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요?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 네바다에 위치한 시애라 사막. 이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 벨딩 땅다람쥐(Belding's Ground Squirre)가 살고 있다. 이 조그마한 설치류는 1년 대부분은 동면을 취하고, 여름 한철(3~4개월)에만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잠에서 깨는 것과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서는 굴 밖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천적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맹금류, , 족제비 같은 포식자들을 만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일상적 상황이며, 삶은 목숨을 내 건 위험한 도박에 내맡겨져 있다. 새끼를 낳아도 가을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놈은 40~60퍼센트에 불과하다.

 

이들은 생존에의 가능성을 높이고자 위험이 닥치면 경고음을 내 무리에게 위급상황을 알린다. 호각 소리는 생존에의 무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들 무리에겐 주요 역할 분담 원칙이 있다는 점이다. 포식자가 출현하면 땅다람쥐 중 선택된 누군가는 경보를 울린다. 만약 근처에 사촌들이 살고 있다면 유독 암컷들만이 이 위험을 감수한다.

 

그들이 사촌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땅다람쥐의 입과 등에서 나는 두 개의 냄새를 통해서이다. 냄새로 그들은 서로가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까운 사인지 안다.

 

긴급 경보 시 호각을 부는 암컷은 보통 경보를 내지 않는 쪽보다 위험률이 두 배나 더 높다. 호각을 부는 쪽이 무리의 안녕을 위한 희생적 소수(self-sacrificing minority)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암컷들은 왜 이 같이 위험을 감수할까?

  

 

벨딩 땅다람쥐(학명: Spermophilus beldingi)는 포식자들의 공격에 호각 신호로 경계를 알린다. 그러나 무리 중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같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종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다양한 유전자를 보전함으로써 종의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진화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이 같은 벨딩 땅다람쥐의 행동 방식은 사회적 행동유형, 기업의 구조조정 방식 등 여러 현상을 해석하는데 유용한 방법으로 쓰인다. 더불어 인간이 만들어 나가는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 공통 유전자를 지닌 친척을 구함으로써 자신은 희생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남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점은 자연계가 영속되어 가는데 핵심 원리다. 공통적이고, 범용적인 유전자는 유전자의 차별화 전략에도 맞지 않는다. 같은 유전자만으론 번영해 나갈 수 없다. 따라서 많은 친족을 둔 성숙한 암컷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희생 시스템은 벨딩 땅다람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암컷이 지속적으로 자손을 생산했더라도 자신의 유전자가 극히 일부분만 섞였거나, 전혀 중복되어 있지 않다면, 암컷이 희생자로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의 법칙은 이들 유전자가 어떻게 섞여 있는지 냉혹하게 본능적으로 선별해 낸다.

 

자연계에서 이 같은 연구를 처음으로 한 이는 진화론자 폴 셔먼이다. 그의 놀랄만한 발견과 통찰은 영국의 생물학자 잭 홀데인에게로 이어져, 그는 1955년 자신이 발표한 논문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할 때 두 친형제는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자아나 다름없다. 자기 육체를 큰 위험에 노출시키면서까지 두 형제를 구하도록 만드는 대립유전자는 상황에 따라 그 유전자가 이미 들어 있는 개체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그 사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동생은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공유하고 있고, 조카는 8분의 1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자신이 죽어서 2명의 동생, 또는 8명의 조카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지구상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극단적 상황으로, 만약 강물에 나의 손자나 조카가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면 누구든 강물에 뛰어 들어 구하려 할 것이다. 나의 유전자는 소멸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물에 빠져 있는 아이가 나와 혈연적 관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강물에 뛰어들 수 있을까? 아니면 그와 나는 같은 유전자가 없으므로 둑에 서서 아이가 빠져죽는 걸 그냥 지켜보기만 할까? 이 질문에 답하자면, 누가되었건 강물에 뛰어들 수 있다. 진화론자 칼 짐머에 의하면, 뉴기니 오지 계곡에 사는 종족 하나만 남고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전 인류의 유전적 다양성의 85퍼센트는 보존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유전자적으로 얽혀져 있다. 여러모로 명실상부한 의미로 형제이다. 따라서 극단적 상황으로 초대형 자연 재해가 일어나거나 핵폭발이 벌어진다고 해도 인류의 유전자를 지키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공통된 유전자가 피우는 짓궂은 장난이다.

 

나와 유전자가 직접적으로 섞이지 않아도 우리는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 직전의 아이를 구해낼 수 있다. 여기엔 우리 유전자가 지닌 공통적 요소가 범인류적 이타적 행동을 낳게 한다. 따라서 나의 이타적 행동으로 인류의 유전자 전체를 구할 수 있다. 물론 그 아이가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낼 때 한해서 하는 말이다.

 

홀데인의 이 같은 이해를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이타 행동은 어떤 유전적 이익 하에 움직인다. 즉 이타적 사회 행동을 유도하는 대립유전자가 그 유전자를 받는 자의 적응도에 끼치는 이익에 양 당사자 사이의 유전적 근친도를 곱해 평가절하 시킨(근친도는 1보다 작은 값이므로) 값이 그 이타적 행동이 자기 자신의 적응도에 끼치는 손해보다 클 때, 그 대립유전자는 자연선택에 의해 퍼져나가게 된다.

