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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자신과 세상을 변혁시킨 책 떨이와 책 쓰기

by 전경일 2016. 1. 28.

자신과 세상을 변혁시킨 책 떨이와 책 쓰기

 

흔히 독서를 하면 상상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당연히 일리 있는 얘기다. 하지만 독서가 주는 진정한 힘은 그보다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반추와 각성을 통해 통찰의 힘을 얻게 한다. 나는 이걸 가리켜 반각통(反覺通) 추성찰(芻醒察)의 세계라고 부른다. 기존의 사고관념에 반()하여 깨달음을 얻고, 이치를 되짚어 봄으로써 어리석음을 깨뜨려, 자신과 세상의 진면목을 살피게 한다. 맹자가 말한 깊이 파고들어 스스로 터득하는 경지(深造自得之境)가 바로 이것이다. 선인들이 책을 많이 읽거나[多讀], 많이 생각하거나[多商量], 많이 쓰는[多作] 이른바 삼다(三多)를 최고의 학문 정진 방안으로 제시한 것은 폭넓은 인식관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세 개는 서로 통하며 한 묶음이 된다

 

중국 남송 시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 중에 구양수(歐陽脩, 1007~1072)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의 독서법도 이런 것이다. 너무 가난해 모래 위에 갈대로 글쓰기를 했다는 그는 삼다일통(三多一統)을 통해 최고의 문인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아홉 살 나이에 퇴계 이황도 성리학적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데 그를 이끈 것도 책을 통한 각성이었다. 퇴계집》〈도산잡영(陶山雜詠)에 실린 글은 퇴계의 수련의 이면을 엿보게 해준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할 때, 간간히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뭇하여 밥 먹기도 잊어버린다. 정작 하다가 통하지 못한 것이 일을 때에는 좋은 벗을 찾아 물어 보며, 그래도 알지 못할 때에는 혼자서 분비(憤悱)한다. 그러나 감히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 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그 문제를 끄집어내어 마음에 어떤 사념도 없애고 곰곰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을 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법열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생의 고백은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이전에는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찬연한 고백을 남기고 있다. 책읽기의 즐거움은 선생이 읊은 시 한 편을 감상하는 것으로도 충족하다.책 읽기는 산 유람과 같다(讀書如遊山)에서 보여주는 책 속의 또 다른 경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책 읽기는 산 유람과 같다 했는데(讀書人說遊山似)

나이 들수록 산 유람이 책 읽기와 같다는 걸 알게 되네(今見遊山似讀書)

공력을 다해 봉우리에 오르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工力盡時元自下)

얕고 깊음의 경치를 살피는 것 모두 자기에게 달려있네(淺深得處摠由渠)

조용히 앉아 구름이 어찌 일어나는지 오묘함을 터득하고(坐看雲起因知妙)

산행의 행보가 정상에 이르매 비로소 원초를 깨닫네(行到源頭始覺初).

 

이 시에서 핵심 키워드는 시각초(始覺初)라는 석자다. 뜻인즉, 원천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누가 이 같은 원천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독서가 주는 깨달음의 경지는 퇴계 같은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여기 남송의 이학가(理學家)로 유학의 비조라 할 칭해지는 주희(朱熹)의 시관서유감이수(觀書有感二首)에 나타나는 책세상도 이와 같다. 제목처럼 지은이가 책을 보다가 느낌이 일어펄떡 일어나 쓴 시다.

 

반 이랑 네모난 못이 거울과 같아서(半畝方塘一鑑開)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잠겨 배회한다(天光雲影共徘徊)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問渠那得淸如許)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와서라네(爲有源頭活水來).

 

책을 읽는 건 못에 끊임없이 활수(活水)가 흘러들어 맑아지는 것과 같단다. 근원적 깨우침은 계속 흘러드는 물에서 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무지는 산산이 깨져나가고, 새로운 활로가 트인다. 그 길은 너남 없이 가보는 길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다.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에 가닿는 길이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어떤 길처럼, 길에 또 다른 길이 있고, 그 길은 길을 낳으며 다른 길로 자란다. 그러나 어떤 길도 그 첫 순간에 맞닥뜨린 선택 앞에서는 두렵고, 가슴이 설렌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났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미지의 길 앞에서 풀섶 우거진 길을 선택한 시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놓인 길은 걸어서라야 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풀이 발목을 붙잡으면 감발 치고 가면 된다.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데 그 정도 수고는 댈 것도 아니다. 이 시는 이 점에서 독서와 같은 면이 있다. 가고 펼치면서 깨닫게 된다.

 

독서는 사람됨에 반추를 가져오게 하는 영약이지만,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적 등불이 되기도 한다. 책과 사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 말을 뒤집으면 사상이 있는 글만이 세상을 엎어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진시황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황제사상을 유포하는 글이었다. 그는 책을 불태웠지만, 글이 불살라지지는 않았다. 글이 살아 있는 한, 책은 언제고 무덤 속에서도 다시 싹처럼 돋아난다. 책은 무한한 인류의 정신이 내장된 정신적 곳간이다.

