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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내 세계에 어느 우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by 전경일 2014. 4. 16.

내 세계에 어느 우월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4세기 말 요하유역을 완전장악하면서 제국의 위용을 드높이게 된다. 요하 일대는 고구려가 제국으로 웅비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을 확고히 놓아주는 전략거점이 된다. 요하를 넘으면 서북쪽으로는 멀리 대흥안령산맥 남쪽의 시라무렌강 유역에 진출해 거란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태왕은 이 강을 건너 거란을 정벌하고 마침내 동몽고 초원 진출의 교두보를 놓은 것이다. 또 서남쪽으로는 후연을 공략하여 대릉하 유역으로 진출한다. 또 동북으로는 조공을 중단한 동부여를 친정하여 복속시킨다. 능비를 보면,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넘어 염수에 이르러 패려(稗麗) 일부를 정벌하고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헤아릴 수 없이 획득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요동지역을 순시(巡狩)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요동이 제국 확장의 전초기지이자, 물자공급원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요동은 제국 발전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숙원사업인 요동을 완전 장악하고 나자 가능한 요서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되, 최소한 요서에서의 어떠한 우월적 존재도 용인치 않는 원칙을 견지한다. 고구려 세력권 내 어떤 경쟁상대도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정책이었다. 이는 새로 확보한 요하유역과 고구려제국 자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나아가 요서를 분쟁지역화 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고구려는 당시 가속화되고 있던 송화강 유역에 대한 교란 요인을 제거해 버리며, 요해지역에서 대거란 경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나아가 고구려제국 자체의 보호와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군사전략상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차단지’, 즉 ‘방어전지(防禦前地)’ 개념이다. 이는 제국의 통치권이 직접 관철되지는 않지만, 자기영역에로의 제(諸)적대 세력의 침투를 차단해주는 방패(防牌)의 땅을 두는 것을 말한다. 즉, 버퍼 효과를 누리고자 하는 지역인 셈이다.
방어전지는 여러 나라와 인접해 있는 나라가 영토가 확대될 때 자국영토나 자국의 변경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 주위에 외침을 막아줄 수 있는 타국의 땅, 즉 방패의 땅을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의 이 같은 정책은 오늘날 한반도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중국의 성장을 억제하고자 하는 미ㆍ일 등 해양 세력과 해양세력의 진출을 억누르기 위한 중국의 방호정책이 맞닥뜨려 북한을 방패 지역화하려는 가운데, 남북간의 민족사적 동질성과 현실 국면의 갈등이 표출되고, 한편으로는 정치 역사적 해법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요해지역이 그랬다.   이러한 방패의 땅을 정치지리학에서는, 외침을 차단해 준다는 의미에서 ‘차단지’라고 부른다. 이는 강대국으로써는 더 큰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전략적으로 고삐에 묶어 두는 것이었다. 고구려가 직면한 동북아, 대중국 전선에는 이처럼 어느 세력이 다른 세력의 부상을 막고자 상대의 고삐를 묶는 전략이 수시로 벌어지는 무한경쟁의 생태계였던 것이다.

 

