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13. 9. 30. 13:57

웅장한 천하경영의 실천

웅장한 천하경영의 실천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시조 동명성왕 이래 끊임없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고구려는 영토 확장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경영 목표에서 제외된 적이 한번도 없다. 특히 여전히 창업 단계에 있던 제왕들에게는 이 점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야할 과제였다. 만리장성을 중심으로 동쪽의 요서 땅은 건국 무렵부터 전쟁터가 되었고, 전쟁이 끝나면 중립 지대가 되곤 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비무장지대와 같은 완충지대적 성격이었다.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재위 연간(165년), 근 200년 동안 살수 이북에서 동북 옥저와 흥안령 일대의 선비족(鮮卑族)이며 또 요서 일대에까지 고조선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이런 창업 군주들의 ‘개토(開土)’경영은 면면히 이어졌다. 최고조에 이른 때가 바로 태왕 때였다. 태왕은 영토와 관련되어 국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붕어 후 그 시호가 ‘광개토(廣開土)’라 칭해진다. 태왕이 재위한 이후 고구려의 영토는 유사 이래 가장 크게 확장되었고, 제국은 천하경영의 기치아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국가적 코어 비지니스는 확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훗날 확장을 멈추면서 제국은 움추러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제국을 구성하는 점과 면

태왕은 재위에 오르자마자 영토를 급팽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종족을 아우르는 제국적 통치 질서를 살아생전 이뤘다. 바야흐로 무한확장경영, 천하경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국적 통치 질서란, 한 영역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종족을 아우른 다기한 지배형태를 지닌 ‘다종족 국가’라는 의미이다. 이는 곧 종족구성에 있어 국제적이고, 통치 방식에 있어서 제국적 통치질서를 완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와 같은 의미였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사회 사회는 ‘성일촌 지배체제(城一村 支配體制)‘ 방식을 이룬다. 즉, 농경정주양식(農耕定住樣式)을 영위하는 촌(村)을 기본으로 면지배적(面支配的) 영역통치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는 식량공급원이자, 동시에 방어막이었다. 고구려 사회가 요충지마다 성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유목, 수렵을 영위하는 비정주적(非定住的)인 ‘영(營)’을 점(點)으로 했다. 점 중심의 사회는 주로 말갈이나 선비 같은 다른 종족에 해당된 것으로, 집단적 지배형태인 ‘부락일영지배체제(部落一營支配體制)’를 취하게 된다. 곧 군사거점인 각 성(城)의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점지배적 통치형태를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점 정책으로 고구려는 말갈·선비·거란·지두우(地豆于)같은 이종족에 대해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 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고구려는 조세나 부역 등 군력(軍力)을 얻었다. 이족세력을 부용세력화(附庸勢力化), 즉 용병화 함으로써 제국의 군사력을 더욱 확대,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종족을 용병화하는 이 같은 정책은 마치 로마가 해방노예에 대해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전역(戰役)에 종사해 주어야 하는 부용민 제도의 개념을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활용한 것과 흡사하다. 고구려와 피정복 이족들과의 관계도 이와 같이 대체로 보호와 종속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제국확장 방식은 면 위에서 점이 찍힌 형식이었다. 즉, 안정적 농업기반의 면과 기동력의 점 문화가 결합되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식량과 군사력의 안정적인 제국 유지의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면서 기동성을 동시에 지속적으로 얻어 낼 수 있는 방식이었다. 면과 점의 앙상블은 제국 확장의 요체였던 셈이다.

 

면과 점의 합치를 통해 확보된 태왕이 이룩한 제국의 끝은 어디까지였을까? 이해 대한 해답은 능비에 나오는 태왕의 북서 정복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능비에 나오는 정복 사업 가운데가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북서쪽의 거란 정복이다. 광개토태왕릉비의 영락 5년조에는 ‘패려(稗麗)’라고 하는 거란족 족속들이 계속 반항해 오기 때문에 왕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가서 왕토(往討)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락 5년(395), 을미년에 왕께서 패려(稗麗)가 □□□하지 않아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셨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 언덕에 이르러 세 부락과 600~700영(營)을 쳐부수고 우마(牛馬)와 군양(群羊)을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에 쓰인 이 문장은 그 실지(實地)를 둘러싸고 여전히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우선, 패려(稗麗)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점에 대해 학계에서는 ‘패려(稗麗)’를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개선해서 돌아올 때 ‘북풍(北豊)’이라는 곳을 지나왔는데, 이곳은 심양의 서북쪽으로, 최소한 당시의 정벌지역인 패려는 심양 서북방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더구나 부락이 600~700개 여나 되고 소·말·양떼가 부지기수라는 것을 볼 때 유목민 사회였을 것으로 본다. 태왕은 거란을 정벌해 남녀 5만구(萬口)를 포로로 잡아오고, 본국에서 잡혀가 있던 고구려 백성 1만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그렇다면 고구려 광개토왕대의 서쪽 경계선은 요하선을 넘어 선게 분명하다. 이 같은 사실은 광개토왕의 정무시호(政務諡號)에 ‘광개토경(廣開土境)’, 즉 넓게 토경(土境)을 열었다고 하는 문구에서 말하는 토경(土境)이 서북방향으로는 어딘지 알게 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토경(土境)’은 요하 이상은 포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왕의 ‘토경’은 어느 한 경계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여전히 많다. 즉, 능비에 드러난 부산(富山), 부산(負山), 염수(鹽水)라는 지명식 표현이 정확히 어디인가를 규명해 내는 일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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