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시계방에 걸린 시계들은 잘 돌아가고 있다

 

 

시간, 너는 무엇이냐?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 죽은 자의 뼈에 엉기는 이끼,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 , 시간이란 자는 소리도 형체도 없이 죽음의 사자처럼, 생명의 전령처럼 자연과 공간을 넘어 무심히 우주를 지나간다. 순간만 보던 한 인생이 지금 내 앞에서 소멸하고 있다. 마치 짓밟힌 꽃처럼.”

 

-전경일의 노트 중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 8시부터 9시까지의 1시간은 태양이 2125만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지표면을 서서히 밝히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지표면에 사람들이 일정한 비율로 산포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3억여 명의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태양빛을 받는 셈이다. 지금 내가 쪼이는 햇빛은 중국 산동성의 어느 시골 마을 촌부도 쪼이고 있고, 유럽의 한 노천카페를 비추는 햇살은 도버 해협에서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그을린 얼굴도 비추고 있다.

 

태양과의 만남은 일상적이며 반복적으로 벌어진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함께 인간은 오랫동안 적응해 온 습관대로 지구상 모든 동식물과 더불어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순간, 모든 생명체는 부활하며 하루의 시계 축은 어김없이 째깍째깍 소리내며 돌아간다.

 

 

지구는 하루 24시간 동안 360도 회전한다. 따라서 한 시간은 15도에 해당된다. 영국 그리니치의 정오를 기점으로 15도 서쪽 지점은 11시이고, 30도 서쪽 지점은 10, 45도 서쪽은 아침 9시이다. 지구 총면적은 약 51천만 제곱킬로미터로 햇빛이 1시간 동안 비치는 15도의 면적은 약 2125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이곳은 인간을 비롯한 무수한 생명체가 빛을 받으며 생명으로 약동한다. 암흑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대략 12시간 주기로 반복되는 대자연의 움직임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당신의 하루는 생명의 약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구가 밝아 옴에 따라 하루 시간은 만물을 깨어 있게 하고, 만물의 성장과 함께 한다.

 

대자연의 이 같은 순환 원리를 문학적으로 비유한다면, 어두운 죽음으로부터 밝은 생명에로 전우주적인 권력이 넘어오는 것과 같다. 팽창하던 어둠은 권좌에서 밀려나 마침내 쫓겨나고 빛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의해 그 존재조차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영원할 것만 같던 낯의 시간이 계속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대자연의 균형 원리는 지구상의 위치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대략 오후 6시 무렵이면 반대로 뒤집힌다. 광휘의 빛의 세계로부터 점차 어둠의 세계로 지구의 절반은 속박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술이 빚어내는 비밀이자, 보다 근본적으로 지구의 회전이 만들어 낸 비밀일 것이다. 우리 인생은 불가피하게도 - 이 시간의 그물에 걸려 있다. 가녀린 몸짓으로 떨며.

 

시간은 모든 비밀을 감춘 채, 그 움직임이 인간에 의해 측정되어지며, 계량되고, 다른 의미에서는 상징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하루-일주--년 등으로 표시되는 태양계의 주기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대체로 인간과 계절의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 모든 동식물들이 맞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을 분류해 보면 시간은 다루는 사람들에 따라 현격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다른 것일까?

 

예를 들자면, 천문학자는 몇 십억 년이라는 대시간(大時間) 속에서 우주적 시간을 헤아리며 현생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물리학자나 공학자들은 몇 십억 분의 1초까지 나눈 소시간(小時間)으로 세상을 보면 산다. 다윈을 추종하는 현대의 생물학자들은 진화 과정과 생태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곤 한다. 모두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다루는 시간, 기준으로 삼는 시간도 각기 다르다. 살아가는 시간조차 천차만별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간 속에 편재하는 것이다. 이 기준은 자신의 관심사나 하고 있는 일과도 관련 있다.

 

물리학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질량이나 거리와 함께 우주만물을 측정하기 위한 근본적 기준 중 하나이고, 철학자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사유하는 지표가 되곤 한다. 종교론자의 경우에는 신과 만나는 경외스런 시간이며, 비즈니스맨에게는 커피 잔을 들고 허둥지둥 아침 회의가 있는 사무실로 달려가야만 하는 시간과 관련 있다. 시간과 동떨어진 곳은 한군데도 없다. 인생 전체로 보아도 생로병사의 과정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극히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 소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육이 벌어질까?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무수한 시간 속에 각각의 인생은 놓여 있다.(갠지스 강의 모래알은 흔히 무한하다는 의미로 항하사(恒河沙)’로 불린다.)