 

이쯤에서 지난 세기와 금세기에조차 전 지구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사상가의 독법을 살펴보는 게 의미 있을 것이다. 두텁게 내리덮은 관념(불행하게도 늘 고정이란 단어와 짝이 되곤 하는)의 봉인을 풀고 보면, 세상을 바꾸려한 한 인간의 독서법과 만날 수 있고, 그가 열망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다른 점도 알게 된다. 인류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인 칼 마르크스가 바로 그다.

 

캐나다 요크대 정치학과의 마르셀로 무스토 교수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주요 사건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다가 3년간 중단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때 벌어진 연속적인 주요 경제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1847년 세계경제에 위기가 닥친 것과,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동시에 금이 발견된 것이다. 금은 새로운 경제에 활력소로 작용하며 그가 생각해 온 혁명의 시기를 늦추어 버렸다. 불확실한 혁명의 시기에 마르크스는 꿋꿋이 지난 노트들을 재검토하고 더 깊이 있게 연구했다. 이 때 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서를 정리해 26권의 발췌노트를 만들었는데, 그중 24권은 18509월에서 18538월에 작성된 것으로 이른바런던 노트목록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는 습득한 지식을 정리 요약했고,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탐독한 수십 권의 새로운 책도 연구하며 장차 저술하려는 작업에 필요한 사상을 습득했다. 런던 노트에는 그가 읽고 발췌한 수많은 작업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18509월부터 18513월 사이에 작성한 첫 번째 7권에서 그는 자신이 읽은 다음과 같은 책들의 목록을 추가하고 있다

 

토마스 투크의 가격의 역사, 저메인 가니어의 화폐의 역사, 제임스 테일러의 영국 화폐체계에 관한 한 시각, 헨리 소튼의 대영제국의 지폐신용의 성질과 효과에 관한 연구, 조한 게오르그 뷔쉬의 은행과 주화에 관한 제반 법칙,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또한 리카도 이론에 반대하거나, 일부 일정 개념을 발전시킨 저술인 존 데벌 투켓의 노동인구의 과거와 현재 상태의 역사, 토머스 호지스킨의 대중 정치경제학, 리처드 존스의 부의 분배에 관한 논문, 토머스 찰머스의 정치경제학에 관하여, 헨리 찰스 카레이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와 그 뒤를 이어서 아키발트 앨리슨의 인구의 원리, 아돌프 듀로 데 라 말레의 로마의 정치경제학, 윌리암 H. 피레스콧의 멕시코 정복의 역사, 페루 정복의 역사와 허만 메리베일의 식민화와 식민지의 교훈등이다.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방대한 책을 섭렵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대저(大著)들을 읽은 것은 경제 위기의 역사와 이론에 집중해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화폐 형태와 신용에 대해 보다 깊은 지식을 갖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참고가 될 만한 책들을 주의 깊게 읽고는 두 권의 노트에 자신의 지식을 요약해 화폐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고 간주할 만한 내용을 옮겨 적었다. 그러고는 여러 해 동안 계획해왔던 책을 저술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이론을 최초로 독립적으로 공식화 했다.

 

작업은 순탄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1850년에는 아들 구이도를 잃었고, 이태 후에는 딸 프란치스카를 잃었으며, 3년 후에는 8살 난 아들 에드가가 그의 손에서 떠나갔다. 절대 빈곤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대영박물관에 가서 연구했고, 심지어는 새벽 4시까지 규칙적으로 글을 쓰면서 자신을 신념을 책으로 표현해 내는 일을 굳건히 수행했다. 피나는 혼신의 노력의 결과,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호불호가 극명히 대립하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새로운 사상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근본적으로 이 학문(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가 개인적 연구의 길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룩했고, 종종 매우 통찰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 이후에는 진보가 없었다. ……나는 조만간 2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책! 그가 관심을 가진 건 세상을 바꾸는 혼의 무기였다. 마르크스는 연구와 글쓰기에 너무 많은 중단을 해야 했고, 방해를 받아 때로는 한밤에 계속해서 눈물을 쏟으며 격분하기도 했다. 그런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책 읽기와 책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지구의 운명을 바꿔 놓는 사상가가 되었다.

책은 무릇 사람과 세상을 흔들어 놓아야만 한다. 그럴 때라야 책이다. 자신과 세상을 격변시키는 못해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도와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는 꿈으로 가득한 책만이 읽을 가치가 있다. 오랜 시간 완숙을 향해 나간 인간의 대열은 어떤 경우에라도 책과 같이 운명을 했다. 내게 그런 책을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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