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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 정부의 ‘모르쇠’ 전략

by 전경일 2017. 2. 3.

일본 정부의 모르쇠전략

 

왜구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 정부의 왜구 금압 요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왜구 문제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압을 요청하는 고려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 조정의 공식 입장은 회답하지 않고 막부의 처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13681월 중 승() 본토(梵盪)와 본류(梵鏐)를 고려에 보빙사로 보내 막부의 회답공문을 바쳤다. 하지만 막부의 회답은 고려 정부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왜구가 규슈, 시코쿠(四國) 등지에 할거 하고 있는 무리들이어서 교토의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아시까가 막부는 규슈나 시코쿠의 영주들이 조종하는 해적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 같은 막부의 태도는 양국 관계에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주변국의 왜구 금지 요구에 대해 막부는 어떤 이해도 갖지 않았고, 특별히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적 수사(修辭)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시도나 상황 전변을 기대하려는 소극적 행동이 전부였다.

 

막부는 조정을, 조정은 막부를, 막부는 다시 영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면피로 일관한 셈이다. 이는 조선과 외교 관계에서 막부가 일본국을 대표해 온 점과 천황의 지위가 막부의 감시 하에 있기도 하는 등 일본 내부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다. 즉 국왕이 실권자였던 우리 권력구조와는 다른 일본 정치체제의 이중 구조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측 주장처럼 왜구 발생 책임은 영주들의 몫임으로 막부와 일본 조정은 왜구 책임론에서 벗어나도 되는 것일까? 왜구와 천황과의 관련성은 그로부터 500년 뒤인 1868년 명치천황으로 불리는 일왕 무쓰히토(睦仁)의 발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무쓰히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를 교토에 조영할 것을 지시했는데, 신사 재흥(再興)을 위한 명령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도요토미 다이코(太閣,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없이 천하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았으며, 옛 성현들의 위업을 계승하여 받들고, 황위를 해외에 선양하고, 수백 년 후 또한 저들(조선인과 중국인)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였다.)

 

이는 왜구 침구의 결정판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배후가 누구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일본 권력 구조가 이중성을 띠고 있으므로 드러나지 않는 때가 많지만, 결국엔 침구 세력의 뒤에 천왕이 있는 것이다. 당시 무쓰히토 천황이 조성케 한 도요쿠니 신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126천명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耳塚)’ 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도요쿠니 신사를 짓게 함으로써 천황은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토요토미의 침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다른 한편, 이 귀무덤은 우리에게는 한이 서린 곳인데, 근대 시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이 귀무덤이 적에게도 자인박애(慈仁博愛)의 정신을 발휘한 증거이자, 적십자 정신의 선구라고 내외에 선전하며, 영문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해외에도 돌리기까지 했다. 천인공로할 만행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막부시기, 막부에 휘둘리기도 하고 명색뿐이기도 한 면도 있지만, 천황은 막부의 그늘에 숨어서 일본의 침략적 이해를 철저히 대변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막부에서 천황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정권 교체(大政奉還)’가 명치유신인데 근대 천황상이 창출되던 시기, 일왕이 현창하고자 했던 자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이는 중세 시기와 근대 일본의 침략주의가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장관이었던 기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는 한일 병탄이 있던 191010나는 도요 공의 신령을 받들어 일본 민족 해외 발전의 수본존(守本尊)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실제로 합방 후인 19182월 그는 앞서 한국을 병합함으로써 일본이 점차 아시아 대륙으로 발전함에 따라 도요 공을 추모하고 그 묘사(墓社)에 참배하는 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자평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일본 군부는 합방 전후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내에 축성한 왜성(倭城)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35년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울산 왜성을 비롯해 11곳의 왜성을 유적지로 제정(1939년까지)해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로 하여금 왜성 보존 활동과 관광 개발을 활발하게 전개하도록 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임진왜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봉건 시대 일본의 천황은 하나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구 침략에 관해 천황 책임론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황 책임론이 불식되려면 여기에는 역사적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 근대 명치유신 이후 천황이 국가 원수(元首)이자 군수통수권자로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현재 일본 헌법이 정하듯,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막부 정권 이후 명치유신기에 접어들면 천황은 대외 침략의 최종 결정자이자, 실행자로 직접 나서서 활동하게 된다.

 

지금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형식상 어디까지나 일본의 최고 통치자다. 우리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카운터 파트너는 천황이었고 신임 주일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도 천황이다.

 

이 같은 구체적인 침략행위와 위상은 과거 천황을 역사적 책임과 무관한 존재로써 자리매김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과거 막부시기에도 지금의 일본 헌법이 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천황은 같은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집권에 성공한 각 시기 일본 막부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지 않고 천황 일가를 유지하고 관리해 온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