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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서애 류성룡에게서 배우는 징비리더십

by 전경일 2015. 3. 31.

서애 류성룡에게서 배우는 징비리더십

 

부끄러운 역사가 번듯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보다 후세에 더 큰 울림을 주는 경우가 있다. 역사적 가르침으로 임진왜란은 바로 그런 반성과 대비에의 교훈을 주고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교훈의 백미를 이루는 서책이 바로 서애 류성룡 선생이 쓴징비록(懲毖錄)이다. 요즘 동명의 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경위와 당시 조선 조정의 내부 사정, 조선의 방위 태세 등 제반 여건에 대해 이보다 적나라하고 철저한 자기 고백은 없다. 내부를 향한 고발이자, 자신을 향한 채찍이고, 미래를 대비한 불망(不忘)의 방책이기도 하다.

 

서애 선생이 징비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매우 명료하다. 그 무렵 우리는 왜 그토록 힘이 없었는가, 왜 그토록 짓밟히기만 했는가라는 자기 질문에 가장 정곡을 찌르는 답을 제시한다. 이런 징비의 교훈을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는 국가는 물론, 기업에 적용할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처절한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다면 글로벌 도전이 몰아치는 미래에 이보다 훌륭한 나침판은 없을 듯하다.

 

선조실록25(1592) 413조는 왜구가 침범해 왔다는 말로 7년간 기나긴 조·일 전쟁의 서막을 알린다. 이 말은 우리가 일본을 대하는 인식이 과거나 임란 당시에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왜구들로서 노략질을 일삼는 무리들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한일 간에 침략, 피침략의 역사는 엄격히 말하자면 지난 1620간 일본이 900여회나 침범한데서 알 수 있듯 끊임없이 일본의 대()한반도 침탈로 나타났다. 오늘날 독도 문제도 알고 보면 이와 맥이 닿아 있다.

 

그렇다면 대비는 더 철두철미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는 얼마나 한심할 정도로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눈 감고, 그로 인해 대비책 또한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자.

 

임란이 일어나기 50여 년 전인 1543년 포르투갈의 범선 한 척이 일본 나가사키현의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다. 이때 이들은 조총 두 자루를 전해 주게 되는데, 이를 15만정으로 복제케 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이로써 막대한 무력을 보유하게 된다. 내부적으로 팽배한 무력의 기운은 결국 오다노부나의 부하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하여금 임란이 일어나기 15년 전, ‘규슈를 다시 평정한 뒤 그 병사를 이끌고 곧바로 조선을 정벌하고, 나아가 명의 400여 주를 석권하여, 환국의 판도로 삼겠다.’(히데요시가 오다노부나에게 보낸 편지 중)는 방약무인한 큰소리마저 치게 만든다. 일본의 침략 야욕은 점점 구체화되어 갔다. 이 점은 임란이 일어나기 7년 전에 유구국의 명나라 진공사가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본이 대규모로 조선을 침략하고 명()도 함께 침략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까마득하게 주변국이 어떤 침략적 야욕을 불태우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다. 이 지도를 보라. 임란 전까지 사용된 세종시대(1402)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멀리 인도는 물론 중국까지 잘 나타나 있다. 조선도 큼지막하게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저 아래 조그맣게 보잘 것 없이 그려져 있다. 임란 시까지 이 지도가 사용되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적의 존재를 모르고 간과했다는 것일까? 요즘말로 얘기하자면, 경쟁사()가 누군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런 중에 일본보다 경쟁 우위를 갖는 건 고사하고, 적을 향한 대비책마저 제대로 될 리 만무이다.

 

                                                               

결국 1590(선조23) 3월 들어 조선은 일본에서 보내온 국서의 내용이 심히 방자하기 이를 데 없어 저들의 저의를 파악하고자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이때 일본국서의 내용은 조작되어 표현상 수위가 내려간 것이기는 하나 일본이 명을 칠 테니 조선을 길을 비켜 달라는 것이었다. 통신사는 정사와 부사로 황윤길(서인)과 김성일(동인)을 보냈는데, 이들이 갔다 와서 하는 보고는 조정을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황윤길은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니 내침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말한 반면,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난다고 하여 적이 침략 의도가 없음을 시사한다. 국가적 긴급 사태에 이와 같이 당리당략으로 보고가 다른 점은 오늘날 쇠락하는 기업들의 특징으로 전혀 내부적 컨센서스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런 외부의 적대적 환경과 내부의 무능, 알력, 무방비로 결국 7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본질 면에서 왜와 명이 조선 땅에서 조선 백성을 죽이고 강토를 나누려고 한 전쟁이다. 우리가 전쟁터가 되었지만 그 후의 수많은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처럼 우리는 타자로서 어떤 권리도 주장도 하지 못했다. 서애 류성룡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통렬히 자기반성을 하고 이를 후세에 징계하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서애의 크나큰 웅변은 오늘날 우리에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켜 준다.

 

기업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면 웅비는 고사하고 기세마저 꺾여 버린다. 현실을 딛고 자강하려는 노력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변화, 혁신, 도전의 정신으로 글로벌 파고를 넘는 기업만이 새로운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서애 선생의 교훈이 경영 분야에 남다르게 다가오고 있는 건 경영 현장이야말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총성이 울리는 글로벌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징비록의 교훈은 오늘날 리더를 자임하는 자들에게 크나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