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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편지 공화국’과 ‘런던 라이브’를 아시나요?

by 전경일 2016. 9. 30.

편지 공화국런던 라이브를 아시나요?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것도 의미 있지만, 옛 지식을 잘 복원만 해도 뜻 깊게 쓸 수 있다.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사실(또는 진실)을 알게 되고, 인류 문화사적 가치를 찾아 낼 수도 있다. 스텐포드 대학에서 수행하고 있는 편지공화국 매핑(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프로젝트가 그 예에 속한다.

 

편지 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란 17, 18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원거리 편지 교신으로 지식과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해 온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예전에 유행한 펜팔과 같다고 보면 된다. 요는 특별한 사람들 사이의 서신 왕래라는 점이다. 이때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17, 18세기 유럽과 미국의 계몽주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원거리 편지교환으로 당대 지성으로서 지식과 감성을 서로 나눴다. 교류의 폭을 누적적으로 확장시켜 문화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인류사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잉태케 하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 무렵 유럽 사회에서 어떻게 계몽주의가 생겨났는지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의 수발신처와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역사를 이끌어 간 기록물상의 디딤돌인 셈이다. ‘편지 공화국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는 볼테르(1694~1778)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와 독일 계몽 철학의 서장을 연 철학자 라이프니츠(1646~1717), 프랑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1778), 만유인력 법칙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1642~1727), 세계 최초로 백과전서를 착상해 낸 드니 디드로(1713~1784) 등이다. 이 유별난 공화국은 그들이 남긴 수많은 편지의 수발신지, 발신 날짜 별로 기록된 공간, 시간 정보, 편지 소유자 등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낸다. 다이내믹한 디지털 콘텐츠의 보고다.

 

e메일이 없던 시절, 당대 사상을 대표했던 유명 인사들의 편지는 역사기록물 자체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적 특정 시간대에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수발신 위치를 세계 지도 상에 표시하면 세기를 바꾼 사상의 흐름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서신은 배편으로 전 세계 수신인들에게 가닿았고, 세대를 초월해 공유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독일의 과학자이자 예수회 수도사인 아타나시우스 키르허(1601~680)의 서신 네트워크는 예수회 선교회 사이에 가장 넓게 배포되어 마카오부터 멕시코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공화국은 세대와 국경을 넘어선다. 요즘말로 편지를 통한 18세기형 소셜 네트워크(SNS)이자, 지식 네트워크(K(knowledge)NS, )이며, 인식의 네트워크(R(recognition)NS)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볼테르는 당대 수백 명의 인사들과 180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를 추적하면 계몽주의 시대의 사고의 흐름은 물론 지적 교류사도 살펴볼 수 있다. 1700년에서 1750년 사이 편지를 추적해 보면 편지는 주로 파리와 런던을 지적 중심지로 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상호소통하고 여행과 출판 활동을 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해 나갔다

 

이 공화국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편지가 모아져 데이터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노력이 투입됐다. 전 세계에서 도움을 준 협력자들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전자 계몽주의데이터 베이스(DB)를 만들었는데, 이 소스를 스텐포드 대학에서 가져와 컴퓨터 공학 전공 학생들이 시각화해서 구축했다.

 

여기에 17세기 초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 750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 쓰인 6600여 건의 역사적인 기록물이 담겨져 있다. 또 관련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키고, 주요 키워드는 옥스퍼드 인명사전 등 50여 개의 다른 DB에 하이퍼링크 시켜 방대한 지식 정보 체계를 이루어 놓았다. 에라스무스 시대부터 프랭클린 시대까지 비평, 아이디어, 정치적 소식, 여행, 책 등에서 찾아낸 서로 나눈 아이디어는 상호 연결되어 상호 보충해 주고 있다.

 

처음 이 DB를 구축할 때 연구진들은 고문서 기록실이 어떤 모습으로 구축되어야 할지 고심했다. 결국 그들은 시간선과 역사적 사건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구축했다. 고기능의 시각화된 네트워크상의 한 그래프 노드를 클릭하면 해당 편지 목록이 나오고, 이걸 다시 클릭하면 개별 편지 내용이 나타난다.

