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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목숨을 건 이순신 협업 공동체

by 전경일 2014. 9. 15.

목숨을 건 이순신 협업 공동체

 

임란 7년을 돌아보며 경영에서 임무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임무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그에 따른 상황 대처법과 가변적 상황에 대한 능동적 적응력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전투태세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된다. 목표를 위해 준비하고 실행하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은 임무에 임하는 자세다. 장군은 전쟁 승리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부하와 장수들에게 임무를 명확히 제시했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들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킴으로써 나라를 구해내는 영웅담을 그린 영화 300이 있다. 100만 대군과 맞선 무모한 싸움이었지만, 스파르타의 위대한 용사들은 나라를 위해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한 이 전투에 맹렬히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임란 당시 전라좌수영에 소속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군과 함께 한 277명의 막하의 장수들도 이들과 같다.

 

이순신을 따른 막하의 장수들을 보면, 대략 277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대체로 임진년과 전쟁이 소강상태에 보인 후 다시 재발하는 정유년에 이순신 군영에 뛰어든 핵심인물들이다. 이들은 장군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했다. 277명의 핵심인물들과 더불어 장군은 7년 전쟁을 한 몸으로 치러 낸다.

 

이들은 하나같이 이순신의 인품과 리더십에 흠모돼 구국의 일념으로 합류했다. 장군은 그들을 거두었고, 심지어는 발탁하여, 전투 역량을 배가하고 작전을 숙의했다. 나대용은 수군 장정과 군량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직접 장군을 찾아와 거북선을 건조하였고, 김세호는 전선 건조 감독이 되어 직접 연장을 들고 8척의 대형전선을 제작했다. 정운은 수군 정비를 위해 합류했다. 이몽구는 의병을 모아 이순신에 합류했다. 박광춘은 장군에게 맹서하는 시 한 장을 써 바치며 구국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장군이 순국하자 끝까지 맞서 싸워 적의 칼날에 생사를 같이 한 인물이다. 김유흠, 정응 등도 자발적으로 이순신 대열에 뛰어 들었다. 그 외에도 현직자를 비롯, 전직자들까지 스스로 내려와 장군을 도와 전쟁 승리를 이루어냈다.

 

장군은 속속 합류해 오는 인재들을 각기 재능에 따라 발탁했다. 김몽룡은 군사사무를 주관하였고, 오진민은 물길과 기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제공했으며, 이방직은 화약을 제조하는데 능했다. 탁련은 봉화를 들어 한산 밤바다를 밤낮으로 지켰고, 낮이면 앞 바다에 배를 늘여 뜨려 형세를 위험 있게 보이게 했다. 앞섬에 돛을 만들어 세워 적들로 하여금 전선(戰船)으로 오인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이봉수는 임란 직전 화약을 제조했고, 좌수영과 돌산도 사이에 수중 철쇄를 설치하고, 봉화대를 쌓는 등 활동을 하였다. 순천감목관 조정(趙玎)은 스스로 전선을 마련하고, 집안의 종들과 목동을 인솔해 부산포 해전의 지원군으로 나섰다.

 

 광양 현감 어영담은 세 차례 해전에서 적의 대··소 함선을 8척이나 격침시켰다. 그는 영호남의 수로의 특성과 해상 요충지를 자세히 알고 있던 장수였다. 김완의 경우에는 적과 맞서 싸울 때 먼저 북을 치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생선과 소금을 흥정하여 잘 팔고 양곡과 미숫가루를 잘 비축해 군사들을 배고프지 않게 한 한산 수국(水國)의 진정한 재무전문가였다. 김창한은 장군에게 여러 전략을 제안했고, 박평동도 전쟁계획에 출중한 의견을 개진하여 장군도 그를 아꼈다. 이선온은 장군이 운주당에 있을 때 밤이 깊어지면 그를 방 안으로 불러들여 군사에 관한 것을 논의한 전략가였다. 고금도에 있을 때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조차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순신의 부하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거니와, 그 중에서도 이선온과 같은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할 인물이다.

 

그는 장군이 가장 신임한 막하로 전략을 논의하고, 둔전, 해로통행령을 발행해 군량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란은 한편으로는 경제전쟁이었기에 자원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형도 이순신의 참모로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전선이 10여 척도 안 된 상태에서 병력 모집을 위해 피난민 가족을 보호해 주고 장정을 모으는 계책을 마련해 군비와 민심 안정을 도왔다. 임연준은 명량해전 이전부터 여러 차례 적 정황 등 주요 정보를 제공하였다. 변홍주는 명량해전이 일어나자 자신의 형제들과 의사(義士) 300여명과 함께 배를 가지고 참전해 장군의 작전을 후원하는 계책을 세워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장군이 서울로 압송돼 투옥되었을 때 변홍주와 변연수는 구원을 요청하고, 장군의 군사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진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택남은 장군이 투옥되자 식음을 전폐하였고, 변홍원은 날마다 바다에 나가 장군이 석방되기를 기다렸다. 송희립, 정경달, 황대중은 대궐문 앞에서 울부짖으며 장군의 무죄를 하소연하였다.

 

이순신 일가의 편의를 봐 준 창원 정씨 문중도 그 중 하나다. 장군은 둘째 형 요신(堯臣)이 사망한 1580년과 맏형 희신(羲臣)이 사망한 1587년 이후 모친과 맏형 및 둘째 형의 자녀들까지 모두 부양했다. 158912월 이순신은 정읍현감으로 부임해 갈 때 식솔들을 모두 데리고 간다. 임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순천부 여수 고음천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이때 창원 정씨 집안의 정철(丁哲, 1554~?)이 방 한 칸을 비우고 지내게 해 준다. 정철은 이후 집안의 재산을 풀어 의병을 규합한 뒤 장군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전하고 전투에 합류했다. 그의 동생 정린도 마찬가지로 해상의병 활동을 했다.

 

특히 녹도만호 정운은 선봉장으로 적을 무찔렀고, 부산포 해전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 순국했다. 그가 죽자 장군은 국가가 오른 팔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슬퍼했다. 장군은 부산포 해전의 공을 오로지 정운의 힘이었다고 돌렸다. 1592911일에 쓴 제문에서 장군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거니와, 나라를 위하여 던진 그 몸 죽어서는 오히려 살았도다.

 

정운에 대해 쓴 이 글은 마치 장군 자신의 노량해전에서의 죽음을 예언한 듯하다. 이순신은 저 노량 앞바다에서 더럽고 추악한 전쟁의 종결자로서 죽음으로써 살아났고, 역사에 길이 그 굳은 뜻과 이름을 새겼다. 목숨을 버렸기에 산 것이다. 그런 자신의 심지를 정운의 죽음 앞에서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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