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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이끌림의 인문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창의적 사고법

by 전경일 2016. 10. 6.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창의적 사고법

 

세상의 모든 지식은 혼혈이다. 이 말은 언제고 맞다. 낡아 보이는 지식도 뒤섞으면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과거에는 볼 수 없던 시각으로 사물이나 사상(事象)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착상으로 사고의 영역 간 벽 허물기를 직접 살펴 볼 수 있는 예가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 경복궁 속의 수학또는 경복궁과 관련된 실생활 수학이란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경복궁 처마에서 수학읽기로 알려진 문제와 그 원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눈앞에 보이는 처마의 서까래에서 발견되는 수학적 원리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처마 끝은 y=cosh x=(ex+e-x)/2 함수(hyperbolic cosx)를 포함한 현수선(catenary) y=c1 cosh(x-c2)/c1을 떠올리게 하고, 처마 밑에 있는 무늬는 원이 굴러갈 때의 자취를 나타내며 x=a(θ -sinθ), y=a(1-cosθ )로서 cycloid 방정식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던 것들에 조금만 눈을 돌려도 생활 속 수학은 어디서든 찾아진다.

 

이와 같은 색다른 수학 읽기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에 실시된 것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참조한 미국의 교실을 예로 들자면, 1950년대부터 새로운 수학으로 변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방식은 이전의 수학 교육법을 완전히 무시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내 미국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서는 이 새로운 수학은 채택되었고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학부모들도 아이들이 가지고 온 색다른 수학 문제를 보고는 당혹해 마지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전의 수학에서는 ‘2에서 3은 뺄 수 없다고 배웠는데, 이제 그것은 가능하다. 답은 -1이다고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푸는 문제였다. 그러던 것이 초등학생 영역으로 훌쩍 뛰어내려온 것이다. 당연히 그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사고의 폭도 넓어졌다. ‘마이너스(-) 세계를 접했으니,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두 배나 넓어진 것이다.

 

 

20세기 중반 들어 미국에서 일어난 수학 교육의 변화는 일테면 수직선을 통해 수의 상호관계를 수없이 발견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직선을 오른편으로 같은 간격으로 쪼개면 양수, 반대로 쪼개면 음수, 12의 수직선은 2개씩 6, 혹은 4개씩 3회 건너뛰기를 하면 도달할 수 있다는 식으로 수를 시각적으로 파악하게 했다. 학생들에게 수는 이제부터 추상이 아니라 실생활의 눈에 들어오고, 수학의 본질적 이론은 더욱 선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다. 이런 시도는 수가 가진 근본 원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으로 암기식 교육이 주는 효과와는 전혀 다른 창조적 사고를 불러왔다. 이 같은 발상의 전환은 융합형 지식이 요구되는 시대에 각 학문 분야에서 더욱 심층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학부모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학용어를 거의 몰랐었던 아이들 입에서 집합’, ‘교차’, ‘가환성(可換性)’, ‘결합성같은 전문용어들이 나오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모 세대의 수학과 완전히 다른 생소함이 부른 결과였다.

 

어린 학생들이 교실 가득 불러일으키는 창조적 감동은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교육방식에서 개혁을 추구해 온 결과였다. 이런 미국식 교육 변화가 일어나게 된 배경은 1957년 구소련이 스푸트닉 우주선을 발사한 게 큰 계기가 됐다. 그 결과 1952년 이래 수학자나 교육자, 그리고 교과서 발행소 등에서 실험적 연구 계획으로 추진되던 것이 1960년대 중반에 이르면 미국 전역의 135000 학교 중 3분의 2가 이 같은 수학 프로그램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 교육의 주요 관심사는 지금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수학이 가장 유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들이 자기 스스로 수학을 구축할만한 이해력을 심어주는 것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에는 사고의 근본을 바꾸기 위해 전격 소크라테스식 문답법도 채용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수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추론하고 검증하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법칙을 스스로 궁리해 내기 시작했다. 20세기 교수법에 있어 그야말로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근본적인 교육 변혁은 현대 들어서만은 아니다. 알고 보면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왔다. 너무나 잘 알려진피타고라스 정리직각 삼각형의 직각에 면한 긴 변의 제곱은 직각을 이루는 두 개의 짧은 변의 제곱을 합한 것과 같다이다.

