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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구사협갈(驅使脅喝) 위협과 공갈로 광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구사협갈(驅使脅喝) 위협과 공갈로 광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1375(우왕 원년) 5월 왜장 후지 쓰네미쓰(藤經光)는 부하들을 인솔해 쳐들어가겠다고 공갈하며 식량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해 식량을 주고 순천과 연기 등지에서 살게 했다. 그런데 이 일은 결과적으로 왜구가 더욱 포악해 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 원인을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세우의 명령으로 김선치(金先致)가 일본 해적 쓰네미쓰 무리를 유인해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난 뒤부터 왜구들이 사람과 가축을 살해하고 침구시마다 더욱 광포하고 잔악하게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도 살상했다. 왜구는 한번 침구하면 인명을 남김없이 살해해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의 주군(州郡)은 텅 빈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고려의 불철저한 대응이 왜구의 잔학성을 더욱 부추 킨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수에 그친 이 사건 하나로 왜구가 극악무도하게 흉포해 진 것만은 아니었다. 이 기록이 있기 전에도 왜구가 사람을 살상한 예는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건 이후 일본 내 어떤 원인으로 왜구가 더욱 난폭해지고 잔인해 진 것만은 분명하다.

 

왜구가 취한 위협과 공갈이라는 이중 전략은 임진왜란 이후 국가간 강화 교섭에서도 수차례 나타난다. 조선 전기가 왜구 근절을 위해 막부와 규슈 중심의 수호 대명과 다원적 대일관계를 전개했다면, 조선 후기에는 대마도를 통한 일원적 대일 관계를 갖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1602년 조선과 외교 재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대마도 측은 통신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파견하지 않으면 목전(目前)의 화를 재촉 할 것이다”, “조선이 일본의 화를 입게 될 것이다라며 위협을 가했다.

 

국교 재개를 위한 협상 자리에서 나온 일본 측의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팽팽한 김장감이 감돌았다. 이에 대해 조선 측의 협상 담당자였던 전계신(全繼信)은 다음과 같이 당당히 꾸짖고 있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잃은 많은 조선인들이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이 두렵지 않은가?

 

임진왜란 당시 참전한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조선이 화호(和好)에 불응하면 이는 예가 아니므로(非禮) 재침하고 말겠다고 협박했다. 일본의 이런 극단적인 조선재출병론(朝鮮再出兵論)’은 실은 토요토미 정권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도쿠가와 정권이 한계를 만회하고자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 내부 문제를 풀기 위한 고육지책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화의(和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전후 처리를 위한 외교 재개 협상 테이블에서 일본 측의 발언은 광포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임란 이후 양국은 국내·외 정치 부담감을 덜기 위해 협상에 임하지만, 조선이 원한 바처럼 일본이 본질적으로 개심혁면(改心革面)’한 것은 아니었다. , 전쟁의 참화에 대해 반성하고, 양국 간의 진정한 선린을 모색하고자 한 자세는 아니었다.

 

이때 이후로도 일본의 왜구 근성은 바뀐 적 없으며, 이 같은 광포함은 끝내 근대 일본 제국주의로 전수되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