 

다른 한편, 시간이야말로 가장 평등한 존재하기도 하다. 정지하고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비상한다. 그러면서도 역으로 정지한 적도 없고, 지나간 적도 없으며, 돌아오지도 않는다. 손에 쥐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 보이지 않게 빠져나간다. 물과 달리 만져지지도 않는다. 공기처럼 코로 맡아지고 폐로 호흡되는 것도 아니다. 공간처럼 놓여 있는 것도 아니다.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극히 진행 과정 중에 있는 시간 속에 우리 모두는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변하는 점이라면 이 무수한 시간 속에 모든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만물은 태어나서 죽으며, 꽃은 피어났다 떨어지고, 새는 먹이를 물고 허공으로 치솟고, 물고기는 물속에 잠긴다. 계절은 얼었다 녹으며 옷을 갈아입고, 인생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겪는다. 영겁의 시간 동안 반복되어 온 우주적 흐름 속에서 이런 하찮은 일들은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매일 매일 업무는 변함없이 수행된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 너무나 크면 하찮게 여겨지는 까닭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간 없이 세상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유구한 깨우침을 떠올린다. 어느 누구도 어떤 일정 시간을 사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걸 가리켜 인생의 시간이라 부를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다. 한 개체가 사는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각자가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다.

 

시간이 몇 시 몇 분이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구획되고 관리된 것도 알고 보면 그리 오랜 적이 아니다. 현재와 같이 시간이 중요성을 띠게 된 것도 불과 14세기에 들어서다. 유럽의 몇몇 도시에 기계 시계가 설치되고, 하루에 스물 네 번 차임이 시각을 알리면서부터다. 그전의 하루는 엄격한 구분하에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나누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밤 시간의 시작점과 밤 시각의 모든 5등분 점, 그리고 매 두 시간마다 국가의 공식 시계가 대략의 시간을 알려주었을 정도였다.

 

오늘날엔 항공기 예약을 한다거나 출장 스케줄을 잡는 등 모든 일상적인 면에서 시간은 통일 되어 쓰이지만, 별로 오래지 않은 적까지 국제적으로 공용된 시간이란 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는 1880년경 뉴욕 주의 버펄로 역에 세 개의 시계가 동시에 걸리면서 통일된 시간으로 각 지역을 나누게 되었다. 이 역에 걸린 세 개의 시계는 각 지역과 그곳의 현재 시간을 가리켰다. 하나는 버펄로의 지방시, 하나는 뉴욕 센트럴 철도가 채택하는 뉴욕시의 지방시, 또 하나는 남()미시건 철도가 쓰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지방시에 맞춘 시간과 시계였다.

 

 

 

18831011일 미국 철도회사의 전국 시간회의 결과 미국의 시간은 네 개의 시간대로 나누어지고, 각 시간대에서 인접지대와 한 시간의 시차로 통일 시간을 지키기로 정해졌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뉴욕 주 버펄로 역() 구내에 걸렸던 세 개의 시계()는 각 지역의 시간을 구획하는 기준으로 전시되어 쓰였다. (Source: Buffalo Central Terminal archive)

 

 

그 뒤 다소 수정은 가해졌으나, 그 시간대는 현재 동부, 중부, 산악부, 태평양 연안부 표준시 구분의 기본이 되고 있다. 다시 1883년 워싱턴 국제회의 결과, 그 시간대 방식은 전 세계에 적용된다. 그보다 19년 전인 1865년 이래 미국의 표준시간은 해군관측소에 있는 70대 이상의 일련의 주시계(主時計)에 의해 정해지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시간 표준은 떠오르는 미국의 국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시차의 기준이 된다. 지금 웬만한 공공건물에 들어서면 시계가 서너 개 정도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 뉴욕, LA, 런던, 파리 등이나 시간을 보려는 목적에 따라 이스탄불, 델리, 뮌헨 같은 도시들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들도 있다. 주로 여행사 건물이나 다기능 손목시계 상에서 우리는 먼 곳의 시간까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정말 시간을 보고 있는가? 시간은 보여 지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에서 비켜난 질문일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추상적이다.

