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남아프리카 대초원에서 ‘학익진법’을 찾다

by 전경일 2016. 3. 14.

남아프리카 대초원에서 학익진법을 찾다

 

일제집중타방전법(一齊集中打方戰法).’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조금은 낯선 한자어인 이 말은 병법에서 나온다. 자원을 한 곳에 집중해 적을 물리치는 전법을 뜻한다. 이 전략은 저 유명한 학익진법(鶴翼陣法)에서 찾아진다. 학익진의 진용을 떠올려보고자, 드넓은 한산도 앞바다에 뛰어들면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맹활약한 한산안골포 해전을 만나게 된다. 이 작전에서 장군은 저 유명한 학의 날개로 적을 감싸 적세(賊勢)를 꺾으며 일대 전환을 꾀해 냈던 것이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 아 바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산대첩은 임진년(1598) 7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에 걸쳐 한산(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적선 89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쌍방 간 교전이 가장 치열했던 대전을 가리킨다. 견내량 해전은 왜군 측에서는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주력함대 73척을 끌고 나왔고, 이순신 장군은 함대 56척을 몰아붙여 맞선 대결전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지형만 놓고 보자면 조선수군이 당연히 불리했다. 불리한 지형을 장군은 혁신적 전법으로 돌파했다. 나라의 운명을 건 대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저 유명한 혁신 전법인 학익진법이 전면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궁금한 점은 이 신출 전법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장군의 3차 출동은 5, 6척의 군선으로 적을 봉쇄 유인하여 섬멸하는 이른바 인출전포지계(引出全捕之計)였다. 작전 수행을 위해 장군은 진형을 학의 날개 모습으로 짰다. 이 같은 진형 전개는 적의 주된 전투 제대 중심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펼치는 것으로 아군의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쓰던 전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해전에 맞게 일부 변용되어 운용되어 왔다. 육지에서 바다로 넘어오며 학익진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육상에서는 횡렬진을 띠지만, 해전에서는 첨자찰(尖字札, 복쐐기진)이나 일자진(一字陳, 횡렬진)을 이룬다. 전방 날개는 오목꼴, 좌승함 뒤쪽은 작은 쐐기골 모양을 이룬다. 좌승함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이다

 

학익진법으로 대형을 바꾸려면 민첩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이 뒤따라야만 한다. 전함 건조 시 밑바닥을 평평하게 해 기동성과 회전력을 높인 것은 적지(適地)에 맞는 전략적 유연성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견내량 전투 시 이 전법을 한판 승부 카드로 꺼냈다. 거북선과 학익진의 결합은 상상을 초월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승세를 거머쥐게 했다. 한마디로 전술 무기와 작전이 온전히 화학적 결합을 이뤄낸 것이다. 무적 이순신 함대의 비밀은 이처럼 과학기술과 전략의 탁월한 결합에 있다.

 

여기에 주요 시사점이 있다. 학익진이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려면 학의 모양을 한 전투대형에 적을 끌어 들이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싼 다음 집중 화포공격을 가하는 함포전이 뒤따라야 한다. 날개를 펼쳐 적을 둘러싸고 위압해 일시에 방포함으로써 적을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임란 전 장군이 지자, 현자, 승자 등 각종 총통 개발에 몰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인된 적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익진으로 둘러싸여 총통 세례를 받고 기세를 잡은 아군은 앞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아 적선을 불 지르고 적을 사살했다. 여기에 함대 간 연락 체계라든가 일사불란한 지휘와 수행이 밑받침됐다. 전 전투 과정에서 정치(精緻)한 프로세스를 실현해 냈다. 또 전략병기를 중심으로 전투 수순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수행해 냈다. 전투 수행 시 절차와 수순은 최고의 혁신 공법으로 전투시간에도 주력집중방식을 적용해 최적화해 냈다. 그것은 가능한 짧은 시간에 승부를 결정짓게 함으로써 아군의 전력 손실을 막고 적에게는 짧은 시간 내 궤멸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제 승리는 우리 손에 들어 온 거나 다를 바 없었다.