 

실시간으로 당시의 지적 교류와 관련성을 추적해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모든 메타 데이터가 활용되는 미래형 정보 이용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매우 정교하고, 쌍방 간 비주얼화 되어 있다. 다른 한편, 영혼을 울리는 편지 속 문맥과 빅 데이터 이용 상의 질문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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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공화국매핑 작업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터. 계몽주의 시대부터 근대까지 유럽의 저명인사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메타 데이터 형식으로 상호 연결시켜 그 내용까지 다 볼 수 있게 했다. 이런 시도는 오늘날에조차 당대의 지적 흐름과 사상의 발전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게 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개별적이고, 흩어져 있던 편지들을 온라인상에서 하나의 편지 공화국으로 묶어낸 것은 그 당시 각 사상, 사고, 사건의 연계성까지 파악할 수 있어 디지털 방식의 역사 재구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작업은 스텐포드 대학에서 인문학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 같은 시도는 빅 데이터를 이용한 다양한 분야에서 정보의 상호 연결과 가공 및 활용상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매핑 더 편지공화국에는 17세기와 계몽주의 시대를 밝힌 지성들의 서신 네트워크가 비주얼로 재구성되어 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수 천 건의 데이터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며 새로운 시대의 사상을 불러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파리, 런던, 에든버러, 제노바를 수발신지로 하여 상호 소통의 각 접점을 보여주고 있다. 각 노드가 이어진 곳에서 유럽은 지적 혁명을 가져왔다. ©Stanford University. Mapping the Republic of Letters Project. Humanities+Design at CESTA, Stanford University.

 

 

물론 역사가들 중에는 편지 공화국이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영미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1500~1800년대 지적 네트워크였던 이 편지공화국이 국경 없는 잃어버린 대륙으로 불릴 정도로 인류사적 문화유산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네트워크는 실제와 어떤 면에서 같은 것일까? 이를 적용한다면 어떤 용도로 쓸 수 있을까? 그 변용 가능성은 다음에 소개할 또 다른 지식 구축의 예를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다음 예로 살펴볼 것은 영국 셰필드 대학과 허트포드셔 대학에서 편찬한 런던 라이브(London Lives)이다

 

이 문서는 1690년에서 1800년 사이 영국 런던 거주민의 삶과 관련되어 있다. 고문서상에 나오는 335만 개의 인명을 대상으로 동일한 인물을 추적해 18세기 런던 하층민의 수많은 생애를 디지털로 재구성해 냈다. 교회 교구의 기록물을 비롯해 각종 범죄와 재판에 관한 기록, 병원의 진료기록과 검시 보고서, 상공인 조합의 기록, 빈민 구제에 관한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대 영국의 서민층, 범죄자, 창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다. 그 예를 보자.

 

어느 소매치기의 삶-조지 링턴(1755~1804)

 

조지 바링턴(또는 조지 왈드런)은 런던의 가장 악명 높은 소매치기 중 한 명이다. 그의 성은 왈드런으로 1755514일 아일랜드 메이누스 코 킬데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은세공 장인(匠人)이고, 어머니(내쉬 또는 니스)는 양재사였다. 친부는 성이 바링턴인 영국 육군 장교출신이었다. 조지는 약종상의 도제로 들어가 더블린 블루 코트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여기서 충분한 적성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열여섯 살 되던 해, 그는 싸움에서 동료 학생을 찌르고 도주해 유랑 극단에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고도로 숙련 된 소매치기 기술을 배웠다.

