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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뿌리 깊은 왜구의 한반도 침략사

by 전경일 2017. 2. 15.

뿌리 깊은 왜구의 한반도 침략사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오랜 시간 역사적 교류가 함께 한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은 우호적 관계보다 갈등의 골이 더 깊다. 이 점은 지금도 변함없다. 왜 그럴까? 역사적으로 오랜 이웃이지만, ‘가까운 이웃만은 아닌 한일 관계의 씨줄 날줄을 파헤쳐 가다 보면 한국과 중국을 침구한 원인과 주체를 만나게 된다.

 

일본은 동아시아 바다가 평화의 바다가 아니라 갈등의 바다이자, ‘불안정한 해역으로 만든 주역이었다. 한국과 일본 간 해양 거리는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불과 50킬로미터, 규슈까지는 200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근해조차 원양(遠洋)으로 벌려 놓는다. 과거형이든 현재형이든, ‘왜구는 한일 간 바다를 끊임없이 갈등의 해협으로 만들어 왔다. 이는 일본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왜구를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동아시아 바다가 무법화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 같은 왜구 문제는 한일 관계를 넘어 지금도 한중일 삼국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유사 이래 주변국들과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빚어왔다. 그 갈등은 외견상 단기적으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일본의 불행으로 종결되고 마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 일본이 각국과 벌이는 영토 분쟁의 본질은 갈등 국면을 계속 유지시켜 재미를 보려는 일본의 왜구적 성향에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일본이 달라지지 않고는 분쟁 국면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오랜 역사적 경험상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과연 동아시아 세계에서 평화의 동반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 -일간 갈등의 첨예한 대립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로부터 전개되어 온 한일관계사를 왜구사를 통해 다시 탐침해 보는 작업이 중요하다. 우리와 왜는 고대 시대에 어떤 관계에 있었고, 어떤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태왕 vs 왜구

 

집안(集安)에 있는광개토태왕비문은 왜()와의 관계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이 뚜렷하게 나온다. 고구려와 왜의 충돌이 발생한 것은 서기 391, 백제가 고구려에 대공세를 취하면서 왜군의 지원을 받는 게 단초가 된다. 이 무렵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실시해 오던 조공도 하지 않고 오히려 바다를 건너온 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한다. 이때 왜의 공격은 독자적인 게 아니라, 백제의 지원군적 성격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기 훨씬 전인 391, 백제의 고구려 공격에 대해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동원해 이를 토벌하고 신라까지도 신민(臣民)으로 삼는다. 이때 출병한 왜는 고구려 군에 궤패당해 퇴각했다. 다음해인 392(진사왕 8)394(아신왕 3), 그리고 395년에도 백제는 고구려와 연이은 전투를 하는데 이때 모든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396년에도 광개토태왕은 스스로 수군을 지휘하여 백제 정벌에 나섰다. 이때 태왕의 백제 정벌에 대해 비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영락 6년 병신에 대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제군을 토벌하였다. 군대가 남쪽에 이르러··· 을 공취하여 그 국성을 핍박하였다. 백제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맞서 싸우러 나왔다. 광개토대왕은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본부대를 보내어 성으로 진격케 하였다. 백제 군대가 굴(국성)으로 돌아가자 진격하여 곧 성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왕은 궁핍하게 되어 남녀 생구 1천인과 세포(細布) 천 필을 헌납하면서 광개토대왕에게 지금 이후로 영원히 노객(老客)이 되겠다고 스스로 서약하였다. 대왕은 처음 잘못한 죄를 은혜로서 용서하고 후에 순종하는 정성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때에 587백 촌을 얻고 진주(백제왕)의 아우와 10인의 대신을 거느리고 군대를 이끌고 환도하였다.

 

정벌의 결과 고구려는 백제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주국(主國)과 노국(奴國)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이듬해인 3975월 왜와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왜에 보낸다. 전지는 왜를 잘 설득하여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정황을비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영락) 9년 기해에 백제가 전날(396)의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시 차 평양에 갔는데,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대왕에게 보고하기를 왜인들이 우리 국경에 가득 찼고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노객(신라왕)(왕의) 백성으로 왕에게 붙 쫓아 명령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은혜와 자비로써 그 충성을 아껴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돌아보고 밀계를 고하였다.

 

백제와 화통한 왜의 지원군이 신라국경에까지 침범하게 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왕이 광개토태왕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태왕이 백제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따라서 400년에 단행된 고구려의 백제 정벌은 백제가 서약을 어긴 데에 대한 응징과 바로 전년에 있었던 신라의 구원 요청에 대한 군사적 행동의 성격이었다.

 

(영락) 10년 경자에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하게 하였다. 남거성(南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기까지 왜가 그 안에 가득했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나고···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렀는데 성이 곧 귀복하였고, 신라인 수병(戍兵)을 배치하였다. 신라 염성(鹽城)을 공격하자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나머지 왜는 무너져 도망하였고 ( )성을 빼앗아 신라인 수병을 두었다. 과거 신라의 매금(寐錦, 임금)은 몸소 와서 일을 논한 바 없었다 ···신라의 매금은 종으로 조공하기를··· 몸소 청하였다.

 

400년 정벌에서 광개토태왕은 기병까지 동원하여 신라의 국경을 위협하던 백제와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고구려와 신라의 주종 관계는 더욱 확실해 진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을 종합해보건대, 왜의 신라 국경 침입은 백제의 참언에 따라 고구려가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말에 신라 국경에 병력을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에서 동원한 병력이 보병과 기병을 합쳐 5만이었다는 얘기는 왜의 병력 또한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때도 왜의 군사적 전략은 철저하게 외국에서의 전쟁 수행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자국 영토 내 공격을 받은 것은 여몽연합군의 정벌 시와 2차 대전시 미국에 의한 점령시기 말고는 없다. 전장 자체를 타국에서 찾는 것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침구할 자원을 계속 마련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1611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