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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실학자 홍대용으로부터 배우는 혁신정신

by 전경일 2015. 5. 12.

실학자 홍대용으로부터 배우는 혁신정신

 

한평생 정력을 소모하여 100여권의 잡다한 글을 만지기는 하였으나, 이는 결국 학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의 종이값이나 올리고 학도들의 안목을 혼란케 할 뿐이니, 이야말로 근세 선비들의 골수에 가득 찬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이 말은 짐짓 실제를 구하지 않는 다른 선비들을 질타하는 말인 듯하나, 속내는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꾸짖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조선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그는 왜 이처럼 자기 부정의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껍질을 부숨으로써 올곧게 속살을 드러내려고 한, 그만의 투철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홍대용은 1731년 서울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에는 대학자인 이원행으로부터 글을 배워 과거를 통한 그의 출세길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행로를 중간에 돌연 꺾어 버린다. 당시로서는 외도(外道)에 불과한 과학 분야로 나간 것이다. 국가의 흥망에 관계없는 것에 정력을 쏟아 붓는, 요즘식으로 무효경쟁에 자신의 인생을 투여하지 않겠다는 죽비와 같은 각성이었다.

 

그런 그에게 세상을 넓게 보는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1765년 조선사신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파견되는 숙부를 따라 연경에 가게 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그는 여기서 직접 두 눈으로 중국의 생산기술과 문화, 그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조선은 그동안 잠자고 있었구나......!’

 

이런 절박한 깨달음이 다가왔다. 그는 현지에서 항주의 학자 반정균(潘庭筠)과 엄성이라는 선비를 만나 필담을 주고받으며 학자로서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60년 후 반정균의 손자 반공수와 홍대용의 둘째 손자 홍양후에게까지 넘어간다. 실로 국경을 넘는 영혼의 교류가 이어진 것이다.

 

북경에 갔을 때, 담헌의 눈을 휘둥그레해지게 한 것은 천주당이었다. 그는 북경에 체류하는 5일 동안 천주당을 찾아가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독인인 할러슈타인, 고가이슬을 찾아 서양 문물과 천주당에 대해 문의하고, 직접 눈으로 서양식 관상대를 관찰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위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보게 된다. 더 오래 볼 수 없음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촉박한 시간으로 충분한 관찰과 연구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담헌은 귀국 후 중국 친구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학술을 논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천학초함(天學初函)은 내가 평생 보고자 하는 책입니다. 그 책 수가 적지 않게 많은걸 알지만 이렇게 먼 곳에까지 무슨 방법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홍대용의 이 같은 안타까운 토로에 반정균은 10년만에 겨우 그 책을 얻어 그것도 후반부만 보냈다. 실로 대단히 깊고 끈끈한 지적 교유였던 것이다.

 

근세로 넘어오는 거대한 변화가 용틀임하는 시기에 홍대용은 9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과학에 있었다.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천문, 역법, 산수(算數) 분야로 이 분야를 통섭해 끝내 혼천의기(渾天儀器)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현대식 천문의로 평가되고 있는 홍대용의 쾌거로 볼 수 있다. 그는 우주 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는데, 다름아닌 지구 자전설이다. 이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하늘을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해는 지구를 돈다고 믿었는데, 담헌은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관념적 유학의 세계 질서를 부정하고 과학적으로 세상 보는 가운데 돌출된 것이다.

 

스스로 학문을 하는 철학으로 실제를 구하고자 했던 담헌은 과학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면에서도 근세의 싹을 여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신분의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든 노동을 해야 하며, 오로지 재능과 학식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방 문제에서도 38만명의 직업군인을 둘 것과 탁월한 부국강병의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학교를 세워 8세 이상의 모든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자주성을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우리가 18세기 무렵, 제 조건들을 혁신하는 작업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구한말 외세에 의해 강점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혁신은 시기를 놓치고 나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내부적으로 순혈주의와 작은 기득권에 매몰되어 과감한 변혁을 꾀하려는 시도가 없을 때에는 주춤주춤하다가 어느새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만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시부터 제기된 전세계 경제위기의 조짐에 대해 지속적인 경고가 있어왔으나, 미봉책과 안이함으로 대한 결과는 지금 한국 경제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외풍에 준비 안된 기업에게는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고 있다. 지금을 굳이 역사적 시점으로 따지자면, 담헌이 근본적인 변화를 주창했던 바로 그 시기와 유사하고 볼 수 있다. 그때 조선의 선택이 한국 근대사를 결정지었듯, 지금의 선택이 미래의 한국경제를 결정하게 될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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