 

도둑질을 함께 하던 패거리가 1773년에 체포 되었을 때, 그는 바링턴이란 이름으로 바꾸고는 영국으로 달아났다. 그러고는 런던 사교계의 신사들 사교 모임에 파고들었다. 그는 이때 자신을 주로 배우 또는 영국계 아일랜드 출신 신사로 알렸고, 때로는 외과 의사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곧 교회나 극장 등 품격 있는 사회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도둑질을 하여 악명이 높아졌다. 그의 범행은 신문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렇지만 그는 체포되거나 기소되지 않았다. 그것은 보통 피해자들이 언론에 보도되길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177612, 그는 드루리 레인 극장의 좌석에서 미망인인 안 더드만 여사의 한 쌍의 은단추와 실크 지갑, 반 기니 3실링 6펜스를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토트힐 필드 유치장에서 복역한 후, 1777115일 올드 베일리에서 다시 절도 행위를 하다가 채포돼 울리치에서 3년형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평결에서 그는 이제까지 올드 베일리에서 본 가장 고상한 도둑이라는 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은 그를 가리켜, “우리는 차링 크로스에서 가장 파렴치한 이웃과 함께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바링턴은 1년 미만의 옥살이를 한 후 1777년 말 감형되어 출옥했다. 17783, 그는 특별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군중이 붐비는 교회 안에서 엘리자베스 아이론몽거의 은 시계줄과 유리실이 든 3파운드짜리 시계를 훔친 협의로 그 해 4월 다시 재판을 받고 헐크(선체)에서 5년간 중노동을 치룰 것을 선고 받았다.

 

이 재판에서 그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매우 길고 현란하며 감정이 풍부한 진술을 해 그는 올드 베일리 기자들과 언론에 일약 조롱거리가 된다. 언도된 형의 일부를 복역한 후 형이 너무 가혹하고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는 점을 호소하여 감형을 받는다. 그러곤 평생 영국 밖으로 추방된다는 조건 하에 17824월에 풀려났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추적되다가 178212월 들어 런던의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다시 절도 혐의로 체포되는 것으로 표면으로 부상한다. 사면 조건을 위반한 협의로 올드 베일리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이 평생 추방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는 점을 몰랐고, 건강이 너무 악화돼 헐크에 가서 복역할 수 없다는 매우 기상천외한 언설을 펴 원래 언도받았던 5년 형기를 채우도록 뉴게이트 감옥으로 보내지는 판결을 받는다

    

1년 후인 17842, 바링턴은 코벤트 가든 오페라 티 룸에서 실크 지갑과 상당액의 돈을 훔친 혐의로 다시 올드 베일리 법정에 서게 된다. 17852월에도 그는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시계, 시곗줄, 씰 등을 절도했고, 178912월에도 같은 극장에서 지갑과 상당액의 돈을 소매치기했다. 이 모든 사건에서 그는 범인으로 식별이 잘 안되거나, 직접적인 증거의 부족, 또는 너무 오랫동안 주요 증인을 부를 수 없는 상황 등이 작용해 무죄가 선고된다. 그는 배심원들을 잘 알고 상대할 변호사를 선임하였고, 법정에서 교묘한 언사로 진술하여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올드 베일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엔필드 경마장에서 헨리 헤어 타운센드 씨의 시계와 부속품을 훔친 혐의로 17909월 법정에 들어섰을 때였다. 변호인 윌리엄 게로우의 선방과, 바링턴 자신은 자기가 범한 범죄는 큰 자본을 훔치려 한 것이 아니므로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는 식의 매우 길고 화려한 진술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우스 웨일즈 향무소로 이관돼 7년형을 살도록 언도 받는다.

 

17913, 조지 바링턴은 죄수 호송선을 타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 그 해 9월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비록 영국에는 없었지만, 그의 악명은 자자했다.졸리 라이의 보타니 만()으로의 여행이란 인기 발라드는 그를 빗대 죄수를 수송하는 것은 종달새를 수송하는 것으로 표현했고, 죄수들조차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바링턴을 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껄여대곤 했다. 바링턴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거짓으로 수많은 출판물, 편지, 저널 및 연극대본 등에 쓰였다.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된 것은 그의 전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792년 그는 조건부로 사면을 받았다. 이어 파라마타 죄수 감독관으로 임명되고, 파라마타와 혹스 베리 강 근처에 많은 땅을 매입했다. 1794에는 파라마타의 경찰서장이 되었고, 1796년에는 그가 받은 모든 형에 대한 사면이 내려졌다. 1801년 그는 건강 악화로 퇴임해 자신의 농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18041227일에 사망했다.

