음 재배를 시작할 때부터 부산포 주민들이 ‘고귀마’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부산포를 중심으로 확산된 ‘고구마’는 전국적 고유 명칭이 되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마령서(감자)가 조선에 들어 온 이후인 19세기 중반 고구마는 남저(南藷), 감자는 북저(北藷)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감자는 한냉지인 한반도 북부의 대표적 서류(薯類)작물이 되었고 고구마는 1763년부터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서류작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한반도 북부지방에서는 ‘감저’가 ‘감자’로 불린 것이다. 똑같이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감자와 고구마의 전래 루트와 시기는 각각 다르다. 특정 상품의 전달과정에서 복잡한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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