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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by 전경일 2014. 3. 6.

세계질서를 위한 확장정책과 주인다운 태도

 

고구려는 창업 이래 영토 확장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압록강·두만강 및 대동강 유역을 연이어 확보하면서 요하선을 지향한 제군사 행동을 집요하게 추진한 끝에 고구려는 마침내 4세기 말 요하(遼河)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제 한족과의 경계를 요하를 기점으로 잡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 경영에서 자사보다 우위에 있는 경쟁사의 바로 코 밑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것을 뜻한다. 나아가 경쟁의 패러다임을 대등한 관계로 새롭게 포지셔닝 시켜 놓은 것을 뜻한다.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전략거점화한 것은 동북아에서 하나의 제국으로 웅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동북아에서 수없이 명멸하는 제국가의 하나로 남느냐, 제국의 주인이 되느냐를 결판 짓는 중대한 터닝 포인트였던 것이다. 요하지역을 확보하면서 고구려는 이 지역 세력 판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영향을 받는 관계에서 영향을 주거나, 최소한 상호 주고받는 대등한 관계가 설정된 것을 뜻한다. 이후 고구려는 요동성을 중심으로 강고한 전선을 구축해 이를 고구려 영토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나아가 요하를 발판으로 요서 및 요해 지방에서의 군사행동의 효과를 높이며, 동몽고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요하를 확보하면서 전성기의 고구려 영토는 중원과 만주의 경계선을 이루는 요하의 서쪽인 만리장성 인근까지 펼쳐져 있었다. 이는 마치 시장 쟁탈전에서 승리한 후, 점유율을 공고히 하며 재도약의 계기로 삼은 것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성을 쌓아 방비를 철저히 하는데, 이때 쌓은 요하의 제성들은 훗날 대수당(對隋唐) 70년 전쟁 중에 항시 최전방의 전장(戰場)이 되며, 고구려의 방어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요하 지역의 운용여부는 고구려제국의 존립과 직결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요하 일대는 생존 및 번영과 직결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요해 지방에 대한 영향력 강화로 북위조차 장수왕(435년)과 문자왕(492년) 2대에 걸쳐 고구려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제수하며 유화적 제스추어를 쓸 정도였다. 북위도 고구려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셈이다. 이는 중원의 최강세력인 북위조차 고구려가 취한 요해 지방에 대한 대거란 경략정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인정한 것을 뜻한다. 480년경에는 선비 탁발씨의 ‘북위(北魏)’와 한족(漢族)인 숙씨의 ‘남제(南齊)’가 중국 대륙에서 남북조를 형성하고 있을 무렵인데, 이때 북위는 주변 각국에서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을 정할 때 남제를 1위, 고구려를 2위로 세울 정도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동북아 전역에 걸쳐 북위, 남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써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태왕 재임 기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대격변기였다. 4세기 들어 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북방의 이민족들이 대거 중국 대륙에 진출해 각기 나라를 세우고 난립했다. 이 시기를 5호16국 시대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5호16국의 혼란의 배경에는 이민족의 진출이 보다 본격화되는 면이 있다. 이 무렵 동북아 국제정세는 중국의 세력변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중국에서는 진(晋) 왕실의 내부 혼란으로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이 틈을 타 변방의 이민족들이 봉기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와 접하고 있던 요동지방에 대한 진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는 요동지방으로 진출을 모색한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 상황 속에서 고구려는 태왕 때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이 볼 때의 이족은 과감했고, 용감했다. 그들은 정복활동을 통해 중화를 부르짖던 한족의 중국이 한낱 겉치레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에게 중국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국가를 진출시킬 신천지이자, 요즘의 기업경영에 견주어 보면 새로운 시장만이 있을 뿐이었다. 중국이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팽창 정책을 꾀한다. 수축되어 있던 힘이 일순간 뿜어져 나온 것이다. 태왕의 대외 정복은 바로 이러한 동북아의 국제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회는 행동을 요구한다.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 기회는 오히려 역공과 시장의 순위를 뒤집는 결과를 초래한다.

 

태왕은 4년의 시차를 두고 거란을 정벌한다. 두 차례에 걸친 거란정벌 이래 고구려는 요해 지방의 경략에 박차를 가한다. 요해 지방에 대한 관심과 진출은 창업 이래 숙원 사업이자, 고구려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의 계기가 된다. 따라서 국가적 역량을 모아 태왕은 거란 정벌에 나섰고, 그 관심도 어느 때보다 지대했다.

요하를 장악함으로써 고구려는 내몽골 초원 지대로 적극 진출할 수 있게 된다. 내몽골으로의 진출은 고구려 세력이 북서방면으로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 나는 가축은 경제적 이익도 가져왔다. 특히 정복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철기병의 강화를 위해 질 좋은 말이 공급되었다. 말은 군사적 재원으로 필수재였는데, 그것들은 이 지역을 통해 들어왔다. 고구려의 거란 정벌은 궁극적으로 내몽골 초원 지대로 가는 길을 터주었고, 이는 말의 보급 등 제국의 군사 역량을 갖추는데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 대릉하(大凌河) 유역에서부터 멀리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의 시라무렌강 유역까지의 원정은 성공의 확대재생산을 통해 제국이 뻗어 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때 고구려의 대외 정복로는 만주벌을 지나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동몽골초원(중국 내몽고 자치주)에까지 깊숙이까지 뻗친다. 이 당시의 태왕의 영웅담은 지금도 지역 유목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의 한족이나 고구려에 대항하는 이족의 눈으로 봤을 때, 고구려는 그야말로 다루기 힘든 존재였다. 결코 녹록하지도, 만만치도 않았다. 고구려는 이처럼 중원 왕조의 통치 질서에 머물기보다, 그들과 대립하고 힘의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확보해 나갔다. 태왕의 이 같은 정책의지는 동북아의 주인다운 태도였다. 이는 고구려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불균형의 세상을 형평 맞추려고 한 정책 결과였다. 드높은 기상과 지칠 줄 모르는 투지, 제국의 주인다운 태도는 고구려가 지닌 가장 뛰어난 우리의 유산이다. 이는 훗날 한반도를 둘러싼 열국과의 관계에서 수세적이며, 쉽게 정신적 투항을 해대는 작은 의식 따위로는 감히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에 대한 내부의 비자주적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민족 생존과 번영을 위해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자명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