(Source: http://www.londonlives.org/static/BarringtonGeorge1755-1804.jsp. 번역 및 재구성 ©전경일)

 

이와 같은 조지 바링턴의 생애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행된 전기류의 사전과 1790년대의 죄수 수송에 관한 이야기 및 각종 서적 등에 나오는 그의 기록을 전부 모아 재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런던 라이브에는 19세기 영국 뒷골목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DB에는 다음과 같은 신원확인 요청 문의가 쏟아질 정도다.

 

제인 코플란은 1762년 세인트 클레멘트 덴마크에 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찾아 줄 수 있겠습니까?

 

제인 코플란은 1797년 런던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녀의 정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용자 스스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의 신상을 찾고 추가 문의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록물들은 연대기와 함께 기사체로 되어 있어 한 인간의 일생을 재구성해 준다. 보통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사람의 기록물일지라도 이렇게 DB로 구축해 놓으면 당대 사람들의 일생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더불어 당시의 각종 법, 제도, 의료 수준, 형벌 내역은 물론 오래 전 고인의 신원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 범죄자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온 오늘날 자신의 직계 조상인지 확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후손들 으로서는 떨떠름할 테지만 말이다.

 

이 같은 기록물은 사실의 재구성이지만, 강력한 스토리텔링이 되기도 한다. 복원과 복구차원을 넘어 생생한 리얼리티까지 보여준다. 이렇게 재활용 가능한 역사적 기록물은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아직 링크해 놓지 않는 상태다.조선왕조실록의 방대한 데이터를 연결하면 역사적 격변과 사건들이 어떻게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 맺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당대의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역사의 흐름을 꿰는 주요 자료로 거듭날 수 있다.

 

우리고서인신주무원록,일성록,흠흠신서나 각종 검안(檢案) 기록을 재구성하면 조선시대 각종 범죄 수사기록을 복구해 낼 수 있다.벽온신방(壁瘟新方)을 꿰면 전염병이 창궐했던 시대의 계보와 전염병의 종류 및 피해 상황, 전염병이 인구수 변동에 미친 영향을 복구해 낼 수 있다. 또 실학자인 박지원-박완채-박규수-개화파 다수로 이어지는 실학적 계보를 연결하면 근대의 성취와 좌절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사의 어두운 일면으로서 17세기 우암 송시열류()의 존주론자들을 연결하면 어떻게 매국적 사대주의가 오랜 시간 횡행해 왔으며, 그 뿌리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이어지며 옥죄고 있는지 계보를 따져볼 수 있다. 또 구한말 친일 행적에 앞장섰던 일진회가 어떻게 강화도 조약 체결시점인 1876년부터 을사늑약 원년인 1910년까지 34년간 무려 14175명이나 늘어나며 친일매국 행위에 앞장서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실과 현재성을 살펴볼 수 있다.

 

또 한국 현대사에서 군사 쿠데타 주도세력이 어떤 인적 관계 하에 헌법을 유린하고 국기를 흔들었는지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며, 국가부도 사태를 초래하고도 기소조차 당하지 않은 세력들이 어떻게 한국정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에 바로 닿기에는 어떻게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메타 데이터 작업은 이처럼 커다란 효익이 있다.

 

더불어 런던 라이브에서처럼 사건을 재구성해 스토리텔링 하는 작업도 가능하다. 자료가 튼튼할 때 훌륭한 작품이 나올 여지가 높아지는 작가나 예술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마치 앞서 다룬 조지 바링턴의 생애가레미제라블이나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그리는 당시 인물상을 엿보게 해주듯이 말이다.

 

이처럼 오래 묵거나 전혀 손길이 닿지 않는 정보도 잘만 연결해 놓으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건 빅 데이터가 만드는 다른 면으로 순()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따라 세상의 선악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를 끊임없이 반면교사 삼는 것은 어느 때나 미래를 여는 데 변함없이 훌륭한 이정표임에 틀림없다. 역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은 어떤 경우라도 건너 뛸 수 없다. 사실을 구체화할 때, 진실은 보인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