 

한산대첩은 이처럼 집중타격방식의 가장 모범적인 예이자, 자원집중화 전략을 통해 얻은 최대의 대첩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우연하게도 이순신식 학익진법이 저 멀리 아프리카 투쟁사에서 발견된다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건국 무렵인 1835년 아프리카계 백인에 해당되는 트랙보어(Trek Boer)는 토지를 찾아 아프리카 내륙부로 이동했다. 이때 트랙보어들이 노린 지역은 인도양을 따라 펼쳐져 있는 나타르 지방이었다. 이곳은 원래 흑인 원주민인 줄루족이 연방 국가를 세운 지역이었다. 아프리카계 백인들이 공격하기 전 줄루족의 샤카 족장은 징병제도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식량원으로 옥수수를 지배하는 한편, 공업을 일으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줄루 족장은 주변 씨족들을 병합해 나갔는데 이때 저 유명한초승달형 병법을 써서 적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병법은 주력부대의 양측 면에 각각 돌격대를 배치해 적을 협공하는 전략이다. 학익진법과 생김새도 같다. 사캬 족장은 이 전략을 써서 10년간 전투를 벌인 끝에 오늘날 나타르 북부에서 모자비크 남부에 걸친 광활한 평야 지대를 지배할 수 있었고, 4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한 줄루 왕국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44년 지나 1879년이 되었을 때 줄루족은 남아프리카 나탈 지방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군과 일대 전쟁을 치르게 된다. 개전 초 영국군은 줄루왕국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줄루족은 샤카 치세 동안 주변의 반투족을 정복해 이미 인구만 50만 명에 이르렀고, 4만 여명의 정예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줄루족의 전사들은 맨발로 하루 70킬로미터를 달려야 전사로서 인정되는 등 혹독한 훈련 속에서 거듭난 용사들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점은 무기였다. 손에 쥔 아세가이(짧은 창)와 소가죽 방패로는 현대적 무기를 사용하는 영국군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선방으로 줄루족의 왕 케츠와요는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에서 승리한 영국군이 병력을 증강해 다시 쳐들어오자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영국군은 줄루왕국을 정복하고 13개 소국으로 분할시켜 버렸다. 근대 제국주의의 분할 정책이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것이다. 이때부터 아프리카는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백인들의 정책으로 동족을 미워하는 극한의 대립과정을 겪게 된다.

 

줄루족은 부족 간 대회전에서 양쪽 끝의 강력한 기동력을 바탕으로초승달형 병법을 써서 적을 완전 제압했지만, 영국군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미 창과 방패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인들에게 무참히 패배했지만, 부족 내부 간 전쟁 시 샤카 족장이 보여준 혁신전법은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다. 물론 실제로도 유효했다.

 

생각해 보면 초승달과 학익은 생김새도 같다. 좌우측 끝의 강력한 기동력을 전제로 주력을 집중해서 적을 섬멸해 낸다. 고래로부터 전해 오던 육전법 학익진이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해전법으로 변환 운용된 것처럼, 샤카 족장은 아프리카 고유의 육전법으로 적을 무찔렀다. 시대와 장소는 달라도 시공을 뛰어 넘어 혁신적 사고를 하는 혁신가들은 어디든 있다.

 

이 우연한 일치를 보며 생각해 보게 되는 게 있다. 이 두 작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은 이런 걸 가리켜 어떤 종의 한 개체가 습득한 행동 양식은 다른 개체에게 전파된다는 이른바 루퍼트 쉘드레이크의형태공명장이론을 떠올리곤 한다. 이런 주장의 밑받침이 되는 이론이 일본의 생물학자 겐이치 이마니시가 밝힌 바 있는101마리 원숭이이론이다. 혹은 경영학 분야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용어로 말콤 그래드웰이 주창한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이론이 있다.