 

시간은 각자에게 상이한 두 기준을 드러내 준다. 예컨대 우리가 쓰는 시간은 어떤 것은 간격이고, 다른 어떤 것은 시점이다. 내가 태어나서 죽는 시간은 간격이고, 내가 태어났거나 죽는 시간은 시점이다. 년은 순차적으로 보다 큰 시간으로 수렴되는 단위이고, 15분을 가리키는 시각(時刻)4개가 모여 1시간을 이룬다. 바늘이 움직이는 사이 모든 일이 벌어진다. 속도를 단축하려는 운동선수거나, 일상의 생활인이거나 누구든 주어진 인생에 관해서는 특히나 그렇다.

 

시간과 관련되어 영국이 낳은 걸출한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그의 마지막 시모래톱을 넘어서(Crossing the Bar)에서 유한과 무한과의 경계선을 상징하는 모래톱을 넘어 파이롯(the Pilot)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시인은 모래톱 건너 육지에서 바다로,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간다. 이 시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장례식장에서도 불리어 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해 지고 저녁 별 빛나는데

날 부르는 또렷한 소리!

모래톱은 울먹이지 말라

내가 바다로 떠나갈 때

 

가없는 바다로부터 밀려든 물살이

다시금 제 집으로 돌아설 때

소리와 물거품은 찰대로 차서

요동하는 물결은 잠든 듯하네.

 

노을이 깔리고 만종이 울리면

뒤이어 내리는 어둠 속에서

나누임을 서글퍼 말라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이 몸 물결에 멀리 실려 가도

내가 배를 띄울 때

나의 선장과 대면할 수 있길 바라네.

 

삶 속의 죽음, 이미 내 손을 흘러 가버린 날들은 모두 시간 속에 잠들어 있다. 이것이 인생이자, 인생을 초극해 버린 시간이란 놈이다.

우리는 가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 휩싸이곤 한다. 어떤 땐 시간이 흐르지 않는 어떤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가끔 아일랜드 시인 W.B.예이츠의 시극욕망의 땅(the Land of Heart’s Desire)의 다음 시구에 사로잡힐 법하다.

 

아름다움은 가실 줄 모르고

쇠퇴의 밀물은 차지 않으며

지혜는 기쁨으로 차오르고

시간은 영원한 노래인 곳

그러나 꿈속에서는 시간이 멈추는 일이 있어도

눈을 뜨면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시간을 역행시킬 수 있는가 하는 두 번째 문제도 역시

똑같은 몽상을 부채질한다.

날아가는 시간아 되돌아와 다오.

오늘밤만이라도 나를 어린이로 되돌려 다오.

 

시간을 역행시켜 과거로 돌려보려는 욕구는 누구나 갖고 있으나, 그것이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그와 같은 마력을 가진 영약을 만들고자 연구에 몰두했고, 파우스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겼었다.

 

시간은 우리가 주는 최고의 선물, 우리만이 줄 수 있는 것이지.”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세울 수 없다. 역행시킬 수도 없다. 그럼에도 너무나 큰 기쁨이나, 깊은 슬픔 앞에서는 시간은 멈춰 버린 것 같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더딘 시간의 흐름이여, 걸음을 멈춘 것 같구나······라고 읊어댔다. 이 감정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해일처럼 휩쓸어 버린다. 영원의 순간을 경험한다.

 

인간의 전생애는 우주의 대시간에 비교하면 극히 촌각에 불과하다. 극도로 나뉜 미세시간으로 따지자면 너무나 길고 더딘 시간이다. 느리기만 한 갠지스 강이 흐르며 남기는 모래같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럼에도 태양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들은 째깍째깍 울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우주의 시계방에 가득 걸린 시계는 각각 크기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그들이 가리키는 시간도 다르다. 그럼에도 시계들은 모두 다 잘 돌아가고 있다.

 

모든 시계는 고유의 시간을 가리키며 정해진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보아라, 살아 있는 동안의 그대는 무엇인가? 우주에서 가장 작은 시계를 움켜쥐고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여!

  C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