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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by 전경일 2017. 1. 24.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더 컸다. 왜구 출몰지역의 농어민들은 약탈과 살육을 피해 내륙으로 이주했고, 이에 따라 해안지역은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국토의 가장자리가 도륙 당했고, 침구 지역은 내륙으로 확대됐으며, 학살당한 백성들의 피로 강물이 넘쳐났다. 이에 고려는 방어태세를 점차 강화해 그 결과 1389년에 이르면 왜구는 돌연 그 침구 방향을 중국으로 돌린다. 그 무렵 중국으로 가는 원거리 항해에 부담을 느끼면서 왜구가 중국 해안지역을 침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처럼 고려의 방어 태세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침구 방향을 돌렸다고 해서 왜구 침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다. 일본열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왜구에게 식량 등이 부족할 시에는 중간보급기지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과 일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는 항시 왜구 침구의 대상이 되었다. 왜구로서는 한반도가 반드시 취해야 할 전략적 침구거점이었던 것이다.

 

왜구는 점차 약탈대상지역을 고려 내륙지역으로 확대했고, 그로 말미암아 해상 교통망과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漕運)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어 버린다. 이는 결국 고려 조정으로서는 지방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지 못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침구에 따라 식량난도 극도로 심각해 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은 매일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고려는 14세기 말엽까지 가까스로 왜구의 침략 위협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왕조는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기진한 고려를 대체해 조선이 새로 개국되며 ()왜구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왜구의 침구를 받기는 조선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개국되었어도 왜구의 침구가 잦아든 것은 아니다. 고려는 해변의 섬들이 적의 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 주민을 뭍으로 이주시켜서 비워 버리는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 차원에서 해금책(海禁策)’을 취했는데, 조선도 같은 정책을 이었다.

 

1371왜환(倭患)’에 대해 명() 정부가 취한 기본 정책도 해금책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은 피치 못하게 함께 해금(海禁)시대를 본격 개막하게 된다.

 

본래 이 정책은 내국인이 왜구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 사무역 하는 걸 금지하기 위해 대내적 통제책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연해와 도서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초 의도와 달리 해금책은 중국의 해양무역을 저해하고 생활 터전을 잃은 해안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불법적으로 해상활동에 뛰어 들게 한 면이 있다.

 

또 바다를 비움으로써 해군력의 급속한 약화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연해 천여 리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명 정부는 뒤늦게 금구교섭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구로 인해 명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왜인이 매년 상습적으로 침략하였고, 연해의 간악한 무리들도 왕왕 그들과 결탁하였다··· 바다의 큰 도적들은 왜의 복식을 하고 깃발을 휘두르며 배를 나누어 타고 내지를 노략질해서 큰 이익을 취하였기 때문에, 왜의 환란이 날로 극성해졌다··· 그때 외적의 세력이 만연하여, 장저(江浙)지역은 유린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구로 인해 바다를 포기하는 수세적인 방법으로는 왜구를 근절시킬 수 없었다. 바다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근본적인 대책은 사라지고 더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우리로서도 육로 중심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기상이 어느새 사라지고만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조에 들어서면 대외 관계에 있어서 오로지 육로로 명()에 사신을 보내 대국으로 섬기면서 중화문화의 아류임을 자처하게 된다. 실로 통탄할만한 일이었다.

 

왜구 침구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이었을까? 문화적 자폐주의(自閉主義)에 빠져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대신, 중화의 권위를 빌어 내지(內地)의 백성들을 통제하는 획일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해양은 왜구 발호로 인한 해금책의 영향으로 조선과 명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는 일본의 비법적·불법적·탈법적 행동을 더욱 방관·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금책은 해외와 문물교류를 해야 국가 자체가 운영될 수 있는 일본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륙과의 교류에 의해 국가적 유지와 발전이 수혈되어 온 섬나라 일본으로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에도 그 본질이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침략을 근성으로 하던 왜로서는 보다 일탈적 세력을 방조하고, 후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 내 불량 집단은 점차 해양 침략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왜구 침구 행위가 큰 문제가 되자 조선과 명은 방향을 선회해 무력 징벌과 함께 제한적 해양교류라는 회유책을 통해 왜구 침탈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한된 정책으로는 왜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왜구의 욕구가 무한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명은 그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도발을 감수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른바 왜변(倭變)’이니 왜란(倭亂)’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중 특히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때 조선왕조를 존망지로에 처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국제전쟁이었다. 이는 조선과 명이 취한 해금책이 오히려 양국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왜구 발호를 막기 위한 조치로 취한 해양 차단의 결과, 수군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왜구 침구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철저히 해금책을 실시했지만, 그 빈틈을 해양 침략세력인 왜구는 강력한 도전으로 대응해 왔다. 그리하여 왜구의 지속적인 침구는 마침내 임진왜란이라는 대전쟁의 참화를 빗기에 이른다. 그나마 남해에서 왜의 숨통을 끊어 버린 이순신의 활약상에 힘입어 임진왜란 실질 전투는 종식되고 말지만, 그렇다고 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순신이 숨을 거둔 직후인 15981221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대마도를 쳐부수어 훗날의 근심을 없애자는 대마도 정벌론을 주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3일 후 항왜병 소기(小棄)와 조선인 박선을 왜인으로 위장시켜 대마도에 정탐 차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1599) 24일까지도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선조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마도 정벌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온적 전쟁 종결로 화근을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나지 않은 전쟁은 그 질긴 명맥을 유지하다가 300년 후에 일본의 조선 재침으로 나타난다. 이는 왜구를 막기 위한 소극적 정책이 더 크게 왜구 발호를 가져오고, 그 결과 국가 차원의 전란 사태로 커져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왜구의 불씨를 잡지 않음으로써 국가적 전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