 

이 정리는 음악분야에서도 쓰인다. 알려진 것처럼 음계 속엔 수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즉 음악의 하모니와 1, 2, 3, 4, 5라는 정수 사이에는 기이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현을 세게 잡아당겨 음을 내고 다음에 길이가 2배 되는 한껏 뻗친 현을 튕기면 전보다 꼭 1옥타브 낮은 음이 나온다. 어떤 현으로 음을 내든 정수비로 나타내는 간단한 분수를 기초로 현의 길이를 늘려 나가면 음계는 그에 따라 낮아진다.

 

예컨대 C선의 길이의 1/15은 반음정에 해당하므로 그 길이를 C16/15으로 하면 다음 저음 B()가 되고 6/5이면 A(), 4/3이면 G(), 3/2이면 F(), 16/9이면 D()가 된다. 만약 길이를 2배로 늘리면 1옥타브 아래인 C()로 된다. 피타고라스는 이 C, F, G1옥타브 아래인 C와의 정수 관계는 어떤 음계로 대체해도 불변이라는 것을 발견해 냈다. 그는 이 발견을 통해 모든 조화, 아름다움, 자연 현상을 정수관계에 의해 표현하고자 했다. 일테면 수학으로 음악 읽기인 것이다.

 

고대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음정이 정수의 비례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발견해 냈다. 바이올린 G선상의 손가락의 위치가 여기 해당된다. 손가락 위치 은 미들 C보다 1옥타브 낮은 로우C의 음을 내는 현의 길이를 나타내고, 는 현의 길이의 3/4자리에서 로우C음의 위인 F음을 낸다. 은 현의 길이의 2/3자리에서 G음을, 1/2자리에서 미들C음을 낸다.

 

수학과 더불어 타 분야와의 연관성은 문학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앨리스와 레드 퀸이 그 예가 된다. 레드 퀸은 여기서는 제자리에 있기 위해 계속 달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계속 달리지만 운명의 족쇄가 채워진 듯 제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여왕이 너무 빨라 간신히 속도를 맞추기에도 바쁘다. 그런데도 여왕은 계속해서 더 빨리! 더 빨리!”라고 소리친다. 이상하게도 그들 주변에 있는 나무며 다른 것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없다.

앨리스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나, 우리가 계속 이 나무 아래에 있었던 건가요? 모든 것이 아까와 똑같은 자리예요!”

당연하고말고. 어떨 거라고 생각했니?” 여왕이 물었다.

글쎄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한참 동안 빨리 달리면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되거든요.”

느림보 나라 같으니! ,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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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이 대목에서 내가 특별히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들은 왜 뛰는가? 그들이 돌아 온 곳은 예전과 같은가? 다른가? 그들은 이전과 같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변모해 있는가?

 

콜롬비아 대학의 철학 교수를 지낸 어네스트 네이겔 박사는 이 동화의 한 대목을 설명하며 동화 속 주인공인 앨리스의 거울로 세상을 보고자 했다. 그가 찾은 수학으로 읽는 세상이 그것이다.

 

동화 속 앨리스는 거울 저편에 있는이상한 나라의 언어에 빠져든다. 하얀 기사가 자작의 노래를 앨리스에게 들려주는 그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이란 대목을 살펴보자. 자작의 말에 앨리스는 그렇지 않으면 무어지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기사는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는다고 명쾌히 말한다. 원문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기사가 말했다.

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노래란다.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울든지 아니면

아니면요?”

기사가 갑자기 말을 끓었으므로 앨리스가 물었다.

아니면 울지 않지. 당연하잖아. 그 노래의 제목은대구의 눈이라고 불리지.”

, 그게 그 노래의 제목이군요. 그렇죠?”

앨리스는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면서 물었다.

아니야, 이해를 못 하는구나.”

기사가 조금 짜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제목이 그렇게 불린다는 거야. 진짜 제목은늙고 늙은 남자.”

 

- 루이스 캐럴의 원작에 대한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깊이 읽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겨울 나라의 앨리스

 

네이겔 박사는 기호를 써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호 논리로 번역했다.

 

(x) “이하와 같은 x가 존재한다.”

……일 때, 더욱이 꼭 그때만

만약…… 그렇다면……

또는

~ “……은 아니다를 뜻하며 그 아래의 글을 부정한다.

