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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적시장서(適時場噬) 침구 시점과 장소를 노려 물어뜯고 확장한다

적시장서(適時場) 침구 시점과 장소를 노려 물어뜯고 확장한다

 

유사 이래 왜구의 오랜 침구에는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목표가 있다. 바로 약탈이다. 왜구 약탈사는 끈질기며 활동상은 국제적이기 조차 하다. 한반도를 주요 목표로 하여 중국과 멀리 동아시아 일대로 확대된다. 일본이 양산해 낸 왜구는 고대 시기로부터 동아시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평화의 바다라는 곳간[]에 마치 쉴 새 없이 쥐떼를 풀어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왜구 활동은 우리에게는 900여회의 침구와 한 번의 임진왜란, 한 번의 강제 병합으로 귀결된다. 왜구 침범 기사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서기 391년을 기준으로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까지 1207년간,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1910년까지는 1519, 해방 시까지 따지면 무려 1554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왜구는 지속적으로 침구해 왔다. 지구상 어떤 침략 행위도 이처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전개된 적은 없다. 또한 크고 작은 900여회 침구의 결정판으로 대전란이 발발한 예도 없다. 침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반도 내 성립된 국가들은 늘 왜구 침구에 의해 지반이 흔들려 온 셈이다.

 

왜구가 가장 극성을 부렸던 고려 말을 보면, 왜구는 1350년부터 연속적으로 침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356년과 1368년 두 해를 빼고는 매해 침입할 정도로 침구 행위는 일상화 된다. 침구가 없을 때에는 또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해 할 정도였다. 1367년과 같이 침구가 적을 때에는 단 1회에 불과하지만, 많을 때에는 1352년과 같이 무려 12회나 달한다. 이를테면 침구의 연례행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침구 행위는 20년 동안 총 77회에 육박한다. 한 해에 평균 4, 석 달에 한번 씩 침입한 꼴이다. 이처럼 왜구의 침구는 집요하고도 연속적인 것이었다.

 

왜구의 역량을 살펴보면 13~14세기에는 1~2척 정도 출몰했으나, 1350년경부터는 20척에서 200여척에 이르고, 숫자도 3천명에 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단순히 해적떼 수준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으로 확장돼 가는 양상이다. 이런 숫자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 동원되는 숫자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였으나, 해적의 무리로서는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이처럼 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대형화되는 추세에 있다.

 

침구 시점에서도 일정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불예측성을 특징으로 하는 왜구 침구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측 가능한 점에 해당된다. 대체로 3월에서 7월 사이 침구가 집중되는데, 이는 고대로부터 거의 변한 적이 없다. 신라를 침구할 때의 월별 침구시점을 살펴보면 이 점은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왜의 대()신라 침구 시점]

/내용

1

2

3

4

5

6

7

8

9

10

11

12

불명

교빙

1

3

7

3

3

2

2

 

 

1

 

1

 

21

침범

 

1

2

11

5

4

3

1

 

 

 

 

7

34

합계

1

4

9

14

8

4

5

1

 

1

 

1

7

55

 

신라와 교류할 때나, 백제의 요청으로 원군을 파견할 때에는 왜()1월에도 무력을 동원하곤 했다. 그러나 대개 침구 시기는 봄과 여름 사이에 집중됐다. 왜구가 이 4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침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왜구 침구가 주로 식량 사정이 가장 절박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193년의 경우처럼 왜인 1천여 명이 기근이 들어 식량을 구하러 온 사실은 침구 목적을 보다 명확히 드러내 준다. 춘궁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신라로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왜보다 생산력이 높았던 관계로 비축한 식량이 있었기에 그나마 사정이 나았고, 그 점이 왜구 침구 이유가 되는 것이다.

 

침구시기를 보면 신라와 고려 간에는 다른 점이 엿보인다. 즉 신라 때까지는 주로 봄과 여름철 사이에 출몰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추수가 끝난 가을에 집중적으로 약탈이 이루어졌다. 침구지역도 남해안 지역에서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 곡창지대와 조운선의 통로인 서해와 연안 지역으로 확대된다. 조선조 들어 태조 원년(1392)부터 태종 8(1408)까지 16년 동안 왜구가 침구한 월별 기록을 살펴보면, 5월과 8월에 각각 14회와 15회 침입해 다른 달 대비 배 이상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5월은 춘궁기, 8월은 추궁기라는 계절적 요인이 작용한다.

 

왜구가 침범한 주요 요인은 일본 내 식량 사정과 관련 있다. 일본은 고대로부터 경제 문제를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약탈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왜인들은 생활이 궁핍해지거나 사회가 불안해지면 일본 밖에서 물품이나 식량을 약탈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약탈에 의한 경제 행위로 삶을 영위해 왔다. 이는 환경이 열악해지면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찾기보다 주변국에 대한 침탈로 생존을 모색해 왔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물론 뒤로 갈수록 침구 행위는 더욱 대형화 되어가고 대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약탈의 학습 효과가 반영된 결과다. 이처럼 왜구 발생은 언제나 동일하게 일본 내부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왜구 침구의 특징은 근세 서구 열강과 교역을 통해 경제 도약을 꾀하던 일본이 1929년 세계 대공항이 일어나며 각국이 자국 중심의 경제 체제로 전환하자 급격히 대외 침략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4세기 무렵이나 20세기나 약탈 본성 면에서는 달라진 게 없는 증거다. 이 점은 21세기 세계 경제 불안과 일본에 의한 동아시아 갈등의 고조가 상호 밀접히 관련될 수 있음을 예견해 준다. 일본이 내부의 어려움을 풀기 위한 해법으로 과거의 침구방식이라는 카드를 꺼내들까 하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침구 세력에게는 상황이 악화되면 그간 국가 간 맺어 온 외교적 관계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말을 바꾸고, 그간의 신뢰 관계는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릴 수 있었다. 또 한편 상대의 잉여물을 목표로 침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왜구식 계산법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왜구 경제의 근간은 약탈이었고, 교역은 평화적 시기의 행동에 불과했다. 고대로부터 일람해 보면, 일본 역사는 왜구 침구사와 시기나 국가 변천사 면에서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상 일본이 침략성을 지속적으로 드러낸 것이 그리 새로운 바는 아니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 침구를 하던 침략적 성향이 그들의 DNA에 박혀져 반영되는 게 아닌가 한다.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약탈의 적시를 택해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국가가 나서서 이를 직접 지휘하고 주도하는 침략 방식은 왜구 침구의 전형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적시의 약탈 시점과 관련되어 훗날 국가적 침략 행위인 임진왜란이 왜구가 가장 극성을 부리던 4월에 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왜구 침구 조건이 침구 시기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음을 뜻한다. 침구하는 쪽은 이런 패턴을 잘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피해자의 기록은 이 같은 사실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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