태왕 이후에도 고구려는 이 같은 정책을 지속적으로 관철해 나간다. 그 예로 436년 ‘화룡출병(和龍出兵)’을 들 수 있다. 즉, 북위의 대북연(對北燕) 군사행동에 대응해 고구려는 북위의 화북통일 시도에 제동을 걸고, 최소한의 요청사항으로 요서지역에서의 고구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행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이때의 출병은 고구려의 요동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출병의 역사적 배경은 영락 10년(4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만리장성 이북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선비족인 탁발씨(拓拔氏)가 후연의 모용씨를 압박하면서 촉발되는 것이다. 연전연패 끝에 후연은 수도를 중산(中山)에서 요서지방의 용성(龍城, 지금의 조양朝陽)으로 옮기며 그 영역이 요서, 요동지방으로 축소된다. 당연 동쪽의 고구려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후연의 동진(東進)은 고구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태왕 10년 후연의 모용성(慕容盛)이 태왕의 무례함을 구실로 선제공격한다. 이 같은 후연의 공격에 태왕은 강력 대처하여, 후연을 전면 응징한다. 『삼국사기』는 그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후연(後燕)의 평주자사(平州刺史)인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태왕은 11년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던 후연의 숙군성을 함락시켜 버린다. 숙군성이 위치한 곳은 요하 서편의 대능하 유역이었다. 이어 태왕은 영락 14년 요하를 건너 대릉하 유역에까지 세력을 뻗친다. 고구려의 적극 공세에 후연은 반격을 시도하는데, 양 국가가 요동을 두고 수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이는 것이다. 후연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요동을 차지한 고구려는 후연에서 내부반란으로 고운(高雲)이 북연(北燕)을 세우게 됨에 따라 북연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고운이 고구려의 지속(支屬)이라는 점이 화평의 무드를 조성하기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태왕은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고, 고운도 답례를 하는 등 양국 간에는 한동안 우호적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고운이 2년 만에 피살되고 나자 북연에서는 풍홍(馮氏)이 집권하게 된다. 이때가 409년이었다. 여기까지가 태왕이 살아 있을때 북연과의 관계였다. 태왕 사후 북연은 서쪽에서 압박해 오는 북위(北魏)에 의해 계속 압박받다가 마침내 장수왕 20년(432년) 풍홍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것으로 그 막을 내린다. 당시 고구려는 풍홍의 망명의사를 확인하고 군대를 파견해 북위와 대치 끝에 먼저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和龍城)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출병을 통해 고구려는 요동지방을 완전 장악하게 되고, 북연을 멸망시키고 요서지방을 장악한 북위와 대치하게 된다. 고구려의 이 같은 노골적인 대(對)북위 적대 행동에도 불구하고, 북위는 우월한 군사역량을 지닌 고구려군과의 정면충돌은 피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5세기 들어 요서지방을 군사적으로 공세하고, 동몽고 지방에도 세력을 뻗친다. 그런데 이때 ‘화룡출병(和龍出兵)’을 하게 된 것은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유목민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양 유목민 집단이 서로 접해 있는 경우, 양자의 세력 균형상에 출현하는 진공지대(眞空地帶)를 ‘기지(棄地)’개념으로 파악해 왔다. 앞서 말한 ‘방패의 땅’이 겨기에 해당된다. 어느 힘도 미치지 못하는 공백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연이 망한 자리를 완충지대와 같이 ‘버려두는 땅’, 즉 ‘기지(棄地)’로 놔두고자 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오랜 유목문화권과의 조우를 통해 습득한 ‘기지(棄地)’ 개념을 원용해 요서지방을 ‘기지’로 둠으로써 요하지역을 고구려 영토의 방위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힘의 완충지대를 요하 너머에 둠으로써 최소한 요하선이 위협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따라서 이 기지를 침략하거나 교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과감히 군사적 행동으로 응징했다. 자기 세력권 내 어떠한 우월적 존재도 허용치 않는 정책이자, 세력의 최전선을 더 위로 끌고 올라가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전략은 비유컨대, 오늘날 기업들이 목표 이상으로 시장의 기대수준df 잡거나, 점유율 방어를 치는 것과 비슷하다. 즉, 목표를 상향조정해 놓음으로써 최소한 원래의 경영목표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간 전쟁과 기업간 경쟁은 기본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전쟁이란 전쟁 당사자 간 상충된 이해관계를 물리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다. 전쟁의 승리는 우수한 군사력에 의해 결정되고, 이는 아군과 적군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 기업은 전략이 소구되는 지점이 고객이다. 이 점이 양자 간 다르다. 고객이 기업 활동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사업인 셈이다. 태왕이 인식한 경쟁이란, 우월적 지위를 정치적 행동이 실천되는 경영 현장에 확고히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즉, 지배력을 ’영고(永固)'하게 하는 것이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