 

기사의 노래를 KS로 간단히 표시하고, 노래를 y, 듣는 이를 z, 시간을 t로 나타내면 기사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x)(y)(z)(t)((yKS이다xKS이다). (z는 시간 t에 기사가 x를 노래하는 것을 듣는다((x는 시간 tz의 눈에 눈물을 번지게 한다)~(xtz의 눈에 눈물을 번지게 한다))

 

이런 골치 아픈 기호는 우리를 생소하게 만들고 엉뚱함에 빠지게 한다. 보통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는 의미를 부각시켜 준다. 앨리스의 경우보다 더 복잡한 법학이나 형이상학에서의 막연한 의론도 기호논리학으로 풀면 그 뜻이 지닌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예는 수학으로 동화 읽기가 될 것이다.(너무 어렵거나 골치 아픈 문제라면 대충 넘어가도 된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이 수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고, 수학과 다른 분야를 연결시켜 놓은 걸 알 수 있다. 이런 건 너무나 오랫동안 암기식 교육에 목매 온 우리와 많은 점에서 다르다. 앨리스의 이 이야기가 순전히 패러독스이듯, 교육현실은 상상이 못 따라갈 정도의 패러독스로 가득하다. 특히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을 3,000가지나 제시하는 입시정책 입안자들의 머릿속이 그러하다.

 

지식 융합이 강조되며 창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선진국 추격형 교육에서 우리도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 쪽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이 점에서 선진국은 창의성 면에서도 앞서 나간 걸 알 수 있다. 대학교육은 더 심화심층 되어 있는데 미국의 MIT대를 예로 들자면, 이미 30년 전에 대부분 교육이 사전에 만들어진 답에 도달하기보다는 문제를 통해 생각하게 하는 목적 하에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건축물 모델을 만들 때에도 공학과 건축학의 제요소를 결부시키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그런 것이 요즘에는 각 학문 영역의 지식을 총동원해 융합 지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제가 주어지고 있다. 당연히 융합 과정이 없다면 창조성은 높게 평가받을 수 없다. 모든 교육도 창의, 연습, 모의실험, 실지교육으로 이루어져 창의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있다. 이런 융합형 교육을 위해 이들이 마쳐야 할 교과 과정은 무엇일까?

 

전 학기 동안 철학, 예술, 역사 등을 묶은 종합 인문과학 교양과목을 취득해야만 한다. 이처럼 전공 이외 타분야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이런 학습습득 방식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1980년대부터 실시해 왔기에 누적 효과도 만만찮다. 이런 점은 우리나라 대학 경우처럼 인문학과를 대폭 축소하고 통폐합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기업이 본격적으로 대학 경영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각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창조 교육의 내용을 살펴보면, 영국의 경우에는 영국 교육과정평가원(QCA)2000년부터창의성: 찾아라! 촉진하라!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북구 핀란드의 경우에는 학생들로 하여금 창의성을 발현케 하기 위해 핀란드어, 영어는 물론이고, 화학, 생물, 음악까지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에세이 방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다. 창조적 사고를 무한히 높이려는 목적에서이다.

 

가까운 일본에서조차 1980년대부터 시작된 추격형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통합적 학습시간제도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선진국 따라잡기 교육에서 창의적 사고기법,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경복궁 처마에서 수학 읽기를 하거나, ‘수학으로 동화 읽기차원에서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기호논리학으로 풀어보거나, 음계 속에서 수학적 요소를 찾아보거나 하는 것들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통합적 사고를 가져온다. 이 점에서 그 자체로 창의적이다. 모든 학문 영역에 사고의 변혁을 가져오고, 성찰적 세계관을 확장시켜 준다. 다양한 학문적 시도를 도외시한다면, 우리가 맞을 가장 가까우며 치명적인 손실은 미래의 최대 가능성인 다양성을 죽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른바 스펙 사회는 이 모든 가치를 압살할 태세로 목전에까지 밀려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인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 대학에서는 인문학과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누가 이 같은 암전(暗轉) 상태로 학문을 끌고 가는가? 얄팍한 세계 인식과 경험주의에 맹목적인 확신까지 겹친 졸속 기업인들이 대학 운영에 뛰어들어서인가? 모든 면에서 무식하고 표의식만 하는 정치인의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인가? 정치권력에 빌붙는 교육자 인양 처세하는 노회한 지식인들 때문인가?

 

비좁은 실용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건 이들의 극히 개인적인 견해와 취향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지금처럼 이런 자들이 권좌에 앉아 중요 제도를 주물럭거리는 것 놔둔다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미래 없는 스펙의 덫에 갇혀 곧 질식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학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떤 조치들이 필요할까? 낡고 허물어진 구시대적 사고에 찌든 자들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교육을 설계하고 운영할 권한을 되찾아 오는 것이다. 학문의 정원을 뒤덮은 옹졸한 생각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는다면,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은 말라죽고, 이 전당에는 날림의 쑥부쟁이만 잔뜩 우거 서게 될 것이다. 미래의 불행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이끌림의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