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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고려·조선의 경우: 왜구는 한반도의 왕권을 두 번이나 바꿨다

by 전경일 2017. 5. 25.

고려·조선의 경우: 왜구는 한반도의 왕권을 두 번이나 바꿨다

 

우리 역사상 왜구의 침입이 가장 심했던 때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였다.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가장 심대하게 영향을 미친 외부 세력이 왜구일 정도다. 왜구의 잦은 출몰과 약탈로 지방 민심은 크게 이반되었고, 이에 대응하는 중앙정부의 무능력은 극에 달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이 시작된 것은 1223(고종 10)부터였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간 529회 침입했다. 연평균 3회 이상 침입한 것이다. 침입지역도 해안과 내륙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226곳이 피해를 입었다. 왜구의 선단은 많을 때는 130, 213, 350, 500척 등으로 규모가 컸고, 인원도 기병 700여명, 보병 2천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1352년 이후에도 고려군과 왜구는 매년 전 해안의 도서지역에서 산발적인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국가 전체가 왜구와 상시적 전투 국면에 접어든 셈이다. 일본 학자들조차도 고려 말에 이르러 모든 국가적 역량이 왜구방어에 쓰일 정도였고, 역사는 오직 왜구의 왕래를 기록할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고려 말 왜구 문제는 심대했다.

 

1357514일 왜구가 개경 인근 교동(喬洞)에 침구하자 고려 조정은 개경 일대에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하고 수도권 일대에 대한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왜구는 장기간에 걸쳐 교동을 점거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개경으로 올라오는 조운선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그 결과, 고려 조정은 조운선이 불통되어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할 수 없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갑자기 출몰하는 왜구에 조운선은 빈번히 약탈당했고, 안정적이던 농업 경제 활동은 크게 위협 받았다. 심지어는 군량미 부족으로 전투력이 크게 손상되기도 했다.

 

1358311일에는 개성 근해 방면인 배천(白川) 남쪽 40에까지 왜선 400여척이 침입하여, 이곳에 정박 중이던 고려 선박 300여 척을 불태웠다. 고려 조정 코앞에까지 와서 약탈 행위를 한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413일 최영을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로 임명한다. 또한 ()왜구작전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모두 군법으로 엄중히 다스릴 것을 명령한다.

 

왜구가 해안지역에 위치한 조세 창고를 약탈하며 기승을 부리자, 전라도진변사(全羅道鎭邊使) 고용현은 연해(沿海)의 조창(漕倉)을 옮겨서라도 왜구의 약탈로부터 세곡(稅穀)을 보호해야 한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이에 따라 고려 조정은 해안지역 인근의 여러 조창을 내륙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조치까지 취한다. 한편, 전라도 해안 방면으로 침입한 왜구의 다른 일단은 429일 한주(한산) 및 진성창(鎭城倉, 군산 성산면)으로 몰려들었다. 진성창은 만경강과 금강 유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인데, 정부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조창을 옮겼고, 창고를 보호하기 위해 입구부터 성을 쌓기도 했다.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자 왜구의 침입지역이나 동선은 더욱 확장돼 이들은 광양만에서 내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 물줄기를 타고 하동, 산청, 화개를 지나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민가까지 노략질했다.

 

그 무렵 왜의 잦은 침구에 고려군이 번번이 수세에 몰린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군의 군사력이 약했던 데이는 어떤 원인이 있었던 것일까? 이 점은 번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를 대할 때 세심한 주의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역사를 총체적 관점에서 통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 문제야 말로 부분 진실이 아닌 전체 진실을 규명할 때 왜곡의 늪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질문과 답변은 자칫하다간 일본 학자들의 교묘한 논리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다. 일본 학자들은 특별히 이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는 무슨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일까? 왜구가 정규군에 해당하는 무장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일본 학계의 교묘한 주장이 뒤섞여 있다. , 고려군의 대비력이 약했기 때문에 일개 도적떼인 왜구 침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지 왜구가 정규군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허튼 주장이다. ‘비정규군(왜구)’정규군(고려군)’의 구도에서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한 것은 고려군이 약체였기 때문으로 이는 침구와 약탈 책임이 고려에 있다는 식의 고려 책임론으로 전가된다. 왜구 침구에 관한 일본 학계의 일본 책임 회피론은 이 같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마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국가 간 국서(國書)에서 일본이 ()’, ‘()’, ‘()’ 따위의 용어를 쓰며 일본 우위성을 주장하려는 논리와도 같다. 이 같은 주장은 교묘한 책임 회피성 주장에 지나지 않지만, 지금의 독도문제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이 제기하는 이 같은 침소봉대식물타기식 주의주장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이 자행하고 있는 역사 왜곡의 한 뿌리는 이처럼 세세한 밑 부분에까지 닿아 있다. 왜구 구성이 주로 정규군,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혼합군, 또는 정규군에 버금가는 비정규군일 거라는 주장은 침구 규모 때문에 나온다. 하지만 침구시 동원되는 선박과 인원을 보면 대부분 정규군수준임을 알 수 있다.