 

머리가 좀 아픈 이 법칙은 영국의 생물학자인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는 1960년대 20세기 최고의 유전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홀데인의 이론을 체계화해 앞의 가설을 공식 br-c>0로 정리해 발표했다. 여기서 b는 특정 사회적 행동이 유전자를 제공받는 자의 유전적 적응도에 미치는 이익이고, r은 두 당사자 사이의 근친도이며, c는 그 사회 행동을 행하는 개체의 유전적 손해이다. 이 부등식은 자연선택이 외관상의 이타적 행동을 유도하는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대립유전자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법칙은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즉 대립유전자는 자신을 복제하기 위해 자신이 들어 있는 개체의 번식 성공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 내 유전자의 사본을 보유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개체에게 비효율적으로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자기 유전자를 갖고 있는 새끼를 보호하는 건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이점에서 만약 해밀턴 법칙의 부등식(br-c>0)이 성립되면 이타주의는 나타나고, 부등식이 성립하지 않으면 유기체는 평상시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이 법칙은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다. 전투를 수행하는 소대원 중 어느 한 병사가 총알이 빗발치는 적진에 들어가 수류탄을 토치카에 집어던져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 누가 그 일을 맡아야 할 것인가? 혹은 우리 중 어느 누가 전체를 대신해 앞으로 돌격해야 한다면 누가 뛰쳐나가야 할까?

 

혹은 부대원 중 한명을 희생시켜 다른 요원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면? 등등 여러 상황에서도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 경영적 면에서는 기업이 구조조정 대상을 정한다든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면, 누가 사표를 던지도록 해야 할까? 누구를 해고자 명단에 올릴까?

 

이런 다양한 데서도 활용할 수 있다. 현대 조직 이론 면에서 보면, 기업은 이 법칙을 은연중에 구조조정 방식에 써먹고 있다. 자연계에선 자신의 유전자가 골고루 퍼져 있는 암컷 땅다람쥐가 포식자 앞에 제1희생자가 되듯, 조직에서는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중복업무와 중복사업 부문이 주로 첫 희생양이 된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기업 슬림화’, ‘중복 부문 축소같은 흔한 표현은 이 점을 잘 시사해 준다.

 

일반적으로 기업조직에서 같은 중복요소로 인식되는 대상은 누구일까? 여러 척도 면에서 평균을 유지하고 있는 보통의 직원들이다. 그들은 조직에서 중복업무, 중복사업과 마찬가지로 이 경우 중복된 인적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조직에서 가장 공통된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가장 우선순위로 광범위하게 타격 받는 건 이 때문이다

 

이를 사회적 현상에 맞물려보면, 사회적 희생자 대열의 최일선에 선 사람들은 당연히 일반 서민들이다. 흔히 지칭하듯 일반 시민들, 특별히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 부나 학력 등 모든 면에서 평균 수준내지 그에 밑도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극도의 양극화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학력과 재산, 사회적 연결고리 등 다양한 자원이 세습되어 가는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부의 편재 현상도 공통 계급을 모든 면에서 희생양이 되게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다.

 

벨딩 땅다람쥐 암컷처럼 공통요소를 지닌 보통의 직원들, 서민들에겐 희생이 숙명적이기만 할까? 지구상 가장 고도한 생물인 인간이라면 이 같은 선택지를 인식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다만, 이 위대한 변화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대원칙이 요구된다. 강인한 정신적 투지와 더불어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려는 사회적 공동 행동이다.

 

극히 다행스러운 점은 땅다람쥐는 어느 누구의 희생으로 다른 개체의 생존 조건을 마련하지만, 인간에게는 얼마든지 불합리한 사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도 전체를 살리고자 한다면 희생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이런 시도는 일부만을 살리려는 것보다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 온 인류사적 역설의 힘이 여기서 작동한다. 인간사의 장대한 휴먼스토리의 본질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것이다. 인류가 이성의 불을 밝히며 앞으로 전진해 온 원동력도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불의 앞에 정의의 깃발을 꽂으면 전진해 왔다. 그것은 다수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감수한 소수의 희생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다수를 구한 행동이었다.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만으로도 인류는 그 같은 목적을 어느 정도는 달성해 왔다. 이성의 행동이 모두가 사는 방법을 찾게 했다.

 

몇 년 전 벌어진 월가()‘99% vs.1%’ 행진은 무차별 희생을 강요하는 극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제도 혁신에의 혁명적 가능성을 보여준 인류사적 대사건이었다. 이로서 미국은 이전과 달리 보다 이성으로 사람과 세상 문제를 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의 단초다. 훗날 21세기를 논하는 사가(史家)들은 반드시 이 사건을 가장 큰 격변이자 전환점으로 다룰 것이다.

 

다른 한편, 지구 반대편에서는 오랜 독재 체제하에서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중동의 자스민 혁명도 본질 면에서는 같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이 오랫동안 해당국가의 반정부 세력을 지원한 결과도 작용한. 중동 사태의 복잡성은 여기에 기인한다.) 

 

어느 하나의 선택보다 모두를 살리려고 발 벗고 나선 사회와 조직은 어떤 경우든 뛰어나다. 이것이 더 큰 가능성을 지닌 세상의 모습이다. 이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선 인간의 행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전진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빠져 죽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 아이는 내 아이이기도 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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