 

세상엔 상호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이순신의학익진법이든, 줄루족장의초승달형 병법이든 우리는 상호 연관되는 우연성이 만드는 세상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인류가 경험해 온 다양한 역사, 문화적 사례들에 눈을 돌리면 때로는 현실에서 못 찾던 해법이 보인다. 이런 건 어떤 의미에서 공통된 경험과 문제와 해법에 다가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잘 안다는 우리 중, 장군의학익진법이 다음 시와 연결되는 걸아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한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水國秋光暮)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떳구나(驚寒雁陳)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憂心輾轉夜)

새벽달 창 너머로 활과 칼을 비추네.(殘月照弓刀)

 

장군이 지은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의 전문이다. 가을빛은 저물고 기러기는 V자로 떼 지어 날아간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장군은 우연찮게 안진(雁陳, 기러기진)을 떠올린다. 임진년 여름(76일부터 13일까지 8)V자로 적을 에워싼 학익진법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전란이 있기 바로 직전 년도에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전란을 대비하던 장군은 남해 앞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며 골똘히 승리에의 방책을 떠올렸다.

 

대첩을 치른 그 해 늦가을에도 장군은 한산도의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며 다시금 절박한 생각에의 방아쇠를 당겼다. 거북과 자라를 3개월간 방안에 놓아두고 관찰하였던 그 질긴 습관처럼 조국의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가벼이 보지 않은 장군의 몰입의 경지를 엿보게 한다.

 

 

 

(왼쪽) 이순신 장군이 보았던 흑기러기는 지금도 남해 일대에 날아와 월동을 하고 봄이 오면 시베리아 등지로 날아간다. 계절은 변함없건만, 가을 철새를 바라보는 격지지감은 새롭기만 하다.  (오른쪽) 장군은 한산도의 저물어가는 수루에서 극도의 몰입을 한 끝에 좌수영 위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군대의 진영[軍陣]으로 비유해 극한의 일체감을 표현해 내는 시를 썼다. 이순신적 관찰과 집중은 이 시의 두 글자, ‘안진(雁陳)’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철마다 흑기러기, 회색기러기, 쇠기러기, 흰이마기러기, 큰기러기, 흰기러기, 개리 등 일곱 종의 기러기가 찾아온다. 국립공원철새연구센터에 의하면, 남해안으로 날아오는 기러기에는 흰기러기와 흑기러기 단 두 종류뿐이다. 이 중 장군이 보았던 기러기는 짐작하건대, 틀림없이 흑기러기(Brant Goose)였을 것이다. 먼 시베리아로부터 겨울을 나기 위해 무리 지어 날아 와 한산도의 저물어 가는 바다를 힘겹게 지나 소매물도나 다대포, 낙동강 하구 쪽으로 가거나 대마도로 가는 무리들이었다. 장군의 시선은 그들 무리에 가닿았다. 시기적으로는 첫 동정의 무리가 날아드는 11월경이었다. 새들은 깃털 사이에 공기를 가득 모으고 날개를 부풀려 추위를 막아가며 이 먼 바다 위를 날아갔다. 기러기의 V자형 대열도 인상적이지만, 흑기러기의 흰색 목 띠에 나 있는 쐐기모양[⫷⫸]의 흰 줄도 이 시와 관련되어 범상치 않다.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는 기러기를 신()·()·()·()·()을 갖춘 새로 여긴다. 장군이 기러기를 바라보며 스스로 반추하였을 단서가 된다.

 

만약 이를 요즘 식으로 해석한다면 어떨까? 기러기 떼의 이동을 보며 장군은 마치 오늘날 특정 사업이나 지역에서 우위를 점한 후 타 사업이나 지역으로 확산해 나가는 안행형(雁行形, flying goose) 우위확산 전략이나, 선행(先行) 기러기가 그린 항적(航跡)이 뒤 따라 오는 새에게 양력을 얻게 하는 윈드서핑 효과(wind surfing effect) 같은 걸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까닭에 한산대첩의 승리가 이후 전투에 지속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승리를 이근 모든 전투에는 이 원리가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선인들의 글 행간을 열고 들어가 보면, 관심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장군의한산도야음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행간(行間)을 주파하는 독법도 이와 같다. 많은 사념을 길게 드리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