 

문제의 방향을 우리 쪽으로 돌리자면, 왜구가 정규군이라고 해도 이 같은 약탈집단을 제대로 막지 못한 데에 고려 내부의 사정이 크게 한 몫 한다. 고려군은 정말 약체이었던 것일까? 당시 고려는 원의 오랜 간섭으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북쪽의 침범을 막으며 동시에 남쪽 해안 지방까지 방어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대단히 어려웠다. 왜구에 의한 조운선 약탈로 국가재정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고려 정부는 불가피하게 해안지방에 있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고 육로를 통해 조세를 운반케 하는 등 나름 할 수 있는 대응 조치를 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은 해금책과 마찬가지로 왜구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었고, 약탈에 의한 피해를 줄일 수도 없었다. 고려 조정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왜구의 전략과 침구지역도 따라서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즉 왜구로서는 해안지방을 침구해 양식을 약탈하려는 계획이 성과를 거둘 수 없자 내륙 깊숙이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파리떼처럼 달라붙은 왜구의 이 같은 집요하고 쉼 없는 침구에 고려는 서서히 핍진해 갔다.

 

1370년대 중반, 왜구의 침구 형태가 대형화되어 가고 있을 때,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사망하고 우왕이 즉위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의 틈에서 왜구는 침구를 계속 감행해 왔다. 그리하여 1374913, 왜구가 도성 근방까지 몰려들자 고려 조정은 어쩔 수 없이 개경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기까지 한다. 왜구의 계속되는 노략질로 고려의 중앙정부는 지방통제력을 상실하였고, 특히 삼남(三南) 지방은 여러 곳에서 행정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고려왕조가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잃게 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시기 고려는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왜구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역량을 축적한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이를 기화로 실전에서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낸 무인 집단과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층은 새로운 개혁방안에 몰입한다. 이들은 고려가 자체개혁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판단 하에 보다 급진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창신해 낼 것을 주창한다. 그 결과, 새로운 국가, 조선은 창업된다. 조선 창업에는 결과적으로 홍건적과 왜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당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의 명분으로 내세운 ‘4불가론(不可論)’ 중 하나가 북방의 명나라를 공격하면 남방의 왜구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져 왜구가 그 허를 노릴 것이다(擧國遠征 倭乘其虛)’였는데, 왜구의 발호를 보면 전혀 근거 없는 명분만은 아니다. 남으로는 왜구의 침구가 하루도 쉬지 않고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는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략과 내부의 혁명세력에 의해 마침내 전복되고 만다. 왜구의 잦은 노략질이 결국 한 나라의 왕조까지 무너뜨린 것이다. 이처럼 1392년 고려 멸망과 조선 창업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왜구였다. 그러나 조선 창업 이후 왜구의 의한 왕조 멸망이 또다시 벌어질 거라는 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통해 국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게 일었지만, 위기감은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려 멸망 후 518년 지난 1910년 조선은 일본 근대 왜구들의 집요한 도전에 그만 국권을 빼앗기고 만다. 고려 멸망으로부터 근 500여년 동안 때를 봐서 출몰하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하며 그 뿌리를 그대로 유지해 온 왜구 활동은 그로부터 500여년 후 과거 왜구식 행태를 그대로 복제한 일본 명치정부에 의해 조선 병탄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왜구 발호로 인해 우리 역사에는 사상 두 번에 걸쳐 왕조 멸망이 발생하게 된다.

 

오랜 역사상 북로(北虜)’의 침범은 가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남왜(南倭)’의 존재는 역사상 가장 고질적인 우환이자 최대 피해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20세기 들어 일본의 근대 왜구가 오랜 준비 끝에 침범해 왔듯 오늘날 일본의 재침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그렇다면 왜구는 오랜 역사 동안 어떤 식으로 한반도 침구 행위를 벌여온 것일까? 집요하고도 끈질긴 그들만의 교묘한 책략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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