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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by 전경일 2017. 2. 23.

신라의 경우: 집중 침구 대상

 

신라는 건국 이후 꾸준히 군사적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왜구대책에 있어서 대체로 방어전술로 일관했다. 왜구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295, 407)에 걸쳐 왜구의 근거지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신라는 왜구의 침입이 있을 때면 선수후공(先守後功)’의 전술, 즉 왜구가 철수할 때를 기다려 기습, 매복, 섬멸하는 작전으로 왜구를 퇴치했다. 토벌에 성공한 9개의 사례 중 한두 번의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방어 전략이었다.

 

삼국사기를 보면, 우리나라 고대 시기에는 유독 신라만이 왜구의 침범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역학관계가 크게 작용한다. 이들 각 국가와 왜는 외교관계, 지리적 여건, 당시 일본열도 내 국내사정 등 여러 면에서 각기 달리 관련을 맺었다. 그 중 신라는 왜와 외교관계가 가장 원만하지 못했고, 지리적으로도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왜의 집중적인 침구 대상이 된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6세기까지 67건의 왜()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 34건은 침입과 토벌에 관한 것이다. 혁거세왕부터 200년까지는 4회에 걸쳐 왜의 침입이 있었으나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4세기 들어서는 침입과 왕래가 각각 3회씩 있었다. 이 시기 왜의 침입은 신라의 청혼거절과 345년 왜측의 절교 선언 이후에 있었던 일종의 보복적 성격이었다.

 

왜의 침입과 피해가 가장 컸던 시기는 5세기 무렵으로 이때에는 모두 16회의 침입을 받고 있다. 232(조분왕 3) 침구 시 왜병 사상자는 1천여명이었고, 405(실성왕 4)에는 300여명이 살상되고 포획되었다. 또한 476(자비왕 19)에는 200여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왜병을 물리치는데 동원된 신라군의 숫자를 보면, 393년에는 동원된 기병이 200, 보졸이 1천명이었고, 444(눌지왕 28)에는 왕이 수천여기를 거느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신라를 침구한 왜구의 규모는 100척의 배에 1천여명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이보다 훨씬 규모 작은 것이었다. 침구 지역도 대부분 해안지대에 국한됐다. 459(자비왕 2) 4월에 왜인이 병선 100여척으로 동해 연변을 습격하고 월성(月城)을 포위했다. 62월에는 왜구의 침구에 대비해 해변에 2성을 축조했다.

 

737년에는 일본에서 신라 정벌에 대한 논의가 일었다. 그 이유는 신라를 다녀간 일본 사신이 귀국하여 자신이 냉대를 받았다고 보고하자 온건파는 사신을 다시 보내 사유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강경파들이 신라 정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742년에는 일본에서 온 사절을 신라왕은 만나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753년에도 일본 사신의 태도가 오만무례하여 신라는 그들을 인견도 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760년에는 일본에 간 신라 사신이 입국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등 양국 관계는 계속 호전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일본은 이 해 11월 당시 당()으로부터 병법을 배우고 돌아온 기비 마키비(吉備眞備)에게 사인(舍人) 6인을 보내 병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이어 이듬해인 761년에는 미노국(美濃國)과 무사시 국(武藏國)에서 각각 20명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를 습득하도록 했다.

 

또한 동시에 일본의 서해도 7국에 군사 무기를 제조하도록 명령하고, 남해, 동해, 서해에 있는 여러 섬의 선박을 검열하고 전술 훈련을 하는 등 신라 침공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이때 신라 침략 준비는 일본의 국내사정, 즉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 仲麻呂)의 몰락으로 중단되고 만다. 그리하여 779년 이후 양국 간 공적 관계는 단절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일본의 신라정토 계획

 

삼국통일전쟁 시기인 663년 일본은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42천명의 군대와 800척 이상의 함대를 파견했지만 백촌강 전투에서 대패한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오오노성(大野城)과 카네다성(金田城)을 축조하고 방어전쟁을 준비하는 등 당나라의 침략 위협에 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가 악화되고 신라와 당의 전쟁 위험이 높아지는 동안 신라는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해 720년까지 양국 관계는 교류가 증진된다. 그동안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천황 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 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표출하기 시작했다.일본서기등이 편찬되며 소위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당시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일본의 이런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따라서 720년경부터 두 나라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동시에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731(성덕왕 30) 일본은 300척의 전함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패배한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발발하며 당이 외부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되자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한 가운데 신라를 도모할 궁리를 한다.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 仲麻呂)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신라 등 외국과의 외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다자이후에서 신라정벌을 목적으로 태재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이라는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해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756년 일본 조정은 북규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축조하고, 용광로와 무기제조 공장을 세우는 등 대규모의 병참기지를 건설한다. 759년에는 3년 기한으로 호쿠리쿠도·산인도·산요도·난카이도 4도에 전함 500척을 할당해 건조하도록 하고, 761년에는 미노국(美濃國무사시국(武藏國)에서 20명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를 배우게 한다. 이 같은 침략 준비는 유래가 없을 만큼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757년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났던 오노 타모리(小野 田守)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한다. 759년과 760년에도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 교류한 것은 신라 침공시 발해의 협공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오노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楊承慶)이 인솔하는 발해사절단을 같이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신라침공 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코마 오오야먀(高麗 大山)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발해는 답례사신으로 무관대신 문관 왕신복(王新福)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침공계획에 사실상 거절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있었기에 굳이 일본과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본 국내에서는 신라와의 전쟁의 피해로 인민들이 고통에 직면하고, 대외적으로 신라도 일본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당(), 발해, 신라 삼국간 관계가 정비됨으로써 대륙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나라(奈良) 조정이 오랫동안 준비 해온 신라정토 계획은 사실상 추진 동력을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후지와라노는 몰락함으로써 일본의 국가적 사업이었던 신라침공 계획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오랜 역사상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내부 불만을 밖으로 표출하려는 욕구와 국제적 관계의 허점을 파고 들어가는 방식을 보인다. 또 처음엔 소규모로 진행되다가 끝내 전면전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일본 내 급진 주전파의 준동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한일 관계의 첨예한 대립 원인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